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정신 혁명을 일으키자 / 골 3:12-15

  • 잡초 잡초
  • 312
  • 0

첨부 1



      정신 혁명을 일으키자

본문: 골3:12- 15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저는 나태한 마음이 들 때마다“나는 고3이다”라고 스스로를 타이릅니다. 고3은 절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여행을 가고 싶어도, 이성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하자” 하고 참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래야 합니다. 쉬고 싶고, 놀고 싶어도 “천국 가서 하자”며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가져야 하는 종말론적 긴장입니다. 고3 학생이 다른 모든 즐거움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하듯, 우리도 이 세상사는 동안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에 우선 몰두해야 합니다. 해야 한다니까 할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여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어디서나 틀림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3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신경이 다른 일들로 분산되는 것을 막아야 보다 중요한 일을 성심껏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 받을 만한 사람들의 정신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다윗의 정신입니다.
다윗의 삶을 통해 몇 가지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그는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부를 때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을 알고 이새의 8명 아들 중 7명의 아들이 다 이새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형들에게 다 가라고 하고 자신은 들에서 양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코 다윗을 불러 축복하시고 지도자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불러 쓰십니다.
위대하거나 영특하거나 부자가 되지는 못해도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나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역시 충성된 사람입니다. 재주 있고, 학력 있고, 기술 있고, 머리 있지만 충성되지 않은 사람과 아무 것도 없어도 충성된 사람이 있다면 누굴 쓰겠습니까? 다 있으면 좋겠지만, 역시 충성이 가장 쓰임 받는 요건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의 충성스러운 정신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2.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했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삶의 가장 위대한 특징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왕이 되어서도 그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처럼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은 승리의 길이고 회복의 길입니다. 물론 다윗의 생애에도 큰 오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입니다. 그런 간음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사무엘하 11장 1절에 그 간접 원인이 있습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다윗은 언제나 싸움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기는 예루살렘에 한가롭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태만한 모습입니다. 대개 이러한 모습 속에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없이 한가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자꾸 딴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방심하고 게으르면 그것은 사단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나태함으로 인해 다윗은 밧세바와 죄를 짓고, 연쇄적으로 충복 우리야를 간접 살인하는 죄악까지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지적하자 그는 뭐라 반응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철저히 회개합니다. 사실상 다윗의 위대함은 골리앗을 쳐 죽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데 있었습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때로 잘못하고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실로 돌아서면 반드시 회복의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그는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를 그토록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그를 몇 번 살려줍니다. 나중에는 사울이 죽은 것을 알고 정말 그를 위해 애통해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를 보면 그가 권력이 강해지면서도 사울의 집안과 직접적인 마찰을 되도록 피하려는 모습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모습이 언뜻 보기에는 정말 어리석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 사울은 그를 그토록 죽이려 하는데 그는 그토록 피해만 다닐까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사울과 사울의 집안 문제를 하나님이 처리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민심을 얻고 심지어는 사울이 속한 지파로부터도 민심을 얻습니다. 만약 다윗이 직접 사울과 대적하려고 했다면 사울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부작용과 상처가 많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 면을 볼 때 결국 악을 선으로 갚는 길이 부작용 없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참으면 승리합니다, 용서하면 얻습니다. 인내하면 이깁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후부터 8년 후에 사울이 죽었고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울로부터 쫓겨다녔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 전체 왕이 되기까지 7년 반이 걸렸습니다. 15년의 고난의 세월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인내와 용서에도 한계가 있을 법 한데 그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결국 인내로서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인도를 반드시 기억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시편 37편에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행악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이와 같이 악을 선으로 갚는 자세가 있었기에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가끔 우리를 실망시키고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분들을 마음껏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진실로 축복 받게 되는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으면 저주가 임하고, 악을 선으로 갚으면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실망시킨 사람이 보이는 것은 축복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때 그분을 축복하심으로 그 절호의 축복 기회를 잡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충성, 믿음, 용서와 사랑의 정신이 넘쳐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호지민의 정신입니다.
내가 호치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평생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정독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입니다. 그는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여느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에 정적을 숙청한 적도 없었고, 자신을 우상화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호(胡) 아저씨’로 불리면서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입은 옷 한 벌만 남겼습니다. 메뚜기 같은 베트남 사람들이 코끼리 같은 미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도 지도자 호치민의 인격과 지도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심지어 남북 베트남이 적으로 싸우는 중에도 호치민의 생일이 되면 남쪽 국민들도 가게문을 닫고 북쪽 지도자 호치민의 생일을 기릴 만큼 그는 전 국민의 존경을 받았었습니다. 백성은 굶기면서 자신의 궁전을 짓는 다른 지도자들에 비하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3꿍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겨레를 위해 평생 동안 헌신하며 이 정신을 지켜왔고,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정신을 지도력의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함께 산다(꿍아). 둘째는 함께 먹는다(꿍안). 셋째는 함께 일한다(꿍땀)는 세 가지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도자가 백성들과 함께 먹고 함께 일하는 공동체 정신을 몸으로 실천할 때 온 국민의 역량은 통합되는 것이요, 난국을 헤쳐 나갈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호치민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특권을 누리지 않았고, 국민들과 동고동락함으로써 스스로 국가 통일을 이루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셋째.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정신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찍이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품고 미국에서 흥사단(興士團)이라는 인격수련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독립군을 만들어 일본군과 힘으로 맞서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독립국가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게 도산의 생각이었습니다. 또 그 일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라 올바른 뜻을 품고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세운 인격수양 단체가 바로 흥사단입니다. 흥사단의 기본정신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정의돈수(情誼敦修)요, 다른 하나는 무실역행(務實力行)입니다. 무실역행은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해 힘써 행한다는 뜻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도산의 사상입니다. 한편 정의돈수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도산이 무실역행에 앞서 내세운 참으로 귀한 정신입니다. 도산의 말을 빌면 정의돈수란 곧 '사랑 배우기'입니다. 사랑 배우기와 힘써 행하기, 곧 행함이 있는 사랑, 사랑으로 행하는 삶, 젊은이를 향한 도산의 모범적인 삶과 사상이 뼈저리게 사무치는 오늘입니다.

