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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의 영성(14) ♣ 엠마오의 회복 ♣ /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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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영성(14)      ♣ 엠마오의 회복 ♣         
              눅24:13-35,2003.11.09.늘찬양교회
                http://www.everpraise.or.kr)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박찬호 선수와 김병현 선수가 슬럼프에 빠져 고민하고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나 스타들에게는 슬럼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자기 실력이 발휘되지 않는 때를 말합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슬럼프에 빠지면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해도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아니 오히려 퇴보할 때는 앞이 캄캄해집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도통 매출이 오르지 않을 때, 이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정체 내지 퇴보는 모든 인간에게 보통 곤욕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슬럼프에 빠지면 괴로워합니다. 힘들어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런 슬럼프에 빠져 한 두 번 고민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앙의 슬럼프에 빠져 믿음 생활을 중단하고 제자들의 무리를 이탈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하였는데 왜 내 신앙은 점차 힘을 잃고 낙심 중에 빠져가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엠마오 상의 두 제자의 모습을 통해 낙심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고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고 은혜 안에 믿음 안에 돌아오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Ⅰ. 엠마오 상의 두 제자.

    1.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3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직후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25리 되는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18절에 '글로바'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은 아니고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고 모셨던 70인 중에 두 사람으로 짐작이 됩니다. 아무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대단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제자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이 일으킨 표적과 기사들을 보았으며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광경도 보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21절)라고 생각하고 추종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정치적으로 회복시켜줄 왕'으로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마20:20-24) 그러나 예수는 대제사장과 관원들에 의해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도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3일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했습니다. (18-21절, 마20:19) 그런데 죽은 지 사흘이 되도록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간간이 들리는 소문에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는 있었으나 그 소문을 확인해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들은 근거 없는 풍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들 속에는 핍박의 세력으로 인한 공포가 더 가득했습니다.(요20:19) 이제 이들은 예루살렘 거리에 나서기를 두려워했고, 실의와 비통함에 빠진 채 배신감과 슬픔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낙심한 이유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예수와 예수의 하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기보다는 이루어지지 않은 기대감에 대하여 더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을 봅니다. 구속사적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육신 적인 보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다가 환경의 어려움이 다가오고 고난을 받을 때 그 고통이 크거나 계속될 때 실망합니다. 그 환경을 피하려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경제문제 교육문제 삶의 질적인 문제에 불만을 갖고 가정과 교회와 조국을 등지고 해외유학과 이민으로 하나 둘씩 떠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러기 아빠가 자살하고, 학생들이 자살하며, 노동자들이 분신자살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강도 방화 살인 등이 도처에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높은 43.5%에 육박하는 이혼율에 이어 스와핑과 원조교제 등이 대한민국을 뒤흔들어 높고 있습니다.

가치관의 혼돈과 방황의 시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 한국교회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채 교인수가 점차 하락해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대다수의 성도들도 영적 기갈 상태로 점차 무력감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비극이자 가정의 비극이며 교회의 비극이며 민족의 비극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며 우리의 아픔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방관주의, 회피주의, 도피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 크리스천의 특징은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곧바로 교회를 떠납니다. IMF의 환란 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늘찬양교회를 떠났습니까?
믿음에서 떠나면 안됩니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환란과 핍박이 와도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5-16절)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길가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나그네가 가는 길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낙심과 실망과 비통함과 두려움에 빠져있어서 부활의 주님이 다가오셨음에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불과 사흘 전까지 곁에 있었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뭔가 이들에게 큰 잘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며 은혜가운데 주님을 따랐던 것이 아니라 이적과 기사만을 바라보고 아니면 자신의 명예와 이익과 축복만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랐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과 하늘나라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하고 목사님의 관심과 사랑만을 받고 교회를 다니다가 목사님의 관심과 사랑이 새신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가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이렇듯 영의 눈이 뜨이질 않으면 그 믿음이 헛것이 됩니다. 세상 만사가 두렵고 무섭게만 느껴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배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풍랑이 일자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막4:39)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막4:40)고 질책하셨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버리고 온전한 믿음의 눈을 떠서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의식과 시각으로는 되지가 않습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식변화 또는 영적 각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느끼며 보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귀한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 모두가 영의 눈을 떠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3.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의 두 제자와 자연스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누가는 그들의 얼굴 표정을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17절에 "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글로바가 용기를 내어 역질문을 하였습니다. "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합니까?" 주님이 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뇨?"

