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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 호랑이를 이기는 길 (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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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호랑이를 이기는 길
야고보서 1장 15절

< 죄의 호랑이를 키우지 마십시오 >

지난 10월 4일에 미국 라스베가스 미라즈(Mirage) 호텔에서 있었던 지그프리드와 로이 쇼(the Siegfried & Roy show)에서 7살 된 벵갈 산 호랑이가 쇼 진행자인 로이를 공격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날 호랑이가 앉으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니까 로이가 마이크로 호랑이의 코를 쳤습니다. 그러자 호랑이가 대들어서 1500명의 청중 앞에서 로이의 목의 숨통을 물고 그를 스테이지 밖으로 장난감 인형처럼 끌고 간 것입니다. 로이는 30년 이상 호랑이 쇼를 하면서 누구보다 호랑이를 잘 알고 있고, 잘 길들였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사고가 벌어진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도 종종 발견됩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에는 애완동물이 될 수 있어도 점차 크게 되면 호랑이의 야성이 살아나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키우던 케리 퀴니(Kerry Quinney)라는 사람이 호랑이 옆에 3살 짜리 손자를 놓고 사진을 찍다가 호랑이가 손자를 물어뜯어서 죽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서는 애완동물처럼 있다가 커서는 사람을 공격하는 호랑이의 모습은 꼭 죄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작은 죄를 가볍게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무섭게 보이지 않고 갖고 놀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처음에는 무서운 것 같지 않고 길들이고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도 나중에 그 죄가 커지면 언젠가 그 야성과 폭력성이 나타나서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 죄의 호랑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길 >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죄의 호랑이를 키우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고 경고합니다. 그처럼 지금도 사단은 우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죄의 호랑이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죄를 경시하지 마십시오.

죄는 결코 경시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죄의 호랑이가 있다고 느껴지면 하루라도 빨리 내쫓아야 합니다. 괜히 그 호랑이를 길들일 수 있는 줄 알고 그냥 가만히 놔두면 처음에는 그것이 즐거움을 주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큰 위험과 수치와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 처음에는 즐거운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도 하니까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이 나를 삼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가끔 "컴퓨터 채팅을 어떻게 하나?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채팅을 하면 이상한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아예 모르고 지내는 것입니다. 컴퓨터 채팅도 그렇고, 마약과 술과 모든 죄가 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즐거움을 주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그것들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삼키게 됩니다.

