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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소년문제 / 전 1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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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제
전11: 9- 10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영국 대영 박물관에는 강철같이 단단한 돌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는 작은 새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필경 그 단단한 돌은 작은 새가 디뎌도 발자국이 찍힐 정도로 물렁물렁했다는 증거인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강철같이 단단해져 코끼리가 밟아도 깨어지기는커녕 발자국도 나지 않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굳어지기 전의 돌과 같은 시기입니다. 누가 어떤 자국을 남기든지 그 자국은 오래 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발자국을 미리 남겨놓지 않는다면 마귀가 거짓과 증오 또는 죽음의 발자국을 남겨놓을지 모를 일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의 문제가 가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 및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폭력문제는 중고등학교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까지 감염돼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청소년들의 성적인 문란은 일반적 상식을 뛰어넘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의 마음이 빈집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빈집에 우환이 닥친 것입니다. 주인이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살던 귀신이 그 집을 보고 가서 일곱 귀신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와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도 나빠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마음속에 주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그 마음속에 의지하고 살만한 신앙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곱 귀신이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마음속에 정의와 진리와 의리가 없습니다. 힘센 자가 이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폭력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최고라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마음에 주인이 없기 때문에 빈집에 온갖 일곱 귀신이 들어온 것입니다.
청소년문제를 해결하려면 신속히 청소년들을 전도해서 예수님이 마음의 주인으로 들어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을 점령하지 않으면 청소년과 장년 할 것 없이 그 마음속에 귀신들이 가득 차서 온갖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으셨습니다. 성전에 성령이 와 계시고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모시며 살도록 창조됐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마음속에 귀신이 가득하니까 그들이 귀신의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주님이 와계시면 그들의 생활과 행동에 주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오늘 우리는 도덕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친구를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도덕적인 불감증에 걸린 것입니다. 밤에는 접대부로 일하고 낮에는 학교에 가는 청소년들도 많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웬 참견이냐"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이끌어갈 도덕률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도덕률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 도덕률은 성경이 가르치는 십계명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우리 행동의 잘못을 지적해줍니다. 이런 규범이 없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119:9-10)하였습니다.
셋째로 오늘의 청소년문제는 살인적인 유혹의 환경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오늘날 오염된 사회환경은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성장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제일주의 배금주의 쾌락주의가 청소년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9-12)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시절부터 돈을 사랑하는 풍토가 되어버렸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폭행도 하고 협박과 공갈도 합니다. 음란과 퇴폐행위도 합니다. 무속을 조장하는 귀신프로가 범람하고 공포스런 장면이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학생들 사이에는 점을 보는 것이 유행합니다. 이런 풍토에서 어떻게 청소년들이 버틸 수 있겠습니까?
넷째로 부모의 무관심과 사랑 결핍이 문제입니다. 어린이들의 심성이 성장하고 변화받는 곳은 바로 가정입니다. 청소년들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이냐고 물으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부모와 함께 얼굴을 마주보며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인격대 인격으로 대화해야 합니다.
다섯째로는 학교교육이 인성교육과 도덕교육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고 했습니다. 현행 교육제도에서는 모두가 적이 되는 것입니다. 일류병과 학력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청소년들은 결코 타락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교육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찬 청소년들이 많아지도록 우리 다함께 기도합시다.