우리는 여기서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였던 예수님의 접근법을 다시금 보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의 이유를 그들 자신보다 더 깊이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픈 이유를 직접 주님께 말씀드리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에게 "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원리와 똑 같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막10:51-52)하셨듯이 이 두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아픔과 상처 그리고 소망을 주님께 아뢰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손을 펴서 일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열어 놓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드디어 본 문제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줄 영적 메시야로 본 것이 아니고 로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시켜줄 왕'으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마20:20-24)

그러자 주님께서는 엄하게 꾸짖으시면서 노(怒)를 발하였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절)
책망의 첫마디가 "미련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다'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허망한 것을 바라보고 나를 쫓았느냐?'는 말입니다. 두 번째 "더디 믿는 자들아"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사야에는 오실 그리스도께서 침 뱉음을 당할 것과 곤욕을 당하시나 입을 열지 않을 것과 강도들과 함께 못 박히실 것과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과 고난에 관한 많은 일들이 예언되어 있습니다.(사50:6,53:3-12) 그 외에도 스가랴, 다니엘, 미가 등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단7:13,26,9:26,슥11:12-13,12:7-8,10,13:7,14:10,16,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은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는 모습을 보시고 엄히 꾸짖으신 것입니다.

만일 두 제자가 부활신앙을 확실히 믿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 우리가 직접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믿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 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진 사람은 무엇이나 안 믿고 믿지 못합니다.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련한 그 제자들, 더디 믿는 제자들을 책망만 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27절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때 이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32절이 이를 반증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뜨거운 감동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이렇게 엠마오 상에서 예수님과 두 제자가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날이 저물어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길을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셨습니다. 이때 두 제자들은 자기들과 함께 유하자고 예수님께 강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 식사를 나누고 그 후에 못 다한 이야기들을 더 나누자며 강권하여 주막으로 모셨습니다.


      Ⅱ.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두 제자

    1. 눈이 열렸습니다.(31절)

저녁 만찬 때의 일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먼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에 그렇게도 믿음이 없었던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30-31절) 하지만 그 순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상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특별히 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눈이 있습니다. ①육신의 눈과 ②영의 눈입니다.
아무리 육신의 눈을 뜨고 있어도 영의 눈, 마음의 눈이 가리어져 있으면 영적인 것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눈이 가려지니 예수님을 보고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부정적인 사고방식, 즉 죽었다는 사실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입관과 기준에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잘못된 고정관념과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과 가치관을 바꾸기 위해 우리를 실패의 자리로, 절망의 자리로 낙심의 자리로 이끌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원망과 불평의 태도를 바꾸고 감사와 소망의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긍정적인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루속히 우리 속에 있는 절망적인 생각, 미움, 원망, 분노, 우울증, 잘못된 고정관념, 옛 생각, 옛 습관들을 버리고 열려진 마음으로 예수님과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눈이 열려지듯 영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왕하6장)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예수가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보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입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신령한 눈이 밝아지고 신령한 마음이 열리는 법입니다. 내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 분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함으로, 늘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님과 날마다 함께 하는 은혜의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2. 심령이 뜨거워졌습니다.(32절)

엠마오 상의 두 제자는 영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심령도 뜨거워졌습니다.
32절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심령이 뜨거워집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성령의 불로 가슴이 뜨거워진 것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그 날 거기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난 후 그들의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냉소적인 신앙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낙심하고 침체했던 영혼이 강한 힘을 얻었고, 탈진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했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32절)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원 집회에서 삼각산 꼭대기에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님이 임합니다. 심령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을 외면하거나 예배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3. 올라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33절)

영의 눈이 떠져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보게 된 엠마오의 두 제자는 그 자리에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33절입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자들이 모여 있어."라고 했습니다. "곧 그 시(時)"는 "바로 그때"라는 뜻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때는 이미 저물었을 때입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12㎞나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말씀을 깨닫고 부활의 주님과 성령의 능력을 받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날이 밝은 그 다음 날 떠날 올 수도 있고 아니면 2-3일 더 지체하다가 떠날 수도 있었건만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큰 기쁨을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하고 싶어 즉시로 엠마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결단입니다.

참 회개는 즉시 해야됩니다. 미룰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습니다.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하나님께로!
떠났던 믿음에로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능력의 길"입니다.
"승리의 길"입니다.
"소망의 길"입니다.
"영광의 길"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서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간증하자 이 두 사람도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고 당당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베드로만 예수를 본 것이 아니라, 엠마오의 두 제자만 예수를 본 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김목사 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보았다고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통해 내가 인생을 포기하고 절망했을 때, 불가능 앞에 서 있을 때, 나를 찾아와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느니라."(사60:1)는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와 내 가정과 늘찬양교회와 이 민족이 180도로 회복되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낙심 중에 두려움 중에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갔던 이름 모를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풀어주시는 말씀과 베풀어주시는 떡을 먹고 영적 눈이 떠져서 다시금 성령의 본산지요, 초대교회의 탄생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듯이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 하였듯이 우리도 낙심과 절망의 자리 염려와 두려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은혜의 자리, 믿음의 자리, 축복의 자리, 능력의 자리, 회복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엠마오 길에 저들과 함께 동행하셨던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과도 동행해주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전도의 자리, 찬양의 자리, 봉사와 헌신의 자리, 에 참석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늘찬양교회의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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