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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밋대의 아들 요나 / 욘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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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일시 : 2003.10.19
† 설교제목 :아밋대의 아들 요나
† 성경본문 :요나 1:1~12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에나 그가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부르시고 하여야 될 일을 맡기십니다.
여기 나오는 아밋대의 아들 요나도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부르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하였습니다(2절).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욥바에서 배를 타고 출항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여호와께서 일으키신 대풍으로 인하여 배가 파선 직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결국 요나는 자기의 과오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물 속에 던지운바 되고 맙니다. 요나가 물 속에 빠져들자 마자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예비해 두었다가 그를 삼키게 하였습니다.
다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 나온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였고 그 결과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본문 1절에 묘사된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보편적인 명칭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이 선지자라는 것과 또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컫는 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의 사건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 또는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와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Ⅰ. 피하려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3절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이면서도 또 한편 하나님을 멀리하고자 하는 이상한 성품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창 17:1).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을 찾아주시고(창 16:13), 또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향하여 비취며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민 6:26).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사는 것이 복인 줄 알지만 선뜻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맙니다. 오히려 요나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멀리하곤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범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3:8에는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다고 숨어진 것도 아니며,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달아났지만 하나님의 눈을 벗어날 곳은 없었습니다.
일찍이 다윗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오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 139:7-10).

(2) 사명을 피하려 합니다.

3절에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앞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2절)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그에게 분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며, 다시스로 도망가고자 욥바로 내려간 것이나 선가를 주고 배에 오른 것은 이를 실천한 행동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1절)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지자 요나에게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사명을 주실 때는 어느 누구도 이를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실은 선지자인 요나가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면서도 피하는데 까지 피해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은 변개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옛날 모세는 애굽으로 내려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양하려고 하였지만 끝내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말았습니다(출 4:10-17).

(3) 자기의 책임을 피하려 합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나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다른 피조물에게 주지 아니한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를 자기가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의 본성은 자기가 일을 저지르고도 그 책임은 회피하거나 다른 데로 떠넘기려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그 죄를 책망 받을 때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창 3:12-13).

요나의 경우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므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려 바다에 대풍이 일어나고 배가 거의 깨어질 지경에 이르러서 선원과 승객들이 죽는다고 아우성인데 자기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이 잠들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5절). 그는 결국 선장에게 들키게 되고 그 앞에서 자기의 죄상을 고백하며 응분의 책임을 지기로 하였으나 처음에 그가 취한 태도는 자기의 책임을 면해 보려고 한 비겁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중생한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한1서 1:8-9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Ⅱ.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여간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주관에 맞지 않거나 기분이 틀어지면 어디든지 달려들고 반항하려는 기질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야성적 기질은 사람에게 있는 동물적 본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창 2:19). 여기 선지자 요나도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적으로 도전하는 경우를 보여 주므로써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 긍정적인 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세상을 정복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창세기 1:28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세계로 뻗어나가며 그의 뜻을 펴나갈 수 있도록 도전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정신으로 어디든지 무슨 일에나 도전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여야 됩니다.
포로시대의 선지자 스가랴는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슥 4:7). 그는 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고 하는 말로 승리의 비결을 나타내었습니다.

본문 말씀 12절에 요나는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묻는 선장에게 선뜻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하고 선언하였습니다. 곧 스스로 물에 빠뜨려지고 죽음을 당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늦게나마 자기의 책임을 깨달은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러한 용기 있는 결단은 결국 자기도 살고 승객들도 살렸고 나아가서 니느웨 백성들까지 살려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 부정적인 도전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지하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거나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편 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21-23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몰라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거역하였더라도 그것은 죄이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됩니다.

바울은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3). 그는 알지 못하고 행한 것도 죄인 줄 알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딤전 1:15).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도 무지한 자에게 깨우쳐 주어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도록 하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3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께 반항하는 일입니다.

우리말에 “달걀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인데도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발하거나 이를 거부하며 반항적인 행위를 한다면 그 결과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참담하게 자기만 망하고 말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하려 한 것은 확실히 하나님께 맞서고자 하는 반항적 도전이었습니다. 요나는 성 밑에 앉아 있다가 자기에게 그늘을 쬐게 하던 박 넝쿨이 말라버리는 것을 보고 성을 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하고 반항하며 대어들었습니다(욘 4:9). 이런 행태는 무지함의 소치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자기 중심의 가치관과 독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타나는 돌출행위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전에는 유대주의 율법에 정통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반항적인 도전을 하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 26:14). 이 말씀은 그가 주의 뜻을 거역하고 예수께 반항하면 할수록 가시채로 뒷발이 찔리듯이 아픈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뜻입니다. 요나가 바다 속에 빠뜨려 지는 것이나 물고기 배속에서 삼일 밤낮으로 죽음의 고생을 한 것도 하나님께 반항한 값을 치른 것이 됩니다.


Ⅲ.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붙들어 쓰셨습니다. 물 속에 뛰어든 요나를 물고기가 삼키게 하고 그를 죽지 않게 지키셨다가 바다 가에 토하여 내게 하였습니다(요 2:10). 요나 3:1-2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도 때때로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몇 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항했던 사람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요긴하게 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기간까지 사람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지만 결국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로잡으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7-29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2)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을 하십니다.

요나의 사건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던 요나가 배를 타고 항해할 때 지중해에 풍랑을 일으켜서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나, 물 속에 빠뜨려지는 시간에 맞춰 큰고기를 준비하여 삼키게 한 것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고기 배속에 들어간 요나가 삼일동안 죽지 않고 거기서 회개하며 기도하다가 다시 살아 나온 것도 이적 중의 이적입니다.

이 사실을 두고 훗날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시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표로 삼았습니다(마 12:40).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께 반항하며 거스리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꼭 쓰시고자 하실 때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부르시고 변화시키시고 역사 하게 하십니다. 여기 대하여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하고 예찬하였습니다(롬 11:33).

(3) 위대한 구속사(救贖史)적 경륜을 보여줍니다.

요나의 사건은 어찌 보면 하나님과 선지자 요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항하는 한 사람을 길들이고 그를 훈련시켜 요긴한 일꾼으로 사용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구속사적인 경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써 오랫동안 이스라엘과는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요나는 북쪽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이며 동시에 민족주의자라 할 만큼 적국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도 자기의 판단에 따라 거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보시고(행 17:26), 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그 어떤 목적도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새생명운동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욘 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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