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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뼈들을 살리는 부흥을 이루라 / 겔 3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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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들을 살리는 부흥을 이루라
에스겔37:1-10

어느 젊은이가 주일 낮 아침 교회 나가야하는 문제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젊은 아들은 어머니에게 교회에 나가기 싫다면서 교회 나가기 싫은 이유를 말했습니다. 자기가 교회 나가기 싫은 이유는 첫째는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피곤하니 교회 나가기보다는 집에서 쉬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교회 나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성가대 찬양이 얼마나 화음이 엉망인지 그 찬양을 듣는 것 자체가 불안하고, 대표기도가 어떻게나 길고 지루한지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하는 짓이 맘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보기조차 싫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에 나가면 너무 일이 많아 가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던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면서, 아들이 교회에 나가야 할 당위성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로 교회 나가 주일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생활은 본인자신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므로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보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고 교회 나가는 것이기에 교회 나가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 네가 교회 담임목사이니 꼭 주일 낮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과 평화와 평안뿐 아니라 생명력이 충만하고 능력 있고 활기찬 것이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목적을 위하여 부단히 전진하는 끊기와 굴하지 않는 용기와 그 목적을 위하여 역사 하는 힘을 표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못함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이후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두 왕국 중, 기원전 710년에, 먼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그 후 120여년후 남 왕국 유다도 바벨론의 침입 앞에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패망은 북 왕국 이스라엘보다 더욱 비참했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곽과 성전을 무너트리고 많은 백성들을 학살했습니다. 심지어는 신성한 성전 안에서 유다 백성들을 목베어 죽이기도 했습니다(대하36:17). 느브갓네살은 성전과 왕국의 보물들을 탈취해갔고, 유대왕 여호야긴을 붙잠아 쇠사슬로 결박하여 수많은 귀족들과 기능인들과 함께 포로로 붙잡아 갔습니다.

바벨론 포로들 가운데 한 젊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스겔이었습니다. 젊은 제사장 에스겔은 자신의 조국 유다 왕국이 철저히 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바벨론 군대에 유린되고 성전의 거룩한 기물들이 약탈당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굴욕과 비애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들의 집단수용소와 같은 그발 강가의 움막집에 살면서 지난날의 고국의 영광을 회상하며 한숨 짖고 있는 동족의 절망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의 역사는 에스겔에 있어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잃어버린 현실이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한 태락과 부패로 패망한 자신의 민족의 모습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민족적인 의식, 약속에 대한 희망이나 기다림, 꿈을 기대하는 열심 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죽음의 모습이 자기 민족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에스겔에게 하나의 이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른 뼈가 가득 한 골짜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흩어져 있는 마른 뼈들은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인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그 뼈들은 에스겔 자신의 민족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뼈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게 하심으로 살아나게 하시자, 놀랍게도 이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뼈들이 서로 맞추어 지고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 살아난 것입니다. 뼈들은 살아나서 큰 군대로 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의 본 이상에서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마른 뼈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는 믿음이나 희망 꿈의 가능성이나 약속을 잃어버리고 있고 이것에 대한 열심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생명감을 상실한 것과 같이 모든 의욕이 메말라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자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멋진 역할과 구실을 잃어버린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의 목적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긍지나 가치와 보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냥 그대로 주어진 대로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도저히 변화가 없을 것이며 될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기대나 희망을 가지기에 이미 지쳐버린 것은 아닙니까? 살아가는 의욕이나 재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나 자신이 바로 마른 뼈가 아닙니까?

