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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은 것과 얻은 것 /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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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과 얻은 것
창세기 32:22-32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 중에 제인 아담스(Jane Adams,1860-1935)가 있습니다. 제인 아담스는 시카고의 어느 부잣집 딸로 태어났습니다. 제인에게는 부유한 가정환경과 미모 그리고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된 미래와 아름다운 꿈들이 곧 열매로 영글리라 모두들 제인의 앞날을 기대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의과대학에 진학했고 학업에 정진하던 어느 날, 척추에 이상이 왔습니다. 도무지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 판명났습니다. 많이 절망하고 많이 실망했습니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 보다, 그 때문에 잃어버릴 희망과 꿈 때문에 더 좌절했습니다. 낙심 가운데 있던 제인에게 의사는 휴양차 여행을 권합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너무나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인 제인은 유럽을 여행하던 중 영국에 있는 어떤 빈민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헌신적으로 가난한 아이들과 어려운 환경에 있는 빈민들을 돕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인은 하나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제인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인은 미국으로 돌아와 시카고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허름한 집을 사서 개조한 후 고아와 가출소녀들을 돌보면서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네들의 가난이 불행이 되지 않도록, 그네들의 버림받음이 한이 되지 않도록 가르치고 양육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제인은 척추 병으로 75세로 죽을 때까지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제인은 자기 존재 목적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굽혀본 적도 타협한 적도 없습니다. 자신보다 더 큰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들을 돌보았던 제인은 1931년도 세계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잃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소중히 여기던 것을 잃을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던 미래와 삶을 대하는 철학, 희망을 한꺼번에 잃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잃어버림을 통해서 새 인생의 길을 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잃어버림은 고통과 불행 너머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지난 한해를 돌아볼 때 고통스러운 시간이 많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원치 않게 병을 얻어 치료 중에 있는 사람 그리고 바라던 꿈이 깨져 절망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왜  상실과 고통이 찾아오는지, 감사주일을 보내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오늘 제인 아담스처럼 고난과 상실을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 음성 앞에 여러분의 귀와 마음을 열어보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시고 만드신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새 시야를 열어 가시는 그 인도하심 앞에 오늘 우리 마음을 맡겨 보시지 않겠습니까.

