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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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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성경본문 마태복음 14:13-21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논리는 세 가지 형태로 분석을 합니다.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이 지구촌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이 세 가지 논리로 겸비해 가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경제논리입니다. 정부의 최대관심사는 사실 경제입니다. 경제가 무너지면 아무리 정책을 잘 제시하고, 아무리 교육이나 문화정책을 잘 하고, 아무리 국민들에게 달콤한 슬로건을 내 걸어도 그것은 신임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모든 일들이 경제논리로 이루어져 가는 측면을 보게 됩니다. 국가외교도 고상한 것 같지만 전부 돈 싸움입니다. 통상외교라고 말합니다. 유행도 경제논리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유행이 화려하고 패션이 화려한 것 같지만 그 화려함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논리입니다. 이라크 전쟁은 군사논리로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경제논리가 그 뒤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루어 가는 역사의 진행 속에는 경제논리라는 게 항상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서스가 인구론을 저술했습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데 한 사람만 낳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낳습니다. 그래서 또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불어납니다. 그러나 식량은 그렇게 생산되는게 아닙니다. 생산은 산술급수적입니다. 여기에서 ‘세계는 경제적인 고통과 위기를 맞이한다’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인구가 13억입니다. 비공식적으로는 10%가 더 많다고 합니다. 한 가정, 한 자녀 운동입니다. 이것이 전부 경제논리와 똑같이 맞물려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한 자녀로 만족 못하는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숨어서 두 자녀, 세 자녀, 심지어 아홉 자녀까지 낳고 있는 가정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자녀에 대한 욕구가 그런 국가의 정책도 무시하고 불이익을 각오하면서 까지 아이를 낳는 가정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선진국에 경제논리와 연관해서 인구정책이 국가적인 문제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기를 원하면서도 못 가지는 가정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저 출산을 시도하는 가정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 지금 딩크족이 자꾸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안 낳는게 돈 버는 것이다’(double income no kid)라는 것입니다. 돈 벌어 보았자 아기 한, 둘 낳아서 키우다보면 거기에 다 들어가고 내가 즐길 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풍조가 지금 세계 제일의 저 출산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확산되어 가고 있는 또 하나의 풍조입니다.

  정치논리

  두 번째는 정치논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현상을 가만히 보면 정치논리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언제나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이 대립을 하고 거기서 정치논리가 나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생산성을 강조하고 공산주의는 분배를 강조합니다. 이런 정치논리가 우리 사회 속에서 분야마다 함께 하고 있고 이것이 문제가 되고 이것이 대립을 합니다. 그러나 이 정치논리에서는 민주주의가 우위에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일부 많이 가진 사람들, 빈익빈 부익부의 모습이 문제입니다만 공산주의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공동분배를 해야 된다 라는 것을 시도해 보아도 그것은 더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도 이제는 자기 이론이 민주주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치논리라는 것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논리를 가지고 우리 사회를 지배합니다. 법 위에 정치가 있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되는데 법대로 해도 안 풀리는 문제는 정치로 풉니다. 그래서 정치로 푼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법으로도 안되는 것을 풀어서 좋게 만드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이 못하는 것을 해 내는데 있어서 거기에 법 정의를 무시하거나 법 현실을 무시하고 법 조문을 무시하는 그와 같은 행태는 용납이 안되지만 정치논리라는 것은 서로간에 만남이고 대화이고 나눔이고 서로 주고받는 거래입니다. 그래서 정치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정치적으로 인간관계를 가져야 될 때가 많습니다. 혈연이다 지연이다 학연이다 라는 이것은 정치논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앙논리

