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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선을 다하라/ 대하 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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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라
역대하 32:21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일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하는 일마다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하는 일마다 잘 되었다."

흑인 인권에 헌신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떤 결과를 얻기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정직한 말과 행동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받았는데 하루는 설교 중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세상에 조금 알려졌다고 해서 저를 성자나 위인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처럼 죄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좋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는 최선을 다했다. 참으로 장하다'라고 말씀해 주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된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도 없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덥지도 차지도 않은 자는 싫어하십니다.(계3:15)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되는 대로 해치우거나 체면 치례로 억지로 일을 하는 사람 치고 뛰어난 인물이 되거나 성공적인 인물이 되었던 경우는 없습니다.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쓴 유명한 책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에 보면 카터가 해군장교로 있을 때 해군제독 하이만 리카비씨가 카터에게 "귀관은 사관학교에서 공부를 몇 등이나 했나?"하고 물을 때 "820명 중 59 등을 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더니 칭찬은 하지 않고 "귀관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고 되묻더랍니다. 그때 그 자극적인 말에 영향을 받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길러 대통령까지 되었고 그 책의 제목도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는 습관 때문에 땅콩밭 일꾼에서 미합중국의 대통령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골3:23) 대개 유명한 음식점들이 발들여 놓을 틈도 없이 붐비는 이유는 음식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에 혼을 다 쏟아야 합니다. 마늘을 깔 때면 속껍질을 벗겨 내는 손길이 마치 마늘을 애무하는 것 같이하고, 방바닥에 엎드려 걸레질할 때면 방바닥과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이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한 분야에서 극단에 닿을 정도로 치열하게 몰두하면 어떤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까놓은 마늘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을 압니다. 걸레질을 봐도 압니다. 그조차 야무지지 못한 사람이 다른 일인들 야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경지에 오르는 것, 결코 거창한 일에 있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 혼을 쏟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마다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그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권력을 잡는 것입니까? 학위를 취득하는 것입니까? 보고 사는 세상이니 보이는 것에 관심이 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소위 물량주위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느냐 하는 것 보다 그 사람의 인격이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인격보다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 가 하는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촛불이 연소되야 빛을 발하고, 소금도 녹아야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람있는 일과 의미있는 사업에 자기의 시간을 바치고 정성을 쏟고 생명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생명을 불태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남긴 글에 "내가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이제는 한 방울도 더 부을 것이 없이 몽땅 쏟아 부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다하고, 전력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나를 다한다는 것은 맡은 일을 위하여 나의 시간을 바치고 정성을 바치고 노력을 바치는 것입니다. 헌신과 성실로 산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인생을 바쳤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공적으로 산 사람은 몸바쳐 일할 것을 찾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보람있고 알차게 영광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최고의 목표를 향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입니다.

젊은 날에 흘리는 땀과 눈물은 참으로 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꿈과 비전이 분명하고 삶의 목적이 분명한 젊은이라면 시련을 뛰어넘고 더 나아가 역경을 뚫고 이겨내고야 맙니다. 어느 분야에서고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한 만큼 시련과 역경을 잘 이겨낸 사람들이지요. 대부분의 샤람들이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기 능력의 15퍼센트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자기 능력을 최대한 개발해낸 사람은 스스로도 놀랄 만한 뛰어난 능력을 드러내며 일을 성취합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감과 도전정신과 열정의 결과입니다. 미국 시인 휘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말 가운데 가장 슬픈 말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는데...'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삶에 후회 따위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드는 모든 기회를 맞아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렇다면 "당신의 삶의 목표와 사명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저는 항상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막8:35), 사명은 "많은 사람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단12:3)
사도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14:8)고 하였고,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하였습니다. 미국에는 '차선은 최선의 최악의 원수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차선의 행운을 기다리지 말고 최선의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같이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살고 있다면 비록 이름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가장 위대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신6:5, 삼상2:30, 마22:37) 우리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됩시다.

어느 부인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창 밖으로 한 남자가 보리밭을 밟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자세히 내려다보니 그는 다름 아닌 병원의 원장이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놀라움은 실로 컸고 비로소 말이 적은 원장이 웅변가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았습니다. 병원의 원장인 그가 정원사나 하는 보리밭을 밟고 있는 성실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지극히 작은 일에 최선을 다했던 그 원장은 바로 목사이자 철학자이며, 의사인 동시에 음악가이기도 한 '슈바이처'였습니다.