여러분, 나는 물론이고, 우리가정, 교회는 어떻습니까? 혹 마른 뼈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습니까? 이 살리는 역사가 부흥입니다.
부흥이란 말 히브리어의 ''하야''( )는 ''되살아나게 하다'', ''살게 하다''의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부흥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마른 뼈를 다시 살리는 부흥은 바로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이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마른 뼈를 살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고 물으실 때,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고 대답했습니다. 에스겔의 이 대답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현실적인 안목으로 볼 때에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하실 때에 될 수 있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패망한 이스라엘 민족이 고국으로 돌아간다거나 그들의 신앙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70년 후 하나님은 그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될 때에, 죽어 흩어져 버린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뒤를 이은 페르샤의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공포도하고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 민족으로 고국에 돌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때에 지도자들이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 구약의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될 때 마른 뼈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생명의 사람으로 살아나는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와 같이 되어버려 죽은 자처럼 살고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는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잠들어 죽어 버린 우리의 의욕과 열심을 누가 살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우리를 생명의 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뿐입니다. 여러분의 삐뚤어진 마음을 누가 바로 잡아줍니까? 상처로 얼룩져 병들어 버린 우리의 감정을 누가 새롭게 살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변화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될 때에 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살리는 역사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른 뼈들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마른 뼈와 같이 살아가는 우리를 새롭게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마른 뼈를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너희 마른 뼈들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대언 하게 하셨습니다.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려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는 것은 말씀을 듣는 귀가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패망하고 포로가 되어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상실하고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하는 예언자들에게 들렸습니다. 바벨론 왕궁에서 일하던 다니엘에게도 들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민족에 대언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쓰여질 남겨진 자들, 곧 남은 자들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의 ''남은 자 사상''입니다. 그들은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롭게 살리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그 안에(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저자는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분석해 주고 깨닫게 해 주고 치료해 줍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외에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 영혼의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입니다. 누가복음 1장 37절에서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중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루터는 로마서 1장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던 중에 그 말씀이 루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루터는 그의 외식의 행위 적인 마른 뼈의 신앙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신앙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루터가 대언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교인들도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가 마니교에 빠져 지적만용가운데 방탕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면적 번민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밀란의 한 정원에 꿇어앉아 자신의 괴로움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과연 어느 때까지 입니까? 내일, 또 내일, 언제까지나 내일이어야 하겠습니까? 과연 왜 나의 더러움이 바로 이 순간 끝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때 가까운 곳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 가운데, "책을 들고 읽어라. 책을 들고 읽어라 책을 들고 읽어라" 는 소리가 마치 하나님의 명령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즉시 성경을 펴서 읽었는 데 그 부분이 로마서 13장 13절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에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이 어거스틴의 마음에 가득 차게 들어왔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그 순간 어거스틴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 뒤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기독교역사 가운데 위대한 역할을 감당한 성자의 칭호를 받는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아납니다. 마른 뼈와 같은 내 모습이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야 하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말씀을 듣는 축복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은 생기로 마른 뼈를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에게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들어가자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숨(breath of God)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호흡, 곧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생명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가져야 인간이 살아있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무슨 기운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세속과 탐욕과 욕망의 기운으로 가득 찬 더럽고 냄새나는 기운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채워야 살아있는 생명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적 표현으로 볼 때에, 성령의 내적 충만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충만하셔서 내적 증거를 만드셔야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열매맺는 살아있는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내적 체험과 충만함이 없이는 구원도, 주의 사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라고 단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내 안에 내주 하시고 충만하심 안에서 우리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거친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온 용감하고 강한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 의리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후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로온 제사장 하속의 귀를 베는 용감성을 보였고, 예수님이 붙잡히셔서 재판을 받으실 때 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지켜 본 의리를 지켜보려고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다시 어부의 생활로 되돌아간, 겁 많고 비겁한 배반자의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가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살벌한 예루살렘 거리에서 예수를 증거 하는 용감한 사람으로 다시 살아났고, 3000명씩 회개시키는 확신 있는 증거와 설교의 사람으로, 예수님처럼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권능의 사람으로,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용감한 사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가지고 사는 성령의 사람이 될 때에 살아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억울한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소화가 안 되는 사람이 소화제를 준비해 가지고 일터에 나갔는데 그 소화제를 잃어버렸을 때 억울했고, 그보다 더욱 억울한 것은 소화제를 간신히 다시 구해서 먹었는데, 그 소화제를 먹고 소화제에 체했을 때에 억울했다는 것입니다. 도한, 두 사람이 함께 엘리베이트를 타고 한 사람이 방귀를 뀌었을 때에 그 냄새를 고스란히 맡아야 할 때 억울했고, 그 보다 더 억울한 것은 방귀 뀐 사람이 내리고 그 다음 층에서 새사람이 타고 자신을 쳐다 볼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생활하며 억울한 사람이 누구인줄 압니까? 예수 믿으면서도 죽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누가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을 다시 살려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이나 꿈의 가능성과 확신을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생명감을 주고 의욕적이도록 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 앞에서 멋진 역할과 구실을 찾게 해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생의 목적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긍지를 찾게 해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주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살아 움직이는 적극적인 삶을 살게 하며 의욕적이고 재미있게 살아가게 해 주겠습니까? 누가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살리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새 생명을 만드시는 성령의 내주 하심과 충만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사람이 되심으로 변화와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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