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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쟁과 다툼/ 약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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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쟁과 다툼

본문: 약 4:1~12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2)

무지개 연못 한가운데 작은 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연못가에는 조약돌들이 깔려 있고 잡풀들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그 섬에는 툭하면 싸우는 개구리 세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이 샐 때부터 공연히 옥신각신 말다툼을 했습니다. "연못에 들어오지 마. 이 물은 내 거야." "그 섬에서 나가 그 땅은 내 거야!" "공중은 내 거야." 그런 식으로 계속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가 쳤습니다. 섬은 순식간에 물줄기에 휩싸이게 되었고 빗줄기가 하늘을 메우더니 연못은 흙탕물이 되었습니다. 물이 불어나서 섬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개구리들은 춥고 겁이 나서 덜덜 떨었습니다. 그들은 거세게 출렁이는 시커먼 물 위에, 아직 솟아 있는 몇 개 안 되는 미끄러운 바위 위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바위들도 곧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못에는 바위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개구리들은 모두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셋이 그렇게 붙어 있으니까 점점 무서움은 덜해지고 함께 희망을 나누게 되자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자 연못의 물이 조금씩 빠지더니 다시 연못은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은 이제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에 와서 평화, 기쁨, 새 힘을 얻기를 원하지만 미성숙함으로 인해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또는 성도와 성도들간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믿음이 쓰러지고 교회를 떠나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동안 큰 사고 없이 온유하고 평화롭게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분쟁과 다툼이 있는 것을 보면서 다툼이 왜 일어나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다툼의 원인은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질투하고 경쟁적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또한 남을 비웃으며 깎아내려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타인의 실패를 즐거워하며, 자신은 대다수의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3:10)
둘째, 다툼의 원인은 미움 때문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10:12)
셋째, 다툼의 원인은 미련함 때문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잠18:6)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 키느니라"(잠20:3)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잠26:9)
넷째, 다툼의 원인은 분노를 쉽게 내기 때문입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잠29:22)
다섯째, 다툼의 원인은 정욕(욕심) 때문입니다.
본문 3절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성경은 다툼이 '정욕'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정욕은 '내 주장만 하는 것'입니다. '내 주장을 하는 것' 과 '내 주장만 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이 사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함께 사람들과 대적하며 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가족에서부터 발생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세계에서만큼 다툼과 싸움이 극에 달한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다툼과 싸움의 원인이 인간의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개인과 단체와 국가의 이해관계 즉 ‘정욕’이 모든 싸움의 원인입니다.
여섯째, 다툼의 원인은 탐심 때문입니다.
어느 여름날 더위에 지친 사자와 멧돼지가 물을 마시기 위해 작은 샘물가로 왔습니다. 서로 먼저 마시려고 하던 그들의 다툼은 결국 목숨을 건 싸움으로 커져 버렸습니다. 싸움을 하다말고 숨을 가다듬기 위해서 잠시 쉬던 이들은 자신들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 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미운 감정을 접어두고 말했습니다.
“서로 싸우다 시체가 되어서 까마귀와 독수리의 먹이가 되느니 차라리 사이좋은 친구가 되는 편이 낫겠네.”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28:25)
일곱째, 다툼의 원인은 남의 일에 참견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26:20)
여덟째, 다툼의 원인은 술취함 때문입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잠23:29,30)
이러한 '다툼'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분쟁과 다툼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살인을 합니다. 살인은 사람을 육적으로 죽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멸하는 것, 영적으로 상처를 주는 것 또한 살인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간, 성도와 성도들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은 영적으로 침체현상을 가져오고, 영적으로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뭐 저래", "믿음 생활의 결과가 저것인가" 하며 영적으로 쓰러지게 하는 영적인 살인이 일어납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함께 타고 있던 승객들의 불편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은 버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여기가 교회인 줄 알아?”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세상에서의 큰 다툼은 작게 인식되지만 교회에서의 작은 다툼은 세상에서 큰 다툼으로 인식됩니다. 교회는 작은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권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다툼이 있는 곳에 화평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둘째로 기도를 해도 얻지 못합니다. 혹시 가정에서 부부싸움을 한 후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를 하면 기도가 되던가요?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리 기도해도 얻지 못합니다. 내 주장만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교회와 교회간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이런 다툼이 일어나는 곳에 "자기 주장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내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믿음'은 이전에 내 주장대로 사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대로 살았으나 주님을 믿고 나니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왕이 되시어 나를 지배하시어 주님이 원하는 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툼이 일어 날 때 자기 주장만 주장하므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기 주장을 포기하라 나를 죽이라 그때 다툼이 사라진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산 제물'로 보십니다.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목을 따고 피를 뿌려 죽었습니다. 죽은 것이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적인 기질과 성품들이 다 죽은 사람들입니다. 주님 뜻대로 애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내려놓아야 하고 죽은 자는 자기 의견이 없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에 사모님은 자기 주장이 강하여 성도들과 부딪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데 어느 날 기도 중 그 심령에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모' 이전에 '산 제물'로 불렀다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왜 그렇게 너의 주장이 강하냐?"라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 후 사모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궁금하여 물었을 때 사모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나는 이미 제물로서 하나님께 받쳐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그 교회가 다툼이 없고, 갈라짐이 없고, 분쟁이 없어졌습니다.
