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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 / 마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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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35             
용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의 過失)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So likewise shall my heavenly Father do also unto you, if ye from your hearts forgive not every one his brother their trespasses"(KJV)


인간 사회의 심각한 債務 문제

  지난 6월에 부천에서 충격적인 패륜 사건이 벌어진 일이 있습니다.  대학 휴학생인 김 모 군이 자기 할머니와 어머니를 목 졸라 살해하고 형을 흉기로 찔러 중태에 빠뜨렸습니다.  범행 이유는 카드 빚입니다.  그는 작년 한 해 동안 4000만원의 카드 빚을 졌습니다.  변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득불 아버지가 갚아 줬습니다.  금년 2월 신용불량자가 된 후에도 김 군은 계속 카드 빚을 졌습니다.  2년 동안 무려 1억 2천만 원의 카드 빚을 졌습니다.  자기 카드 사용이 막히자 여자 친구 아버지의 카드까지 훔쳐서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속칭 카드깡에도 손을 댔습니다.  부모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앙심을 품은 그는 자신의 가족까지 살해하는 패륜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채무의 문제입니다.  카드 빚으로 말미암는 범죄가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 현금 수송 차량을 훔쳐 달아나는가 하면, 젊은 가정 주부가 은행 강도가 되고 있습니다.  부채에 시달리던 50대 남자는 정신 질환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빚 때문에 자살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민 1인당 평균 카드 수는 대략 4장입니다.  2002년도에 한국에는 은행계 카드 회사 17개를 제외한 카드 전문회사만도 7 개나 된다고 했습니다.  이 7개 카드 회사들을 통해서 사용된 카드 결제 금액이 약 443조원인데, 그 중에서 현금 서비스가 약 268조 원으로 전체의 60%나 됩니다.  전국민이 채무자가 되고 있습니다.  2002년도 가구당 평균 부채는 3400만 원이나 됩니다.  젊은 층의 채무자가 폭증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별 소득도 없는 젊은이들이 여러 장의 카드를 발급 받아 은행돈을 마구 빌려 쓰고 있습니다. 
  채무는 무서운 것입니다.  채무를 갚지 않으면 평생 고통을 받습니다.  일단 빚을 지고 나면 반드시 갚아야 됩니다.  갚지 않으면 독촉에 시달립니다.  요즘은 채무 회수를 대신해 주는 용역 회사들이 생겼습니다.  이런 회사들은 점잖게 채무를 회수하지 않습니다. 가족을 협박하고, 보증인에게 압력을 행사합니다.  채무 변제를 않으면 재산을 압류 당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형사 처벌을 받습니다.  감옥에 갔다 나오면 부채가 없어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채권자가 요구하지 않으면 채무가 소멸되는 시효는 10년입니다.  그러나 채무자가 그 기간 내의 어느 때든지 채권을 요구하면 그 시로부터 다시 10년 연장입니다.  파산 신청도 그렇습니다.  일단 파산자가 되면 공무원, 변호사, 변리사 등의 중요한 자격을 상실합니다.  신원증명서를 떼면 파산자의 낙인이 찍힙니다.  자유롭게 이사를 다니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평생 채무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금전적인 채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두 번째 채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덕적인 채무, 양심의 채무, 죄의 빚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십시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여기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이란 구절은 어떤 사본에는 "형제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해서 "過失"이란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영문 성경(KJV)에는 "forgive...their trespasses"라고 번역했습니다.  "형제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이란 뜻입니다.  "過失"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παραπτωμα입니다.  바른 길에서 "벗어나다", 혹은 "미끄러지다", "탈선하다"의 뜻입니다.  즉, 도덕적인 범죄를 뜻합니다.  남의 돈을 꾸고 갚지 않는 것은 물질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더 큰 문제는 마음과 행실의 범죄입니다.  강도, 살인, 도적질, 사기, 매춘, 간음과 같은 명백한 과실이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해도 마음의 過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위선, 게으름, 교만, 음란, 시기, 질투, 미움... 