얼마 전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 중 교통사고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회 중등부 학생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신호를 무시한 좌석 버스가 학생을 덮쳤다는 것입니다. 이 학생 역시 뇌를 많이 다쳤는데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중태라는 것입니다. 며칠 사이에 이런 끔찍한 일을 계속 당하고 보니 모두들 할 말을 잃었습니다. 중등부 담당 교역자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학부모와 교사들이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일어나나"하며 힘들어했다. 나도 그 소식을 전해듣고 아픈 마음으로 기도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교통사고로 육신을 다치고 피 흘리는 모습을 봄으로 그 심각성을 깨닫고 기도하게 됐지만 지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적으로 다치고 피 흘리는 청소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 운전자는 만취 상태에서 실수로 아이들을 덮쳤지만 만약에 영적으로 악한 세력이 의도적으로 우리 청소년들을 덮치려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끔찍한 가상은 불행하게도 이제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지금 영적으로 극심한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 자녀들만큼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악한 영의 공격 앞에 노출된 세대가 없었습니다. 이런 무차별적인 영적 공격을 받아 무기력하게 영적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님을 현장을 지켜보는 사역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녀교육은 분명 위기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들의 권위가 사라져 버렸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이들을 떠받치는 또 다른 한 축인 학교가 무너져 버렸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지도 오래됐습니다. 교회는 어떠합니까. 주일학교에 아이들 이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의 목소리가 확산돼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잃어버린 소위 문제아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흐르고 있는데도 당장 시급한 일이 아닌 양 아무런 대책 없이 방치해두는 어른들의 직무유기가 심각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제 모든 가정과 교회가 다음 세대 아이들을 품고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들을 방치해둔 우리들의 범죄행위를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렇게 진단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이대로 몇 년만 더 내버려두면 이 땅의 수많은 가정과 교회는 손쓸 수 없는 심각한 영적 공황에 빠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비상을 선포해야 할 때입니다. 진짜 위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정치비리 같은 현안들이 아닙니다. 진짜 위기는 물밑에서 장차 이 나라를 책임질 다음 세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영적 공격 앞에 무기력하게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가장과 교회가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할 때입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자녀들을 놓고 목숨을 건 눈물의 중보 기도를 할 때만이 위기를 만난 자녀 교육에 청신호가 울려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요즘 세상은 온통 젊은이들의 함성과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전교조의 젊은 교사들뿐 아니라 필사적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굽힐 줄 모르는 운동권의 학생들. 그리고 분신자살도 불사하는 파업노조 지도부들을 보면 모두 싱싱한 젊은이들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이 땅의 거리가 좁다는 듯이 활보하고 다니는 폭력세력들이나 마약집단들 그리고 향락을 추구하는 세력들도 젊은이들입니다. 입시학원의 건물이 서있는 곳을 가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젊은 재수생들의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바로 이 땅의 젊은이들입니다. 어디를 가나 젊은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야구장이나 축구장뿐 아니라 영화관. 오락관. 전자게임. 만화가게. 술집. 디스코회관 어느 곳에나 말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똑똑하고 뜻 있는 젊은이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대학부에 가 보아도 별로 없고 청년부에 가보아도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전도회는 지극히 활동이 미약하고 모임이 위축되어있는 반면에 여전도회는 활동이 활발하고 모임이 왕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교회를 등지고 떠났고 반대로 세상은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겼을까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교회가 젊은이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교권이나 교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싸우는 데 바빴고 건물 짓고 교육관 짓는 등 자체 유지나 성장에만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단지 젊은이들을 유년주일학교. 성가대 등 교회 봉사의 원동력으로 삼는 데 관심이 있었지 젊은이들에 대한 바른 비전을 가지고 그들을 양육하거나 그들에게 투자하지 못했습니다. 유년주일학교나 대예배는 힘을 주어 강조한 반면에 젊은이들의 예배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둘째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데 대부분의 교회가 실패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부를 거쳐서 대학에 올라오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이 세상 속에서 수 없는 갈등을 겪게 됩니다. 거기에는 사춘기적인 갈등도 있지만 사회적인 갈등과 민족적인 갈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러한 모든 갈등을 극복해낼 수 있는 분명한 복음과 투철한 신앙을 키움 받지 못한 채 적당하게 방치되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대부분의 청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마디로 '교회에 대한 실망과 환멸' 이란 단어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이상과 꿈을 주는 데 실패했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질서체계가 무너지고 과격한 사회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젊은이들은 어떤 이상과 꿈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어했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 때에 그들은 진정한 야망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한국 현실인 분단의 아픔이나 통일의 문제나 빈부차이의 문제나 역사의 정통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은 교회로부터 별로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그들의 가장 예민한 특징인 위선, 불의에 대한 분노와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이해 받지 못하였고. 내일의 조국과 세계에 대한 꿈과 이상도 가르침 받지 못했습니다. 현실문제에 대해 교회가 던져주는 이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세계선교의 꿈을 안고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교회상도 그들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잃어버린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크고 웅장하고 화려해도 그것은 폐허와 같은 교회에 불과합니다. 어린이와 노인들과 여자들만 있는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서둘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다시 교회 안으로 불러 모아들여야 합니다.