셋째, 재앙이 임하고(잠6:14,15), 멸망합니다.(사41:11)
이솝우화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함께 다니는 얼룩소, 검은 소, 붉은 소 세 마리가 있었습니다. 사자는 그 소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사자가 덤벼들면 셋이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따로 떨어져 있는 얼룩소에게 다가가서 “세 마리의 소 중에서 가장 힘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 소가 뽐내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 셋이 똑같이 힘을 합해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도와왔는데 붉은 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 하니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룩소에게 거짓말을 한 사자는 붉은 소와 검은 소에게 가서는 “세 마리 가운데서 얼룩소가 제일 힘이 세고, 다른 짐승에게 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니 그게 참말이냐?”고 물었습니다. 두 마리 소는 얼룩소가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붉은 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룩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얼룩소도 붉은 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있는 힘을 다해 덤볐습니다. 검은 소가 말렸지만 두 마리의 소는 뿔이 빠지도록 싸웠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중 어느 편이 정말 센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날부터 세 마리의 소는 같이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자는 좋아라 하며 소들을 차례로 잡아먹었습니다.
"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넷째, 악한 일이 일어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3:16)
다섯째, 국가의 파탄을 가져옵니다.(마12:25, 눅11:17)
고구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인 남생, 남산, 남건의 권력다툼 때문이었습니다.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막3:24)
그러면 이번에는 다툼을 피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변론과 언쟁을 피해야 합니다.(딛3:9, 딤전6:4)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2:23)
둘째, 거만한 자를 쫓아내야 합니다.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잠22:10)
셋째, 강한 자 사이에는 제비를 뽑아야 합니다.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잠18:18)
넷째, 노하기를 더디해야 합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15:18)
다섯째, 다툼을 좋아하는 자를 피해야 합니다.(잠21:19)
이밖에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다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첫째, 정욕(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4:1)
두 수도승이 오랫동안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의 생활이 단조롭다고 느낀 한 수도승이 말하였다. "매일 매일의 따분한 이 생활을 한번 다르게 바꿔 봅시다.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 보는 게 어떨까요?" 너무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다른 수도승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데요?" "그들이 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수도승은 거룩한 사랑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기 때문에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데요?" 수도승이 말하였다 "저 돌을 보십시오. 그것을 우리 사이에 두고 '이 돌은 내 것이야'라고 서로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을 했던 수도승이 잠시 생각하고 나더니 자신들의 오랜 우정에 위험을 느끼고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분쟁은 일어나기도 전에 끝났습니다.