  은행 빚은 끌어안고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빚은 끌어안고는 살기 힘듭니다.  은행 빚은 갚으면 청산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빚은 어떤 방법으로도 청산이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후유증과 상처가 남습니다.  은행 빚은 파산해도 인간 관계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빚은 인간 사회를 완전히 깨뜨립니다.  결혼한 부부가 금전적인 빚을 지면 함께 떠 안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음 죄를 짓거나 서로 미워하면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기업이 빚을 져도 회생의 기회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주와 노동자가 서로 불신하면 회사는 아주 망합니다.  돈이 없어 가난한 백성이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백성은 반드시 망합니다.  은행 빚만 무서워하지 마세요.  도덕적인 빚이 더 무서운 줄 알아야 됩니다. 
  금전적인 채무는 사람을 경제적으로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채무는 인간 사회 전반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 사회를 보세요.  부부간의 불화가 돈 때문에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잘못된 언행, 잘못된 인격 때문에 일어납니다.  기업의 위기가 자금 때문에 나타납니까?  아닙니다.  부도덕한 처신 때문에 나타납니다.  社主가 비자금이나 조성하여 빼돌리고, 노동자들이 이기적인 투쟁에 매달리는 회사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정치적인 불안이 국회의 議席 數 때문에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부정 부패 때문에 일어납니다.  불법 정치 자금, 부정 축재, 뇌물 수수, 철면피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언동...이런 것들 때문에 정치가 불안한 거예요.  교회 공동체의 위기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예배당 건물이 없기 때문입니까?  예산 부족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고 하나님 말씀을 어길 때 교회 공동체는 분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가난도 아니고 신분도 아닙니다.  종교 의식이나 헌금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죄악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2)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위기는 경제 위기가 아닙니다.  바로 도덕적인 위기입니다.  바르지 못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용서하라 = 채권을 포기하라

  그러면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용서로써 풀어 가면 됩니다.  부부 갈등, 용서로 풀면 다 해결됩니다.  부모와 자식사이의 불신, 용서하면 풀립니다.  노사 갈등, 용서하면 풀립니다.  여야 정치 문제, 용서하면 다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로써 해결하셨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에 보면 "뉘우친 죄인"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 70세 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허랑방탕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해지자 그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주께서는 강도에게도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저도 좀 도와주십시오."  기도와 함께 그의 영혼은 떠나서 천국 문에 당도했습니다.  천국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는 누구인고?  이자는 생전에 어떤 일을 했던고?"  告發者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발자는 이 사람의 죄악상을 낱낱이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착한 일은 단 한 가지도 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죄인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  여기서 썩 물러가라!"  노인은 다시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목소리는 듣고 있지만 당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누구신지요?"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베드로니라!"  노인은 탄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님 나를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언젠가 당신은 주님이 괴로워하시면서 함께 기도하자고 세 번이나 간청하실 때에 당신은 세 번이나 잠을 주무셨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주님이 가야바의 뜰로 끌려 가셨을 때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셨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그 때 당신은 닭이 세 번 울 때에 통곡하면서 회개하셨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나를 천국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잠잠해졌습니다.  한참 후에 노인은 다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자는 누구인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고?"  다시 고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죄인의 온갖 나쁜 일을 열거했지만 착한 일은 하나도 대지 못했습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기서 썩 물러가라!  그런 죄인들은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살 수 없다!"  "주여, 당신의 목소리는 듣고 있지만 얼굴은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신지요?"  "나는 다윗이니라!"  죄인은 다시 하소연했습니다.  "다윗 왕이시여 나를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비천한 자리에서 왕이 되게 하셨고, 처자와 부귀 영화를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가난한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 때에 슬퍼하면서 죄를 뉘우쳤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나를 천국에 들여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한참 후에 다시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번에도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사람은 누군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고?"  세 번째도 나쁜 짓만 열거하고 착한 일은 하나도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당장 물러가라!  죄인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  노인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요한이니라!"  노인은 다시 용기 있게 말했습니다.  "이제야말로 나를 천국에 들여보내지 않을 수는 없으실 겁니다.  베드로와 다윗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알기 때문에 나를 들여놓아 주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많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나를 들여보내 주실 겁니다.  당신은 당신이 쓴 글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하신 말씀을 버리시거나 저를 천국에 들여보내 주시거나 양단 간에 결정해 주십시오!"  그러자 마침내 천국 문이 열리고 요한이 죄인을 천국으로 인도하여 들였습니다.  톨스토이 소설의 핵심은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악의 채무는 하나님의 용서로써 다 해결되었습니다. 