  또 하나가 앞의 두 가지의 세속적 논리와 맞서서 언제나 역사 속에 등장하는 논리가 신앙논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그 속에 답이 나오는 것, 즉 신앙으로 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경제논리로만 추구하고 정치논리로만 좇아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 신앙논리가 경제논리와 정치논리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됩니다. 이 신앙논리를 무시하면서 경제논리를 앞세우고 정치논리를 앞세우면 안됩니다. 우리는 신앙논리가 굉장히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캥거루라는 짐승은 덩치에 비해 새끼가 너무 작습니다. 3센티 정도 되는데 꼭 애벌레 같습니다. 그 조그마한 눈도 못 뜨는 새끼가 몸부림을 치면서 어미 주머니를 찾아서 들어가서 젖꼭지를 물고는 거기서 몇 개월 자라나야 캥거루 모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어떻게 경제논리로 설명합니까? 정치논리로 설명이 됩니까?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가 눈도 안 뜬게 에미 품을 알고 에미 젖꼭지를 알고 살려고 빠는 것을 보십시오. 누가 교육을 시켰습니까? 그건 신앙논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리고 자연만상을 지배하신다 라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볼 때 아멘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정치논리가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경제논리가 스며들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문제를 절대로 경제논리로 풀면 안됩니다. 이것은 다음문제입니다. 정치논리가 아닙니다. 인맥을 동원하고 무슨 조건을 내세워서 신앙문제가 풀리는게 아닙니다. 신앙논리는 피조물이 창조자 앞에서 항복을 하면서 답을 얻어내는 것이지, 창조자를 떠나서 이 땅의 것을 가지고 신앙문제를 푸는 것은 답이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기적의 나라다’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북쪽에는 김씨가 살아서 공산당이 저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주체사상은 공산혁명사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도 안 변하고 있습니다. 전부 지금 외형만 변하고 있고 북한이 지금 경제논리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물만 빨아먹자는 식입니다. 안 그래도 좁은 땅인데 둘로 나누어져서 남한은 지금 인구가 너무 많습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이 나라에 석유소비국으로는 조금 있으면 동메달감이 됩니다. 이런 현실을 가만히 보면 그렇게 불리한 대도 그래도 이렇게 나라가 돌아가고 풍성하고 잘 사는 것을 보면 기적입니다. 이것을 볼 때 정치를 잘 해서, 경제정책을 잘 해서 라고 그렇게만 답을 내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 땅에 있는 우리 성도들 백만명이 새벽마다 기도하는 여기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밖에서 보면 이 나라가 망할 것 같습니다. 교포들도 만나면 조국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여호와의 주권 아래서 안전합니다.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지금 이민을 많이 갑니다. 이민 박람회를 하면 수만명이 몰려듭니다. 인터넷에 이민광고를 띄웠는데 삽시간에 사천명이 신청을 했답니다. 저는 이민을 가본 적은 없고 외국에 가서 잠시 지내보았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그렇게 환상을 가지고 이민을 갔던 사람 중에 사천명이 역 이민을 했습니다. 한 일년은 좋습니다. 아이들도 자유롭고 교육환경도 좋고 그렇게 공부시키고자 했던 소원성취하고 좋은데 그러나 세월이 흘러갑니다. 애들이야 영어세계에 적응하자 부모와 대화가 잘 안됩니다. 그때부터 부모는 고독에 연습이 시작됩니다. 어디를 가도 알아줍니까? 거기서 뭘 시작해 보려해도 일이 잘 안되니까 전부 우울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가면 한국이 너무 그리운 것입니다. ‘아, 한국은 지금 단풍계절인데… 설악산 단풍이 얼마나 좋을까?’ 한국의 좋은 것만 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향수를 달랜다고 드라마 비디오테잎만 빌려 가지고 본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그리움을 달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에 갔는데도 한국음식만 찾게 되고 죄도 없는 김치만 자꾸 먹어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보다 좋은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불평하지 말고 사세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이 나라임을 믿으십시오. 신앙논리로 믿으십시오.  건강하게 살아보겠다고 정수기 물도 먹어보고 생수기 물도 먹어보고 지하수도 뽑아 먹어보고 수돗물도 먹어보는데 여러분, 우리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면 수돗물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별스럽게 찾아서 사는 사람 일찍 죽는 것을 봅니다. 위생 지킨다고 야단 떨어봐도 우리 생명이 주님께 있는데 신앙논리로 삽시다. 너무 그렇게 설 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 진리를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빈들의 기적