하나님과 성령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정욕의 길로 가는 것을 시기까지 하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모든 싸움의 원인이 되는 ‘정욕’을 멀리하고 그 대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둘째,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합니다. 본문 9절 '슬퍼하고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영적인 상태를 보면서 내 안에 있어야 될 것이 있고, 없어야 될 것이 없어야 하는데 내 안에 있어야 할 선이 없고, 없어야 할 죄가 가득찬 것을 보고 슬퍼하고 애통해야 다툼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옆에 성도는 섬김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며, 포용해야 하는 대상인데 내 안에 사랑, 섬김, 포용이 없이 갈등, 미움, 다툼 등 죄악된 것이 있음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하는 마음이 있고, 또 육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육만 따라 가서 내가 원하지 않는 악만 가득하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은지 뒤돌아보고 애통해야지 다툼을 극복할 수 있다고 야고보 선생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 목사님과 장로님이 큰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장로님이 시험이 들어 교회에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그 장로님이 앉는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설교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목사님은 장로님 집으로 찾아갔으나 장로님은 문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교회에 와 장로님 자리에 앉아 기도드렸는데 목사님의 마음에 장로님과 서로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했는데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장로님을 순간적으로 미워하며 원수처럼 여기는 없어야 할 것이 있었구나 하는 회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장로님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화해가 되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와 다툼이 있습니까? 내 안에 있어야 할 선이 없고, 없어야 할 악이 있다는 것을 애통하고 슬퍼할 때 다툼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께 순복해야 됩니다. 본문 7절 '하나님께 순복해야 된다'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하나님께 순복할 때, 자신을 낮출 때 다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의 낮춤을 바라보며 십자가로 가까이 갈 때, 십자가 밑에 나를 낮출 때 그것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고, 낮추는 것입니다. 그 때 다툼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부부싸움을 할 때가 있지요. 그 때 서로 낮추고 십자가상에서 만나십시오. 나도 십자가 앞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편도 낮추어 십자가상에서 만나십시오.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순복하라' 그리하면 다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넷째,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절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회의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달라 다툼이 일어나지요 그 때 이성적으로 냉정히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데 감정이 먼저 앞서 돌아서 비방하게 되지요. 그리스도 형제를 비방하면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도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형제는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이므로 그를 비방하는 것은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될 때 다툼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피차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형제 비방을 금한(레19:16-8)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고 율법의 재판자가 되는 것이며 그래서 율법의 입법자가 되시며 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참람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들을 비방할 권리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자는 신자를 비방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비방하는 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뇨?”
다섯째,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16절“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가운데 일어나는 또 하나의 불행한 일은 자기 자신과 미래를 장담하며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미래를 멋지게 설계하고 그것을 장담하며 자랑하는 것은‘허탄한’것이고‘악한’것이며‘어리석은 것입니다.(눅12:20) 인생과 인생의 미래가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과 인생의 미래는‘알지 못하는 것'이고(욥23:10),‘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이 무상한 것입니다. 인생과 인생의 미래는 오직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것뿐입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여섯째, 양보해야 합니다.
고양이 두 마리가 고기 한 덩이를 얻어 가지고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원숭이가 자기가 재판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고양이들은 쾌히 승낙하고 고깃덩이를 원숭이 앞에 놓았습니다. 원숭이는 고깃덩이를 둘로 잘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작은 것을 받은 고양이가 "내 것이 더 작다."고 하자 원숭이는 큰 것을 한 입 잘라먹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고양이가 자기 것이 작다고 하였습니다. 원숭이는 또 다른 고기를 한 입 잘라먹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계속하니 고기가 양쪽 다 아주 작아졌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므로 원숭이는 고기를 다 먹고는 줄행랑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고양이들은 자기들의 싸움을 후회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니 내 목자와 네 목자가 서로 다투지 말게 하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고 양보하였습니다.(창13:8,9) 이삭도 싸움을 피하기 위해 우물을 양보했습니다.(창26:21,22)
우리는 다소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싸우지 말고, 사랑으로써 화평케 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즐기리로다"(시37:11)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툼을 피하고 어느 곳에든지 온유와 사랑의 씨를 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한 삶을 알고도 그것을 행치 않으면 죄입니다. (17절)
* 결론: 내 주장만 하는 것 이것은 정욕이고 이것 때문에 '다툼'이 들어옵니다. 그 다툼의 결과 영성을 살인하는 것이고, 내 정욕대로 구하는 것이므로 기도해도 하나님께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 주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다툼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있어야 할 형제에 대한 사랑, 섬김이 없는 것에 대해 가슴을 치며 슬퍼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순복하여 십자가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상대편과 다툴 때 십자가상에서 같이 만나 십자가 앞에서 같이 낮아져야 합니다.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방하는 것은 그 형제를 비방하는 것도 되지만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방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할 때 다툼을 극복할 수 있고 성숙한 믿음의 교우들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평화와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한국 교회가 분쟁과 다툼이 없는 좋은 교회, 화평한 교회가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예수복음선교회)
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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