고난과 상실을 통해 역시 하나님을 발견했던 또 하나의 인물 야곱을 통해 하나님 마음으로 여러분을 초청하려고 합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 집에서 많은 재물과 가족을 얻어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중에 야곱은 심각한 위기 가운데 있게 되는데, 20년 전 장자권을 가로챘던 동생을 잊지 않고 있던 형 에서는 20년 동안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형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세 떼로 나눕니다. 형이 첫 무리를 치면 형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치고 또 둘째 무리까지 치면 마지막으로 뒤따르던 가족들도 피신하고 자신도 도망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모두 강을 건너게 한 다음 야곱은 혼자 강 이편에서 고민하며 고독한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웬 사람이 자신을 공격합니다. 야곱은 형이 보낸 첩자가 왔구나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싸웠을지 모릅니다. 야곱은 이때껏 한번도 누구에게 져 본적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실패라고는 몰랐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공격하던 그 사람은 자신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환도뼈는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에 연결되는 뼈를 가리킵니다. 환도뼈를 치니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이일로 인해 야곱은 평생 다리를 절었다 합니다. 형과 벌일 전투를 위해서도 더욱 건강해야 할 그때 야곱은 결정적으로 건강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니 환도뼈를 다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이뤄왔던 그는 더 이상 혼자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결정적인 순간에 소중한 자신감과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야곱의 생애가 끝났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데오도르 목사님은 바로 이 사건이 야곱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사건이 있었기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변해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환도뼈가 탈골하는 아픔 속에서 야곱이 얻은 것은 무엇이기에 그토록 변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야곱은 발버둥과 매달림의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정 누구를 위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될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까지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었기에 불가능을 몰랐습니다. 출생서열까지 바꾸면서 축복을 가로챘고 원하는 여인을 얻고자 14년이나 봉사하며 기다렸습니다. 건너갈 때는 홀홀 단신이었으나 돌아올 때는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환도뼈를 다치기 전에 야곱은 특별히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움은 자기 한계를 느낀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이나 찾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해서 모든 일이 잘 먹혀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그 풍요로움과 부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사는 것, 그것이 야곱의 인생철학이요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던 그 날 밤 환도뼈가 부러질 때 자기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성공도 어느 한계에 부딪히면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 흙으로 돌아갈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진정한 자기 실체와 자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암으로 고통 받는 분들이 있고, 또  치료된 분들도 많습니다만 그런 분들을  만나보면 치료되고 난 뒤 그분들의 삶은 상당히 많이 바뀝니다. ‘평생 병원에 한번 가지 않고 지금까지 원하는 것은 마음대로 했습니다. 교회가 특별히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 목사님 괜찮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했던 분이 한계 상황에 부딪히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고 죽음을 의식하면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오늘 야곱은 자기 환도뼈 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를 축복하십시오. 이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를 축복하십시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발꿈치를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성공하는 길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붙들고 발버둥 쳐왔던 것이 야곱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는 이제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 좀더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야곱은 비록 다리는 절었지만 혼자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크나큰 상실을 통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도뼈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방법을 쓰시기 전에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하나님 도움 없이도 성공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그렇게 얘기하는 그것까지도 가능하게 하셨던 배후의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진정 섬겨야 할 분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으면 굉장히 교만해집니다. 사람은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잘해도 다 잘하는 것처럼 교만합니다. 조그만 성공 앞에서 남을 짓밟고 무시하며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런 교만한 사람이 도움 되시는 하나님을 찾는 통로가 고통이라면 고통은 우리에게 손해가 아닙니다. 나를 두르고 있는 두꺼운 껍질을 뚫고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새롭게 영접하고 발견할 수 있다면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무대에서 아름답게 쓰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고난, 고통, 어려움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불행으로 끝난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을 넘어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오히려 그 일을 기초삼아 자기 인생을 새롭게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환도뼈가 탈골되는 아픔 속에서 야곱은 고난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습니다.
30절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고백합니다. 야곱은 고난과 절망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고 아무도 올 수 없는 얍복강 나루터의 고독한 공간에 찾아오신 주님, 야곱 홀로 고난과 고독을 당하도록 두지 않고 함께 하셔서 개입하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곧잘 내가 한 어떤 일의 결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죄책감을 가집니다. 또 죄책감과 함께 원망하는 마음도 갖습니다. 그래서 당한 어려움보다도 원망과 죄책감 때문에 훨씬 더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 영적으로 새로워진 사람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그 얼굴을 대면하는 동안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당한 고난을 결과론적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진 목적론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고난과 어려움을 주셨을 때는 분명히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이 있을 거야. 하나님은 선하시니 나를 세우고 살리기 위함이요, 새롭게 만들기 위함일 거야.’

요한복음 9장 2절을 보면 제자들이 시각 장애인을 보고 질문합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나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이오니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시각을 고쳐주십니다. 3절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소경된 것은 어떤 일의 대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관점을 바꾸어 고난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더불어 고난을 통해 이루실 목적이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살아온 지난날을 보니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혹은 나를 버리고 간 어느 형제, 자매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쓰라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 귀 기울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결과론적 관점으로 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 어려움은 하나님 계획 속에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 고난 앞에서 들어야 할 하나님 메시지에 귀 기울일 것을 권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말씀하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에 예민하고 민감해 집니다. 교회에서 고난당하는 형제와 자매를 죄값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보거나 대하면 안 됩니다. 정말 믿음 있는 사람은 고난당하는 이웃이 주님의 뜻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이후에 야곱은 고난 앞에 절망하지도 않고 결과론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갑니다.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을 축복한다면 야곱과 같은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의 시작은 험했지만, 노년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는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열 두 아들을 품에 안고 하나씩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지팡이에 몸을 기대 자손을 축복하며 세상을 떠나는 노인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운 황혼을 보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인생의 마무리를 보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 땅을 떠날 때 자손들을 마음껏 축복하며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야곱은 고난에 담긴 하나님 메시지를 읽고 자기 삶의 자리를 빨리빨리 옮겨 하나님께 합당한 모습으로 바꾸었기에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각을 갖게 해주었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메시지를 찾으십시오. 주님의 메시지 앞에 민감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노래를 시작하십시오.