  용서의 본질은 채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 값을 탕감해 주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죄 값은 자기 아들에게서 받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주님은 우리에게 중심에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중심"이란 단어는 "καρδια" 즉, "심장"이란 뜻입니다.  "καρδια"는 모든 知性의 座所요, 영혼의 거처요,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합니다.  "용서"란 말(αφιημι)의 뜻은 "가게 해주다!", "거론하지 않다", "포기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남이 내게 진 빚을 거론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편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모든 채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정말 누구를 용서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채권을 포기하세요.  금전적 채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채권을 말하는 겁니다.  남이 내게 진 거짓말의 채권이 있습니다.  남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상처의 채권이 있습니다.  나를 억울하게 하고, 나를 미워한 마음의 채권이 있습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나를 고생시킨 감정의 채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세요.  다시는 거론하지도 마세요.  상대로 하여금 나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세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채권 포기가 없습니다.  채무는 철저히 외면하고, 채권은 최대한 주장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철저히 덮어두고, 남이 잘못한 것은 최대한 물고늘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요즘 정치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요즘의 기업이요, 요즘의 가정 아닙니까?  그러니까 화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대립과 다툼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 희생 없는 화합이 있을 수 없고, 양보 없는 화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공동체를 살리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남의 잘못은 덮고 내 잘못은 갚으세요.  두루뭉실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지 마세요.  진정한 용서는 채권 포기입니다.  진정한 용서가 있을 때에 비로소 모든 관계는 회복됩니다. 



탕감 받은 자임을 자각하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용서의 능력이 어디서 올까요?  용서의 능력은 주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은 분량이 얼마나 큰지 알면 무조건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얘기가 나옵니다.  어떤 임금이 품군들과 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일군이 너무나 많은 빚을 졌습니다.  무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엄청난 빚입니다.  당시 로마 정부가 전 유대땅에서 거두어가던 세금이 연간 800 달란트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계산할 때 일만 달란트는 현재 우리 돈으로 대략 3조 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노동자의 소득으로는 갚을 엄두도 내지 못할 빚입니다.  주인은 진노하여 처자를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품군은 참아달라고 합니다.  참아 주신다면 다 갚겠다고 합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참는다고 그 많은 빚이 갚아집니까?  주인은 채무자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빚을 다 탕감해 줬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갚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죄의 다소를 따지지 않고 전부 용서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타났습니다.  탕감 받은 품군은 돌아가서 자기에게 빚진 동료의 목을 잡아 끌어다가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가 받을 채권은 100 데나리온입니다.  액수로 따지면 자기가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의 60만 분의 1에 불과한 금액입니다.  자기는 60만 원 탕감 받고 단 돈 1원을 받으려고 동료를 붙잡아 가둔 셈입니다. 
  오늘 자신을 돌아보세요.  우리는 종종 "절대로 용서 못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과연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죄가 있습니까?  주님은 내 죄를 일만 달란트나 용서해 주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믿는 것 한 가지 때문에 내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히 100 데나리온의 채권 때문에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주님은 내 죄 때문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 죄 때문에 받지 않으셔도 될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조롱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쓰러지면서 올라가셨습니다.  양손과 양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에도 우리 죄만을 생각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일말의 채무도 없는 완전한 자유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완전한 의인 대접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남의 죄는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제의 잘못을 중심에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피차 불행합니다.  용서 못 받는 상대편도 불행하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더 불행합니다.  평생 내 영혼이 그 사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세요.  완전히 상대를 놓아주세요.  그러면 나도 자유하게 됩니다.  이제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남은 생애라도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서는 내 자신을 모든 매임에서 풀어주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신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묻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 값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화목은 용서에서 비롯됩니다.  사회적 화합도 용서로써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치도 용서로써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평생 죄만 짓던 살인 강도까지도 완전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용서 못할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이 용서의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축복 가운데 새 출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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