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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 눅 16:19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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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눅16 : 19 - 31절 2003.11.2(일)2.3부 <1>
제 목 :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우리 성도들에게 너무나 익히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왜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되었습니까?
단순히 돈이 많은게 죄입니까? 자색 비단 옷을 입은 것이 죄입니까?
불쌍한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던게 죄입니까?
반면에 나사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채 가난하고 병들어 남에게 걱정만 끼치고, 부잣집 대문간을 어지럽히며 삶을 근근히 지탱만 해 왔는데도
그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나사로는 단순히 불쌍하게 살았단 이유만으로 천국에 갔습니까?
오늘 홍포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14절에 보면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 는 말을 보아서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인생
물질만능, 배금사상을 가진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요 교훈입니다.
맘모니즘 -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우상의 표상입니다.
배금사상은 현실 밖에 모릅니다. 여기에는 내세가 없습니다.
그러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한번은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종일 장난을 치며 놀다가
저녁이 되어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 하루살이야 이제 저녁이 되었으니 자고 내일 만나서 놀자 ] 라고하니 하루살이가 하는 말이 [ 내일이 뭔데? ]
[ 내일이란 것은 어두움이 지나면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내일이야 ] 하니
하루살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우리 인생 하루살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현세의 삶이 다 인줄 알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현세에서 끝나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유일하게 내세의 삶에 대해 보여 주는 곳은
눅16: 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비유로서 말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의 사후세계 내세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언급하고 있지 않느냐?
내세의 삶은 우리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몰라서 그렇지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미신이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돈 밖에 모르는 인생에 대한 경고와
우리 인생에는 영원한 삶이 있고 구원받은 천국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본문말씀을 살펴보면 부자와 거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부자는 자색 옷 즉 비단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자색 옷은 당시 왕과 귀족이 입는 비싼 옷으로
권세와 특권 나타내는 옷입니다.
베옷은 값진 옷, 부귀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연락이란 사람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 마음껏 누리 것을 말함
날마다 치신 유행의 옷을 입고 최고급 인테리어 홀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라 하는 거지는
헌데를 앓으며 부자집 대문 앞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는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고 합니다.
세상에 불행해도 이 보다 더 불행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의 대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보는 행복과 불행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는 외관상 다른 점이고
자세히 보면 영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홍포입은 부자는 그 도시에서는 유명인사일지도 모릅니다.
정치자금을 많이 기부해서 거물인사 인지도 모릅니다.
현실적으로는 이런 사람 같으면 그 앞에 수식어가 몇십개나 붙은
명함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성경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명의 인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서는 별 볼일 없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들이 외면하는 거지이지만 <3> 이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나사로란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유래된 말로서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은혜란 말입니다.
자색 비단 옷 입은 부자는 잘 먹고 잘 살았지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은 거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왜 부자가 이름이 없겠섰습니까? 마는
천국의 생명록 책에는 그 이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비록 거지생활을 했지마는 나사로는
하늘나라 생명록 책에 이름이 있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름 있는 삶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있는 삶입니다.
미국에 세일즈맨으로 가장 크게 성공한
'오그 만디노' (Og Mandino)란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이 분의 저서 <성공의 십계명>에서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아래의 글을 벽에 써 붙이고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한 번씩 큰 소리로 읽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 내 자신이 보잘 것 없이 느껴지면 내 평생의 하나님의 목적을 기억하자 ]
하나님의 목적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에 눈이 뜨여지면 결코 이 세상의 삶이 다가 아니고
영원한 삶에 의미를 갖게 되고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수업시간에 한 교사가 질문했습니다.
"사탕이 다섯 개 있었는데 세 개를 먹어버렸단다. 그럼 사탕이 몇 개가 남지?"
아이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교사는 제일 자신 있게 손을 든 아이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명구가 대답해봐라. 몇 개가 남았지?"
"세 개입니다."
"아니 왜? 세 개를 먹었는데."
"그러니깐 세 개지요. 우리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라고 했거든요."
그러니 교사가 하는 말이 [ 너네 집은 다 밥통이구만 ] 하더랍니다.
이 부자 먹는 것이 남는 것인 줄 알았던 밥통 부자였던 것입니다.
혹 오늘 우리도 먹는 게 남는 것이라고 여기며
세상 낙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밥통, 먹통이 없습니까?
그런데 하늘나라 생명록 책에 이름이 있던 없던 <4>
사람에게는 공통점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22절에 보니 [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 는 것입니다.
이 땅에 천년만년 살 것 같이
고대 왕실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억만 장자가 되어 산다고 해서
이 땅의 삶이 영원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아방궁을 짓고 천녀만년 살기 위해
선남선녀 500명을 동원하여 동방의 불로초를 구하라고 했지마는
그는 정작 49살까지 살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때가 되면
다 장사되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원한 나라로 옮겨집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히9:27절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가는 영원한 나라는 두 군데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 자들이 가는
오늘 본문말씀의 아브라함의 품 즉 천국이 있는가 하면
오늘 부자가 간 음부 즉 지옥이 있습니다.

