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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족없는 세상을 만족하게(빌 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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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족없는 세상을 만족하게(빌4:10-14) 


요즘 참 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마음속에는 불만이 가득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특히 정치인들, 사회지도층들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그래서 노사분규, 데모도 많습니다.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서울리서치에서 가정 주부들에 대한 결혼생활 만족도 조사에서 30대의 서울거주 기혼여성 51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80%가 현재의 결혼 생활에 불만족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응답자의 40%가 자아 발전이 없는 가사 노동에 국한된 자신의 역할에 불만했습니다.
27%가 가정 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불만했으며, 10%가 남편의 외도 때문이며, 23%는 남편과의 갈등, 특히 사고방식의 차이와 무관심으로 결혼 생활에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만족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로스앤젤리스 타임스지가 여론조사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미국인 62%가 미국이 크게 잘못돼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성의 경우 70%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뉴스 다 들어셨죠. 엊그저께 뉴스를 보고 여러분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임신중인 아내의 진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도짓을 한 남편 박씨가 경찰에 붙잡힌 이야기.
28일 대구 지하철역 큰고개역 구내에서 출근중이던 이모씨(20·여)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린 뒤 현금 11만원이 든 핸드백을 빼앗은 혐의입니다. 그런데 이 박씨는 “1개월전 모회사 영업사원으로 들어갔으나 월급을 제대로 받지못해 임신 5개월 된 아내의 진료비를 마련하려고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위해 좋은일(?)을 할려다가 쇠고랑을 찬 것입니다.
11만원 때문에 강도짓을 하다니. . .그런 용기 있다면 막노동판에 가서라도 일하면 진료비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활의 불만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파괴적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혼입니다. 툭하면 이혼해 버립니다. 툭하면 가출하고, 자살하고, 강도 짓하고, 살인합니다.
우리사회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 병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은 모든 세계가 불만을 다스리는 방법이 파괴적입니다. 미국의 국제 사회 질서 유지 방법도 너무 폭력적이고 파괴적입니다. 미국의 이라크를 다루는 방법도 너무 파괴적입니다.
가정에 어린 아이들도 늘 부모에게 너무 꾸중을 받거나 구타를 당한 아이들은 소꿉장난을 놀면서 인형을 바늘로 찌르고 머리털을 자르고, 집어던지면서 엄마에게 매맞은 분노를 그렇게 푸는 것입니다. 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런식으로 온 세상이 복수의 방식으로 불만을 해소한다면 이 세상은 질서도 도덕도 없는 엉망진창,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족은 소유의 넉넉함에서 온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도, 절도 사건, 인신매매등 흉악한 사건들이 서슴치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만족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 만족은 이기적인 만족입니다. 자기만 좋으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거미인생이라 부릅니다. 거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그물을 쳐 놓고 남의 생명을 노립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얻는 것을 만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동물적인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세상에는 창고에 가득한 많은 소유를 바라보며 이것이 나 혼자의 힘에 의해 얻어졌다고 자부하며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지마는 나눔은 없습니다. 단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이런 인생을 개미인생이라고 합니다.
개미가 아무리 부지런하다고 해도 것도 참 만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힘과 지혜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소외되고 압제받는 자의 편에 서서 이름도 빛도 없이 봉사하는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으로 사회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용하면서 얻는 만족의 삶을 꿀벌인생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소유의 넉넉함에서 자족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자족함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자족함을 배워야 합니다.

세계에서 자기가 사는 곳에 제일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발리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노만 핀센트 필 목사님이 듣고 발리 섬을 찾아가서 조사하여 보았습니다. 일주일동안 살면서 조사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발리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며 만족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큰 산업 시설이나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자세를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1)"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2) "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
3) "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
4) "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
5)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섬에서 만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만족이 없는 것입니까? 두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는 집 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공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직장도 있습니다. 자동차도 있습니다. 자식있고 아내 , 남편 있고. . . 먹을 것 있고. . .그런데 왜? 그것으로 부족합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범사에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불평하는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아무리 권력을 쥐고 있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것뿐입니다.

만족하며 살지 못하는 부정적 중요한 요인이 두가지 있습니다.

1) 비교의식 : 이 비교의식은 열등감과 우월감을 조장합니다. 그러므로 비교의식이 있는 한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남들보다 적으면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대부분의 비교의식은 인간의 열등감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달란트 받은 사람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다섯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이것으로 장사를 합니다. 그런데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불만으로 가득합니다. 한 달란트는 한 사람의 일당을 5만원으로 가정할 때 3억원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그러나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돈이 큰돈인지 작은 돈인지에 관심 보다는 다른 사람들 보다 적다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비교의식 때문에 그는 주인에게 쫓겨나는 인생이 된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교의 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먹을 것이 풍성하면서도 상대적 빈곤을 느낍니다.
우리가 극복되어야 할 요소 중 하나는 비교의식입니다. 악마가 제일 사용하기 좋아하는 것은 비교의식을 심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비교의식은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을 파괴시킵니다. 자녀들에게 비교의 식을 가지고 말하면 자녀를 망치는 지름길이 됩니다.
"누구 누구는 키도 크고,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 하더란다, 너는 뭐 하는 거니?"이런 말은 아이에게 치명적입니다.
남편에게 "여보, 김집사는 공부도 많이 하고 돈도 잘 벌어 오고, 얼굴도 미남이고, . . .이런 이야기는 남편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정불화를 자초하는 이야기입니다.