한 번은 누군가 슈바이처에게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그는 "나는 말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반대로 구약시대 때 삼손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삼손은 유달리 힘이 센 사사였습니다. 그는 나귀턱뼈 하나로 1000명이나 죽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푸른 칡 일곱 가닥을 꼬아 만든 줄도 쉽게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자르지 않고 기른 긴 머리 때문이었습니다. 머리가 길다고 모두가 힘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고 하나님은 그 머리에 그런 힘을 주셨습니다. 삼손은 20년 동안 사사의 직무를 맡았지만 그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나 자기 민족을 위해서 사용한 일이 없었습니다. 자기 일생을 두고도 이렇다 할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삼손은 그 힘으로 세 여자에게 일생을 허비한다. 첫째 여자는 딤나에서 만난 블레셋 여자였고 두 번째는 가사에 사는 기생이었고 세 번째 여자는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자였습니다. 이들과 즐겼고 그리고 그들에게 배신당합니다. 결국 그가 죽게 되었을 때 모든 잘못을 깨닫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삼손의 머리가 자라나게 하시므로 기운이 돌아왔고 그 기운으로 마지막 죽는 순간에 3000명이나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그는 일생 다하지 못한 일을 죽음으로 갚을 수 있었습니다.

사사직은 하나님이 주신 공직입니다. 공직수행은 공무에 해당합니다. 공무란 사회적 기능으로 책임과 공정과 헌신이 따르는 직입니다.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한다면 공직자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공무를 맡은 사람은 공인이다. 공인은 만인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 일을 잘 하라고 힘도 실어주고 생활비도 줍니다. 공인은 공직에 목숨걸어야 하며 공무를 통해 복이 오고 보람도 가집니다. 사무는 사사로운 일, 자기 개인을 위한 일을 말합니다. 쉬고 싶으면 쉬고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됩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공무와 사무는 삶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공무도 중요하고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개인적 삶도 중요합니다. 이 두 바퀴의 축은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합니다. 공무 때문에 사무가 희생되어서도, 사무 때문에 공무가 피해를 봐서도 안됩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근무 시간 중 사사로운 전화, 사사로운 방문 등으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합니다. 선진국에서는 공적 근무 중 사사로운 전화는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같은 근무시간이지만 근무의 내용은 많은 차이가 있게 됩니다. 삼손은 공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대부분을 사사로운 일로 다 보낸 셈이었습니다. 목회자의 생활은 공적시간과 사적시간을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 고민입니다. 소위 24시간 근무제가 목회인 것 같습니다. 자다가도 교인들의 전화가 걸려오면 그들이 고통 당하고 있는 현장으로 뛰어갑니다. 변명이 필요 없고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공적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명이라 부릅니다. 자기가 맡아 사는 공적사명을 잘 감당하는 곳에 하나님의 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공무를 중심한 삶이었습니다. 즉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데 있어서도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육적인 일에 최선을 다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일에,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결국 둘은 결혼을 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소는 날마다 최선을 다하여 맛있는 풀을 가져다 사자를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사랑하니까 참고 살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하여 날마다 자신이 잡은 짐승의 맛있는 살코기를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사랑하니까 참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둘은 결국 참을성에 한계가 왔습니다. 둘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자꾸 싫은 풀을 주느냐고, 살코기를 주느냐고.... 도저히 둘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소와 사자는 너무 크게 다툰 나머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둘이 헤어지면서 한 말은 “난 최선을 다하였다.”였습니다. 소는 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자는 사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단정을 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둘은 모두 자신만의 무인도에서 산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나의 최선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면 안 됩니다. 이사야 1장 13절은 말씀합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고 성회로 모이는 것을 싫어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인간의 방식을 따른 예배는 받으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없다면 도저히 그분을 위한 예배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아직도 소처럼 사자를 섬기고, 사자처럼 소를 섬기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섬겨도 그 결과는 헤어짐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결과는 미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일은 최선을 다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따르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말고, 그분 뜻대로 살았다고 말하는 자가 됩시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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