그럼 부자가 간 지옥이란 어떤 곳입니까?
막9:48절 [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낳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지옥을 불못이라고 합니다.
오늘 부자가 간 음부는
불꽃 가운데 끊임없는 고통이 있고 그 고통보다도 더한 고통은
혀끝에 물 한 방울의 위로도 없는 절망의 고통이라는 사실입니다.
23절에 보니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보니
대문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고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
그러나 지옥은 물 한 방울의 위로도 없는 절대 절망의 곳입니다

삼상30장에 보면 다윗이 전쟁 후 마을로 돌아와 보니
아말렉이 침공하여 마을을 불사르고 아내와 자녀들을 다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때 다윗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든지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내어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곧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더라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5>
아무리 울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는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말 한마디, 물 한방울의 위로도 없는 곳
즉 절대 절망의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부자가 고통받는 지옥에 오게 되었습니까?
고통 중에 있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25절 [ 애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아브라함을 보고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 라고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시14:1절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느니라 고 합니다.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있는 줄 알면서도
하나님 없는 것 같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부자가 되고 잘 먹고 잘 살은 것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 같으면
어찌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주제가 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으로 우리가 평가되느냐는 것입니다.
출세하고 부자 되어 잘 살고 잘 입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자가 어떻게 돈을 벌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부정축재를 했는지 못할 짓을 했는지
율법을 지켰는지 지키지 아니하였는지 성경(聖經)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이 마음이 없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은 것을 보니
너는 예수 예 자도 모르는 교인이구나 이런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오직 긍휼,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 긍휼을 베푸는 삶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남들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몸이 성하다고 해서 다 불행한 삶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교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기준이 정 반대 일 수 있습니다.

일본에도 송명희 같은 신앙의 인물이 있습니다.
'미즈노 겐죠' 라는 사람입니다.
미즈노는 1946년 여름,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에 걸린 것이 심하여져서 심한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뇌성마비로 눈, 귀, 깨닫는 것, 내장 외에는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살던 미즈노는
어느 목사를 만나서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마음에 희망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미즈노가 성경을 읽으려면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미즈노를 기대어 앉게 한 다음에 성경을 펼쳐주었습니다.
한 면을 다 읽고 나면 다음 면을 펼쳐주었습니다.
어머니가 책을 넘겨주지 않을 때는 한 면을 수십 번씩 읽기도 했습니다.
미즈노는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벽에 붙여놓은 [가나]를 어머니가 차례로 하나씩 짚어 갈 때
눈짓으로 표시하여 글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시를 써서 한 편씩 모은 것이 여러 권의 시집으로 탄생하였습니다. 그의 시집에는 다음의 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괴롭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
모든 형제 자매들도 괴롭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으리라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없었으리라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연락하는 삶이 내세에서는 절대 절망이 될 수 있고
이 땅에서 당한 고통이 단순한 고통으로 끝나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그 고통이 천국에서 큰 위로가 된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부자는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7>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회개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철이 들겠지마는 그 때는 때 늦은 후회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지나간 다음에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미래는 더더욱 없고
꼭 지나간 다음에야 '그랬으면 좋았을 걸, ' 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지나간 다음에야 생각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이 후회라고 하는 말을 생각하면 뮤지컬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고 하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이 '록 뮤지컬'의 음악을 담은 2장의 더블 앨범은
이미 미국에서만 150만 장 이상이 팔렸고
공연 개막 전에 열린 두 번의 콘서트에서는
약 35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입니다.
그 중 가룟 유다에 대한 대목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고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유다가 죽었다가 혼령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혼령이 슬피 울면서 울부짖습니다. 울부짖는 제목이 무엇인가 하면,
"Why didn't you tell me?
왜 당신은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다고
왜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제가 알았다면 제가 왜 예수를 팔았겠습니까?"
가롯 유다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슬피 웁니다.

오늘 부자의 간청은 때늦은 후회에서 나오는 울부짖음입니다.
나는 몰라서 때늦은 후회 속에 고통 당하지만
[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
어찌 부자의 때늦은 후회의 절규로만 듣기는 말씀이겠습니까?

저는 가끔 추도식 예배 때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신 불신간에 우리와 사후 세계와는 교통할 수 없는 세계라
육성으로는 들을 수 없겠지마는
먼저 간 우리의 부모 형제가 있다면
하나같이 제발 우리 형제 다섯이 있는데 <8>
이 사실을 알려 주어 나같이 지옥 물건 되지 말고
이 땅에서 예수 잘 믿다가 후회 없는 만남되게 해 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부자의 간청에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29-30절에
[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아니하리라 ]
모세와 선지자는 바로 성경을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와서 말해도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생전 하나님 말씀을 믿어야지
하나님 말씀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 만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기독교에 불만이 많았고 비판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아들을 무척 사랑하였기 때문에 반대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교회 행사에 참석했다가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은 슬퍼하면서 한편으로는 큰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남자가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릴 것이 불 보듯 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상대로 다음 주일 예배시간에 그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람들은 긴장했지만 다행히 예배를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는 그 남자의 아들이 천국에 간 것을 광고하고 가족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여러 성도들이 염려하는 중에
예배를 마치자 이 남자가 목사에게 다가섰습니다.
몇몇 성도들이 마음으로 만약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부터 교회에 다니려고 합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목사는 예상 밖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 반가워했습니다.
"물론이지요. 환영합니다."
남자가 말을 이었습니다.
"아들의 일기장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일기장에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 고 한 글을 보고 또 아들이 제가 교회에 다니도록 기도를 많이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아들이 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9>
천국 갈 사람은 아들의 일기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고
눈이 뜨여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을 말씀드립니다.

3210 아낭케 전도대회 D-day 일주일 전입니다.
믿던 안 믿던 사후세계에서 들려 오는 하늘의 음성이 있습니다.
[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제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
어떻습니까?
우리가 죽은 후에는 이 말도 들려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았을 때 내 형제 자매 친지들에게
이 말씀을 꼭 들려줄 수 있는 교우들이 꼭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도 홍포입은 부자나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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