분노를 품으면 처음에는 별일이 없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한과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영혼과 삶을 망치게 될 것입니다. 삐친 모습도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나중에는 삐치는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하다가 큰 불행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권리 남용과 지배욕으로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의 때문에 혹은 남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한 백색 거짓말 하나가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아도 나중에는 계속 거짓말을 만들어내다가 마침내는 탈출구가 없게 만들고, 결국 그 거짓말이 발각되어 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가 적게 보여도 그 죄를 품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가지고 놀 장난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해가 없는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축복의 가능성과 축복의 진을 다 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깨어 근신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때로는 죄를 지적하는 책망의 말씀을 잘 듣는 것도 축복입니다. 저는 책망하는 설교를 잘 하지 않는 편입니다. 세상에서는 조금만 잘못하면 즉시 책망을 받는데, 교회에 와서까지 책망을 받게 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책망하는 말씀은 대개 효과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말씀이 교인들의 마음에 부딪쳐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허무하게 반사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말씀이 부딪쳐 자존심의 벽을 뚫고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나지만 자존심의 벽에 퉁겨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상처가 커집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마음이 아파서 "앞으로는 책망하는 설교를 최대한 줄이겠다!"고 다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책망의 말씀도 잘 받겠다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성령 충만이고, 성령 충만하면 옥토밭 심령이 되어서 말씀을 잘 받게 됩니다. 그렇게 말씀을 잘 받으면서 내 안에 있는 죄악된 모습을 청산해야 우리 영혼이 살고, 가정이 살고, 인간관계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김유신은 자기 애마가 항상 하던 대로 천관녀의 집으로 향할 때 그 애마의 목을 잘라서 여자를 탐하던 생활을 청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애마의 목을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교만의 목을 치고, 이기심의 목을 치고 죄성의 목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죄라고 경시하지 말고 그 작은 죄의 목을 과감히 잘라야 우리는 장래의 큰 수치와 불행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죄가 무서운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죄보다 큽니다. 그러므로 죄는 경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죄를 무서워하고 죄에 짓눌려 살 필요는 없습니다. 죄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붙잡아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을 지나치게 오래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큰 죄와 수치도 주님의 보혈은 다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운 것도 사랑하면 아름답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70번의 7번이나 밉게 행동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아름답게 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저주에 지나치게 공포를 가지지 말고, 항상 우리의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미쳐 있는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저의 둘째 딸 한나가 횡단 보도를 건너다가 넘어져서 이마에 큰 혹을 달고 왔습니다. 밤에 그 얘기를 듣고 제 입에서 즉각 나온 말이 "하나님! 목숨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은 사고로 더 큰 사고를 막아주시고, 더 큰 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가끔 우리 성도들이 무슨 일을 당했다고 하면 항상 나오는 말이 "하나님! 그래도 생명을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누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래도 영혼과 믿음은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고, 건강이 있고, 믿음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언제든지 재기의 기회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 은혜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마음에 평강과 위로를 줍니다. 죄의 능력은 크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큽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활기차게 내일을 설계하며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단이 가장 잘 기생하는 3대 요충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과 두려움과 상처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교묘하게 사단이 침투하는 통로가 바로 상처입니다. 사단은 지나간 상처를 자꾸 긁어냅니다.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상처를 자꾸 긁어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 사람들마다 유난히 "상처받았다"는 말, 영어로는 "허트(hurt)받았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런 과거의 상처에 대한 집착은 영혼에 주름살이 지게 하고, 그 주름살 틈새는 사단이 기생하는 효과적인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항상 가장 많이 기도하는 제목이 "하나님! 우리 아이들 구김살이 없는 아이가 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서도 수시로 "하나님! 우리 성도들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 영혼에 주름이나 구김살이 없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처럼 우리가 수많은 어려움을 당해도 그 어려움이 우리 영혼을 찌들게 하지 않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구김살이 없는 성도가 된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나이가 들면 육적인 주름살은 늘지만 영적인 구김살은 더욱 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진실로 크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여러분! 죄의 능력이 커도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능력이 더욱 크다는 생각을 가지고 얼굴을 펴고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인도 원주민은 선교사님에게 "얼굴을 빛나게 하는 약을 나눠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소중한 영혼의 보약이 되어 선교사님의 얼굴을 빛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어떤 보약보다 소중한 영적 보약이고, 어떤 화장품보다 소중한 영적 화장품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화장을 할 때 우리의 얼굴도 빛나고 우리의 삶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경시해서도 안되지만 죄를 지나치게 크게 보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은 우리의 죄를 이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욕심을 버리십시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구절은 죄를 잉태하고 낳은 죄의 어머니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욕심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욕심을 버리면 죄의 유혹과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기복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기대는 안중에도 없고 복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복주의는 기독교의 가장 큰 대적입니다. 그런 기복주의가 왜 생깁니까? 바로 욕심 때문에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욕심을 가지고 복을 구하는 사람보다 순수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려는 사람에게 더욱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운명론, 미신, 점을 믿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며칠 전, 6만 명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어떤 성명학자는 박찬호의 슬럼프의 원인이 이름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이름을 박찬빈, 혹은 박찬서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름을 바꾸면 복이 저절로 굴러 떨어집니까?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름 값을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작명가는 이름 바꾸고 쫄딱 망했다는 사람이 항의할 때마다 "이름도 중요하지만 이름 값을 하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핀잔을 준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통째로 먹으려고 하는 욕심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물질욕을 버려야 합니다. 그 말은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은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열심히 벌면서도 잘 쓸 줄 아는 큰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부자들이 존경을 못 받는 편이지만 미국은 대체적으로 부자들이 존경받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버는 과정이 비교적 투명한 편이고, 돈을 번 후에는 뜻 있게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기보다는 선교단체나 자선단체에 헌납하는 부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되도록 하나의 작은 빛이 되십시오. 그래서 열심히 벌고 좋은 일에서 과감히 손을 펼 줄 아는 큰손들이 되십시오. 믿는 사람은 쫀쫀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 고액과외 시키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선교와 구제에는 손을 벌벌 떠는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손을 펴서 어려운 형제와 선교사님들에게 보내면 반드시 하나님은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우리를 축복된 자리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저는 교회 개척을 하면서 어렵고 힘든 때도 많았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지 못해 아슬아슬한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 목회자들 중에서는 굶는 분들도 많다고 하는데 저는 돈이 없어서 굶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저도 위기의 순간이 가끔 있었지만, 그 순간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손길이 신기하게 주어져서 굶을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지나온 삶은 그런 은혜의 삶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서 굶을 기회를 가진 사람에게 그 기회를 놓치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받는 삶보다 주는 삶을 많이 하고, 쥐기보다는 펼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힘들어도 선교와 구제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번에 교회 이전을 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중에서도 "항상 도울 명목을 찾아 돕기에 힘쓰자!"는 선교정신을 가지고 변함없이 선교와 구제에 과분할 정도로 많은 지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은 너무나 순적히(창 24:12) 교회이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믿음이 가져다주는 역설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손을 펴는 교회를 축복하시고, 손을 펴는 가정을 축복하시고, 손을 펴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나만 손을 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손을 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줄 것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손을 펴면, 그렇게 손을 펴는 중에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 잡은 손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열심히 일하고 일해서 얻은 열매를 가지고 섬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 자신으로만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의 소중한 것들이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도 우리 안에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섬김의 삶을 다짐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욕심이 아닌 섬김의 삶을 사십시오 >