2) 탐욕 : 탐욕이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심입니다. 인간은 '남보다 좀 앞서고 싶다. 그리고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유일한 본능일 것입니다. 가령 사자는 먹을 만큼만 사냥합니다. 쌓아 놓기 위해서 사냥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금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조금만 더' 하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탐욕은 목이 마를 때 짠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마셔도 또 목마른 법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은 이 세상에 있는 것 모두를 소유해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구입니다.
탐욕은 이웃의 행복이나, 사회의 질서, 평화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더 많이 누리려는 욕망, 더 높아지려는 욕망. .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고 하였습니다.
이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조금만 더 벌면 행복하겠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은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메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가난한 농부가 자기가 기르는 거위가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알을 낳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좋아서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거위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황금알을 낳아주었습니다. 농부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거위 우리로 달려가서 또 다른 황금알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일과처럼 됐습니다. 농부는 놀라울 만큼 굉장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늘어가면서 농부는 더욱 탐욕스러워지고 성급해졌습니다. 농부는 매일 하나씩 낳는 황금알을 기다릴 수 없어서 거위를 죽여 한꺼번에 모든 황금알을 얻고자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위를 죽이고 배를 갈랐을 때 뱃속에는 황금알이 한 개도 없었습니다. 이제 농부는 더 이상 황금알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농부의 성급함과 탐욕은 결국 그에게 찾아온 복을 걷어차 버리는 결과가 됐습니다.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1.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 12절에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비천한 가운데서도, 배가 고플 때에도, 궁핍할 때에 도 만족하기를 배웠는가 하면 풍부할 때에도, 배부를 때에도 만족하게 사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배웠다"는 말은 전에는 만족하게 사는 법을 몰랐는데 이제는 그것을 배워 터득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의 삶은 도움을 받아야만 할 정도로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이 과거에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때 별로 큰불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려니 하고 살았습니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경험한 만족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풍성함을 얻었기 때문에 만족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만족하였던 것입니다.

엊그제 어느 대학 교수가 학교에서 배신을 당했다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교수가 되기 전에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배워야 합니다.
유행병처럼 번져가는 자살. . . 오늘은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살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종입니다. 이제는 사람의 종, 종의 종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마귀의 종이 되어 죄를 짓는 일을 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분명한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살던지 죽든지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우리는 내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주를 위해 살아가며 주를 위해 죽겠다는 각오아래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신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2.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행전16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처음으로 빌립보에 갔을 때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에게 귀신을 내쫓아 준 일로 귀신들려 점치는 이 여자의 주인이 이제는 더 이상 점을 쳐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옷 벗김을 당하고 매로 맞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간수가 든든히 지킵니다.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밤중쯤 되었을 때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찬송했다는 말은 감사했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가게 된 것이 무엇이 그리 감사하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주를 위해 산다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의 몸에 어떤 질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늘 그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뽑아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험들지 않았습니다.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까?'하고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그 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 내가 강하다"고 말하면서 자족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고 했습니다.
바울의 자족의 비결은 운명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운명이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13절을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를 강조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년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즉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보세요. 그때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링컨 대통령의 좌우명은 "이것도 지나갈 것이다" 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링컨은 늘 "이것도 지나갈 것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r는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확신대로 하나님은 링컨의 믿음을 만족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잘 될 것을 믿으십시다. 그런 신앙의 확신과 고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영혼을 만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사도 바울의 만족한 삶의 비결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끝없는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가난한 처지에서도 늘 만족한 것은, 전혀 어떤 가망성이 없어 자포자기하면서 맛보는 그런 만족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는 사실상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만족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후 6:10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란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 재물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 전파 때문에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으면서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3. 물질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작은 것 가운데 깃들인 사랑과 영적인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여러 차례 바울을 위해 헌금을 보내 주었습니다. 마게도냐에서 또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바울의 전도여행을 위해서 헌금을 몇 번 보내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보 교회의 사랑에 감동하여 빌립보서를 쓴 것입니다.
그 교회가 보낸 돈이 얼마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만,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사랑하고 있고,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믿고 이 사실에 더욱 감격하고 기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적은 물질이라도 거기에 사랑이 가득 담겼을 때 그것은 참으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에 감격하면서 만족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질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부터 받은 물질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려진 귀한 제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아껴 쓰며, 그 물질의 가치를 몇 배로 귀하게 여기며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그리스도인의 물질에 대한 인식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 사치하고 낭비하고 있습니다. 돈의 귀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잘 사는 사람들에게 하루저녁 술값 100만원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한달 생활비입니다.
돈의 귀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치와 방종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 돈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족한 삶의 비결은 돈을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쓰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향기로운 제물로 드릴 때 거기에 큰 기쁨이 있으며, 만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돈은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보람 있게 사용할 때 거기에는 만족함과 기쁨이 더 큰 것입니다. 그 기쁨은 영과 육의 강건함의 복에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귀하게 돈을 쓰는 자를 기뻐하시며 그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은 불만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서 만족을 찾고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늘 만족과 감사, 찬송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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