  오늘 본문에 보면 빈 들판에 이만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인데 실제로 이만명입니다. 배가 고픈 무리들이 해가 다 진 황혼 때 모였습니다. 보십시오. 빈 들판에 배고픈 백성들이 황혼 때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도 희망적인 광경이 없습니다. 거기 등장하는 논리가 경제논리입니다. “주여, 지금 이 들판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주리고 있는데 마을에 들어가서 먹게 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집에 가서 먹고 오도록 하자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엄청난 명령을 하십시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도 어떤 때는 아주 엉뚱하십니다. 지금 제자들이 자기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만명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합니까? 아니, 지금 제자들도 자기 먹을 것이 없는데 이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랍니다. 주님은 다 아시면서 이렇게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 처지를 모릅니까? 제자들이 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제자들이 해결 못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이 그 명령을 받고는 먹을 것이 있는가 찾아보니까 꼬마 아이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고는 주님께 보고를 합니다. “주여, 우리 가운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밖에 없나이다” “그것을 가져오너라” 주님은 아이로부터 그 오병이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감사기도를 하고는 제자들에게 떼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먼저 받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잔디에 앉아있는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를 거두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적의 사건 이상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경제논리로, 정치논리로 도저히 풀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보여준 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는 기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하셔놓고 ‘아, 내가 기적을 행하였도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는 기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신 일을 우리가 볼 때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연의 질서와 자연의 현상으로서는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것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기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적을 베풀기 전에 “큰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기적을, 그 무리들에게 베풀어 주셨는가? 그 동기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이 인간을 접촉하는 관심사가 불쌍히 여김입니다.

  열 명의 나환자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고쳐달라고 할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열 명을 보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시면서 치유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열 명이 낳았는데 아홉 명은 주님께 돌아와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한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런 괘씸한 인간들이라도 주님은 다 불쌍히 여겨준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의 은혜를 배반해도, 그런 인간이라도 치유해주실 때는 불쌍히 여겨서 치유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 같으면 돌아와서 감사할 줄 모르는 그 아홉 명은 처음부터 제외할 것인데 주님은 처음부터 제외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긍휼이고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 앞에 돌아오지 못한 아홉 명, 되 먹지 않은 놈들이라고 여러분 비난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운데도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도 거기 포함될 수 있는 멤버에 속하는 그런 못난 인간인데도 우리 하나님의 긍휼의 품안에서 이렇게 존재하고 이 자리까지 인내하고 세워진 줄로 믿습니다.

  대선 때 어떤 분이 대한민국 국민이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왜 불쌍하냐고 하니까 자기 생각에는 찍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6공화국 때부터 우리가 직선제를 했는데, 문민정부다 국민정부다 해서 지나왔지만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 없습니다. 겨우 30% 정도 턱걸이해서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잘하면 되는데 끝에 가서는 모두 비슷해집니다. 끝에 가니까 모두 멍에를 쓰고 퇴임을 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 국민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특출한 지도자가 지금 우리 눈앞에 안 보이니까 평생을 바쳐 대통령이 된 사람들인데 세워놓고 보니 종말은 우리 기대에 너무 못 미치니까 우리가 함께 불쌍한 모습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들판에 주리는 양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시면서 회계할 줄 모르는 죄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긍휼의 눈물을 쏟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함께 주님의 품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에 속한 모습이 있고 내가 바로 그 모습 속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불쌍히 여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눔의 기적

  오늘 이 사건에서 우리가 볼 것은 나눔의 기적입니다. 오병이어를 나눌 때에 나눔의 실천속에 하나님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께서 어린 아이의 떡을 받으시고 그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고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는 그 나눔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에 놀라운 모형이 여기에 제시됩니다. 이 빈 들판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여기에 굶주린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 가운데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떡을 먼저 받아먹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세상에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share in function'이라는 이것이 교회의 기능 중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받고 나누어야 됩니다. 그것을 안 하면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집 안에서 머물면 안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나누어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속에 이 은혜를 받는 예배당 현장에서 기적이 일어나는게 아니라 이 은혜를 나누는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도움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떡과 고기가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누어질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 손에만 들려있을 때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나누어질 때, 백성들 손에 그 떡과 고기가 나누어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으면 소멸됩니다. 그 은혜대로 살아야 하고 그 은혜를 나눌 때 우리의 은혜가 접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은혜를 나누어야 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갑니다.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수혈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되느냐 하는 거기에, 우선적으로 정치논리,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우리 성도들도 거기에 물들어서 신앙생활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안됩니다. 신앙논리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아무리 경제논리로 풀어도 안됩니다. 정치논리로 풀어도 안됩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결국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떡을 가지고 결국은 제자들이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성립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그 말씀을 주께서는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도 주께서 감당하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가 남은 때를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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