셋째 야곱은 지금까지처럼 갖가지 복을 구하기보다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 즉 하나님을 구해야 할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야곱은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자의 축복권도 재산도 아내도 얻었습니다. 야곱은 이를 위해서 일평생 살았고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 야곱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 후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파멸에 이른다고 합니다. 첫째 교만(arrogance), 둘째 고독(loneliness), 셋째 모험(adventure), 넷째 간음(adultery)의 유혹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유혹과 어려움입니다.

공부 잘 하는 사람은 꼴찌를 사람처럼 보지 않는 교만이 있습니다. ‘내’가 일을 성취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동안교회를 섬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규모가 조금 작은 목사님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러고 나면 제가 정말 초라해 보이는 겁니다. 이게 뭔가 성공의 ‘성’자도 하지 못했는데…….고독은 또 어떻습니까? 고독을 이기기 위해 사람들은 외도의 충동에 빠집니다. 무언가를 이루었기에, 사람들의 찬사가 있기에 더 자극적인 욕구를 향해 달려가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야곱을 풍요로운 환경 따라 그대로 두었다면 파멸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의 축복을 흩뜨려 버리셨습니다.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된다는 환도뼈를 쳐서 힘줄을 끊었습니다. 왜입니까?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깨닫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갖가지 축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축복을 주시는 자와 동행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저도 집에 들어가면, 여섯 살 된 꼬마가 “아빠!” 하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제 손을 보고는 “오늘은 아무것도 없어?” 하며 돌아섭니다. 참 비참한 생각이 들어 ‘그래 너 시집갈 때 10% 삭감이다.’합니다. 오징어도, 치즈케익도 바꿔가며 얼마든지 사 줄 수 있는데, 그 순간 자기에게 돌아갈게 없다고 아빠를 모른체하는 딸아이에게 제가 무엇을 해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축복하는 하나님 보다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물질과 명예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고갈되고 맙니다.

누가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시몬의 배위에 오르십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난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려 보십시오.” 베드로가 생각할 때 기가 막혔겠죠. 목수인 예수님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자기에게 조언하니 말입니다. “깊은 데로 가라니, 밤새도록 고기 잡을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그 곳은 이 시간에 고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기가 엄청나게 잡혔습니다. 밤새도록 잡히지 않아 낙심하고 있었을 때 잡힌 많은 고기를 보고도 베드로는 돌아서서 고기를 잡게 하신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내 절망과 낙심, 좌절 을 성공으로 바꾸신 주님은 내 인생도 변화시킬 분입니다. 내 운명을 바꾸실 분입니다. 진정 내 축복의 근원되신 분입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라는 말은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의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운명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롯은 어떻습니까? 롯의 부는 아브라함과 있을 때만 가능했습니다. 롯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삼촌의 신앙 그늘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를 택해서 나갔을 때 결국 롯이 건진 것은 부의 종말과 소금기둥 된 아내, 홀로된 두 딸 그리고 딸과 관계를 가져 후손을 퍼뜨려야 하는 비참함 뿐이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좇기보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을 발견했고 따라서 그의 인생이 바뀌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가 잃어버린 것이 축복의 어떤 것이라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복의 근원되신 주께서 나를 떠나지 않고 붙들고 함께 계신다면, 그 어떤 것을 잃었다하더라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축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내 인생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올릴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풍성케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실 능력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 잃어버렸는데, 왜 축복의 근원을 잃어버린 것처럼 낙심하십니까. 남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잃어버렸다 해도 주님을 잃지 않았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만약 내가 원하는 물질과 명예, 권세와 이성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축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잃었다면 슬퍼하십시오. 몸부림치십시오. 여러분의 만족은 또 다른 갈증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갈증은 끊임없이 내 인생을 곤비하게 만들 것입니다.

요셉의 고난은 축복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발견케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감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으로 마음이 무거우십니까? 그러나 다시 한번 바라보십시다. 어려움을 통해서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홀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어 겪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목적과 뜻을 찾기만 한다면, 주님이 예비하신 한걸음 한걸음을 따라가는 삶이라면, 잃어버림은 잃어버림이 아닌 얻음이요, 승리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그러나 알고 보면 거추장스러워 있어서는 안 될 것을 추구하다가 잃어버렸다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로 인해 본체인 주님을 찾았다면 여러분의 슬픔은 감사의 제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 감사주일을 보내며 정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런 감사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어떤 문제 앞에서도 야곱처럼 지혜로운 선택과 결단을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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