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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수의 강이 흐르는 비결 (요 7: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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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이 흐르는 비결 

(요 7:37) <뱃속에 흐르는 생명수> 명절의 가장 소중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a"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a. 또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38:나를 믿는 사람은 마셔라. 성경에. . .)
(요 7: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 "
(요 7:39)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았다.

유대 사람들이 지키는 명절중에 초막절이란 명절이 있습니다. 초막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지내게 하면서 장막생활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명절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 일대에서는 그 옛날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하던 것을 상기하면서 초막을 만들어 놓고 그속에서 7일간을 지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초막속에서 며칠 지내면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초막생활은 임시적인 생활이요 고생하는 생활인데 그 옛날 조상들이 고생하던 것을 생각하며 지금 이렇게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또한 초막에서 며칠동안을 지내면서 이 세상은 말하자면 장막과 같아서 임시적인 것이고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 40년은 고된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에 잊지 못할 경험 중에 하나는 6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목이 말라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며 마실 물을 찾았지만 마실 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이 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했으면 마실 물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이제 우리는 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게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안타까운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게 되었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손에 든 지팡이로 반석을 쳤더니 반석이 갈라지면서 시원한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과 가축이 목마름을 면하고 사경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초막절 행사가 절정인 마지막 날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한 가운데서 크게 소리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들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에 호소했습니다. '목이 마르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절실하고도 지속적인 갈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물의 부족을 경험한 사람들은 언제나 생을 위한 욕망을 물과 밀접하게 연결시켜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밥은 며칠 굶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은 하루동안만 마시지 못해도 큰 고난을 당하고 생명에 위협을 느낍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물의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마는 사막지대에서는 물 값이 석유값보다 훨씬 비쌉니다.  물이 몹시 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해전에 미국 서부 사막 지대에 사는 아메리칸 인디안이 뉴욕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뉴욕시에서는 원주민 인디안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며칠동안 뉴욕시 당국의 안내를 받으며 세계적인 관광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난후 그를 안내한 시 직원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뉴욕에 오셔서 며칠동안 지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이 원주민 인디안이 수도꼭지 옆으로 가서 수도를 틀면서 하는 말이 "제가 세계적인 도시 뉴욕에 와서 며칠을 지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언제나 마시고 싶으면 얻을 수 있는 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우뚝 서있는 고층 빌딩이 아니고,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가 아니고, 호화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니고, 평생 먹어보지 못하다가 처음 맛본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언제나 원하면 구할 수 있는 물이 풍족하다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목마름을 뼈저리게 당하는 사람만이 절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유대땅은 일년에 두세 차례 비가 오는 그들의 표현대로 하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는 그리고 거의 비가 오지 않는 메마른 땅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리고 야곱이 우물을 찾기 위해서 가축을 이끌고 여기 저기 헤매며 다녀야만 했습니다. 우물 때문에 그때 사람들은 얼마나 다퉜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물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생각에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인 목마름의 욕구를 사용하여 모든 사람에게 절실한 영적인 욕구인 생명의 갈증을 말슴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너희가 생명수를 마시며 인생의 기쁨을 맛보았느냐?"  "너희가 영생의 문제, 죄의 문제의 갈증을 풀지 못해 고통스럽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게로 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63편 1절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접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니다"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물 없이 마른땅에서 물을 찾아 헤메는 사람처럼 그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답답하여 얼마나 절박하게 부르짖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북 아프리카의 엘 알라맹 (El Alamein)이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엘 알라맹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의 병력과 독일군의 병력은 서로가 최선을 다하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 진영이 모두 다 사막에서의 전투를 수행하는 중에 식수가 고갈 되어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전통적인 자신들의 방식대로 물을 발견하고서는 진지까지 파이프를 연결하고 그 안에다 바닷물을 채워 넣었습니다. 파이프의 이상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아까운 식수를 허비하기보다는 이렇게 하여 바닷물로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정찰을 나섰던 독일 병사들에 의해 이 파이프 라인이 발견되어졌고, 이 사실은 즉시 독일 진영에 알려져 전 병력이 달콤한 물을 기대하며 곡팽이로 파이프 중간을 끊어 내었습니다.  펑펑 쏟아지는 물을 본 순간 앞뒤 가릴 것 없이 장. 사병 모두 물을 들이켰습니다.  얼마나 급하고 정신이 없었던지 이들은 얼마 안 있어서 통증이 오기까지는 그것이 소금물인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갈증보다 더 심한 고통에 못이겨 마침내 항복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엘 알라맹에 있던 영국 군대는 적의 중대 병력 전원이 고통스런 숨을 내쉬며 손을 머리 위로 똑바로 들고서 어정어정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투항한 독일군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영국군이 가진 물을 얻어 활활 타오르는 목구멍 속으로 들이키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물이나 들이키다간 영육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가 됩니다.