첫째 교회는 젊은이들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을 키우고 그들에게 투자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목회자가 직접 뛰어들어 정열을 쏟아야 해결됩니다. 젊은이들을 무서워 말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정열을 불태울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가장 귀한 투자는 건물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젊은이들에 대한 투자입니다. 교회 형편이 가능하다면 대학, 청년부 지도자는 전임 사역자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캠퍼스와 직장에까지 찾아다니도록 해야 합니다. 마치 담임 목사님들이 각 교인의 집을 방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소리가 교회에 들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 하며 그들에게 참된 크리스천의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직업관을 바로 세워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성경공부와 함께 개발해야 합니다.
둘째는 젊은이들에게 분명한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화약고와 같습니다. 그들이 잘못되고 과격한 사상에 오염되면 오히려 교회를 파괴하고 교회를 변질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정치 투쟁의 장소로 만들거나 사회사상의 온상으로 삼도록 해서도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을 오염시키기 쉬운 것은 잘못된 신학사조입니다. 그들은 모험을 좋아하고 감성적으로 예민하고 지적 욕구가 많기 때문에 비 성경적인 사조에 대해서도 쉽게 긍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바로 젊은이들의 지도자의 자질과 신앙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인격적인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지도자가 아니고서는 젊은이들을 맡겨서는 안됩니다. 비록 목사님이 직접 가르치는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복음적인 지도자를 세울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진정한 모든 사역이 시작되기 때문에 철저하고 분명한 성경교육을 시켜야만 젊은이 사역은 가능합니다.
셋째는 젊은이들에게 이상과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청소년 3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83%가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청소년들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컴퓨터 채팅이나 오락에만 빠져 있는 듯합니다.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의 54%가 하루 3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오락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평생 구걸만 하던 한 할아버지가 어느 집 주인을 찾아 햄버거 사 먹을 돈을 얻은 뒤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먼지 묻은 바이올린을 줬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주인은 바이올린의 먼지를 닦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1704년에 제작된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바이올린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인이 바이올린의 가치를 알았다면 굶주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뭘 지니고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평생 구걸 인생을 산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이 노인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민족과 세계를 짊어지고 나갈 꿈과 이상을 교회가 심어주는 일입니다. 특별히 성경적인 세계관과 직업관을 세워주는 일은 시급하고 중요하며. 동시에 성경적인 역사관을 세워주어서 민족과 통일과 역사를 보는 눈을 심어주는 일도 그러합니다. 야망과 이상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향락뿐입니다. 동시에 잘못된 야망과 이상을 갖게 된 젊은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이단종파나 아니면 과격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뿐입니다. 지난 20 년 동안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운동권 계열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실정법을 어기면서 이북에도 가고 퇴학도 당하고 고문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습니까. 반면에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교회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역사에 대해서 어떤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행동합니까. 여기에 우리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참된 야망과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 다시 젊은이들의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생기 넘치는 발자국 소리가 교회를 진동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저하지 말고 담대하게 젊은이들을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교회당을 짓는 일은 연기할 수 있으나 젊은이들을 위한 투자는 연기할 수 없어야 합니다.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가 젊은이들의 소리를 수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 변화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네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5-7)
* 기도: 젊은이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우리 자녀들의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무거운 책가방과 무너지고 있는 교실, 어깨를 짓누르는 사교육의 현장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경쟁의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 이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회복시키시고 어루만져 주옵소서. 젊은이들이 유년시기부터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복을 받아 컴퓨터 중독과 술과 담배, 성적 유혹, 세속화된 가치관을 믿음으로 떨쳐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 위에 그들의 삶이 세워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초중고교와 대학 캠퍼스마다 복음의 열풍이 불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진리로 학부모와 교사, 교수들의 정신에 변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한국의 모든 교회가 청소년을 주님의 가슴으로 품는 교회로 거듭나게 도와주소서. 자녀들의 행복을 위하는 교회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우리 젊은이들을 여호수아 세대로 일으켜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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