유럽에 '램버린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진 메리안 프레민저(Marian Preminger)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1913년 헝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그녀는 귀족 집안의 딸로서 성과 같은 집에 살면서 수많은 하녀와 하인, 그리고 개인운전사와 가정교사가 있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녀의 할머니는 여행을 갈 때에는 꼭 침구를 싸갔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이 사용한 시트를 사용하는 것은 귀족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세 되던 해에 메리안은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유학 가서 잘생긴 비엔나 출신의 의사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일년밖에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그 의사와 헤어진 후 그녀는 비엔나로 돌아와 배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젊고 잘생긴 독일인 감독 오토 프레민저(Otto Preminger)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부부는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계에 몸을 담았고, 메리안은 헐리우드는 화려함과 환락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참다 못해서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 후에 메리안은 파리 사교계에서 활동하려고 유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유럽 사교계의 여왕처럼 고고하게 지내다가, 1948년에 신문을 통해서 어린 소녀시절부터 흠모하던 슈바이처 박사가 유럽을 잠시 방문하고 군스바하(Gunsbach)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하고 그 다음날 슈바이처 박사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녀가 군스바하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마을 교회에서 오르간을 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슈바이처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를 위해서 악보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녁 무렵쯤 되어서 슈바이처 박사와 대화하던 중에 그녀의 마음속으로 하나의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빛은 그녀에게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볼 수 있게 한 빛이었습니다.

그 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그녀를 램버린(Lambarene)의 병원으로 초청했습니다. 메리안은 그 초청에 응해서 램버린으로 달려갔고, 램버린에서 메리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성에서 태어나 공주처럼 자라났고, 사교계의 여왕처럼 살았던 과거의 삶을 버리고 그녀는 완전히 흑인들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매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아기들의 목욕을 시켜주었고, 문둥병자들에게 식사를 먹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원했던 것은 모든 것이었다(All I Ever Wanted Was Everything)"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말은 앨버트 슈바이처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돕는 사람과 또 하나는 돕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좋아하는 말대로 메리안은 돕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여, 그 뒤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배욕을 버리고 섬김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과감히 헌신의 손길을 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죄의 호랑이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문제들이 바로 지배욕에서 나옵니다. 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부부관계에 갈등이 생길 때 큰소리치는 것, 삐쳐서 말을 안하는 것 등이 다 내 뜻과 내 생각을 고집하고 "너 포기하라!"는 지배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삐쳐서 말을 안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불편할 테니까 그렇게 보복하겠다는 유치한 생각이 행복을 망칩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려면 자신을 송곳처럼 뾰족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 송곳은 항상 자기 자신부터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려면 지배욕을 포기하고 잘 항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 '항복하는 삶'에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간첩의 자수를 촉구하는 이런 표어들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제까지 속은 인생! 오늘부터 밝은 인생!" "자수하여 광명 찾자!"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이제까지 우리를 속였던 모든 죄와 욕심의 굴레를 벗어나 하나님 앞에 나의 부족한 죄와 허물을 온전히 내놓고 자수하여 광명을 찾는 복된 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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