  영혼의 갈함을 해갈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종래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영혼의 해갈을 얻은 심령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 적인 것의 번영은 오히려 고통만 더영혼의  할 뿐입니다. 우리 심령의 해갈은 세상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옛시인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만 하면 이 행복, 이 만족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주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그 샘은 생수의 강이 되어 흐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자신의 깊은 영적인 갈증이 해소되고 참 만족을 얻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생수의 강이 솟아나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그를 통해서 그 주변에 잇는 사람들까지 생수를 맛보게 됩니다. 갈증이 해소되고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나온 심령은 말하자면 물대인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자랍니다.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복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령에 모실 때 기쁨과 만족, 평화와 영원한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 부터 생수의 강물이 흐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초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오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더러운 죄를 범했어도 주님은 상관하지 아니하십니다. 목이 마른 사람은 누구나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초청에는 어떤 종류의 기갈이라도 상관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에 목이 마르십니까? 기쁨에 목이 마르십니까? 평화에 목이 마르십니까? 무엇에든지 목이 마르시면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혹 우리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글세, 나는 부족한 것이 없는데, 나는 목이 마르지 않은데" 여러분,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각합니다. 목이 마르면서도 목마른 것을 느끼지 못하면 큰 일입니다. 목이 마른 것을 느껴야 물을 찾습니다.  몸이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며칠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신 링겔을 통해 영양이 공급되니 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배 고픔을 느끼지 않으니까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배고픔을 느껴야 건강한 것입니다.  갈증을 자주 느껴야 물을 들이키고 건강하게 되어 좋은 것이지 하루 물을 두 세잔 만 마시며 살아도 갈증을 못느끼면 좋은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안 여인은 목이 말라서 대낮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남자를 다섯이나 바꿀 정도로 육신의 향락을 추구하는 성적인 여자였습니다. 돈 많은 남자도, 권력 있는 남자도, 학식 많은 남자도, 잘생긴 남자도, 재간 많은 남자도 그녀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꿔 버렸습니다.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고 남의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에게 받은 반지, 저 남자에게서 받은 목거리, 또 다른 남자에게서 받은 팔지, 귀거리 낄 수 있는 것은 다 끼고 걸 수 있는 것은 다 걸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이 계속 목이 말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처음에 믿지 못하고 비아냥거리던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가 눈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말씀하는 것이 달라 선지자인줄 알았던 사람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배에서 생수가 솟는 감격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수가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리치며 기뻐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는 목마른 영혼이 해갈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키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는 인종의 차별이 없습니다. 유무식의 상관이 없습니다. 빈부를 가리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셨을 때 두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는 삭개오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바디메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신분상으로나 환경과 조건이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실 때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부자와 거지로 보신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가련한 인간들을 보셨습니다. 속 사람을 보셨습니다. 저들이 목이 말라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들에게 해갈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목이 마르십니까? "내게로 와서 마시라."
주님께 와서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돈없이, 값없이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내가 목이 마릅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고백하면서 주님께 나아오면 주님은 우리를 절대로 내어 쫓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의 강에 대해 성경은 말슴하기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슴하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한 수도원에서 내려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한 노인 수도사가 젊은 사업가에게 말했습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서는 죽듯이 자네도 세상에 뒤엉키면 파멸케 되네. 고기는 물로 돌아가야 하고 자네는 성령께로 돌아가야 해."  그러자 그 사업가는 아연실색하며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내가 사업을 그만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란 말이오? 내가 사업을 통해 성취한 것을 포기해야 한단 말이오?"  그 노인은 다시 말했습니다.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네. 내가 한 말의 뜻은 사업은 그대로 붙들고 있고 당신 마음이 성령께로 돌어가야 한단 말이지."
우리의 마음이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으면 세상의 사람이고 세상사가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늘나라 일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은 성령님의 활동, 살아있는 능력, 풍성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지만, 문제는 다수의 사람들이 성령님 안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겠습니다. 나도 예수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전과  별 다른 것 없이 살아갑니다.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헌금도 합니다. 그러면서 바깥에서는 가끔 술도 한잔씩 합니다. 필요하면 적당히 거짓말도 합니다. 그런 생활에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지만,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고 아무런 감동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이 있습니다. 물이 말라 버린 우물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고 성경도 보는데, 그 사람의 삶에서 감동과 충만과 열정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 바로 생수의 강물이 흐르지 않는 말라버린 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빛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고 병들어도 위축되지 않으며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는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생수의 강물이 가득차서 흐르는 살아있는 강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사람은 약간 미친 사람과 같습니다. 돈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도 기쁘고 즐겁기만 합니다. 욕을 얻어먹어도 기분이 나빠지지 않고 그 기븜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런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충만하고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초대장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른 것처럼,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샘물을 경험한 것처럼, 생수의 강의 흘러 넘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 광야와 같습니다. 세상은 마치 사막과 같습니다. 인간의 실존이란 사막에서 장막을 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인생에서 생수가 터져 흘러 넘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생수가 있는 곳에 나무를 심으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생수가 있는 곳에는 물고기마저 잘 살 수 있는 있습니다.

여러분, 바닥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충만한 사람입니다. 생수가 흘러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서로를 위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간절히 기도합시다.  갈증이 있는 우리 지체들에게 성령의 강물이 가득 흘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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