넷째. 간디의 정신입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급히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놀라 묻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발 한 켤레를 제대로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간디의 생애와 정신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으로는
1.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운동의 전개로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2. 금욕,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참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였습니다.
3. 천민 집단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면서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다섯째, 섬김의 정신입니다.
영국의 윌리엄 부스의 구세군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세계 도처의 남녀들이 구세군에 입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주교가 되려고 꿈꾸었던 한 남자가 구세군에 입대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무엘 브렝글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스 사령관은 처음에 그의 입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부스는 그에게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보스로 군림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브렝글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른 훈련병들의 군화를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이에 실망한 브렝글은 “내가 기껏 군화나 닦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렀습니다. 그때 환상 중에 거칠고 무식한 어부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려고 엎드리고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예수님! 그들의 발을 씻기셨군요. 그렇다면 이제 나는 저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그후 브렝글은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더러운 군화를 닦았으며 청지기의 사명을 깨닫게 됐고 충성스럽게 섬김의 도를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후에 미국 구세군 최초의 감독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두 가지 모범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만찬이요.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에 있는 여러 지체 중에서 무엇보다도 발을 씻기신 것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발의 말없는 그 섬김과 섬김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발을 씻어 줌으로써 복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의 일생이었고 그 마지막 십자가상의 죽음은 섬김의 절정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기독교 역사상 모든 안수는 주로 머리에 이뤄졌습니다. 이는 구약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안수하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발을 씻기심으로 발에 안수하셨습니다. 이는 목회자의 권위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있음을,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음을 깨우쳐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섬김의 정신입니다. 체면과 권위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에 물들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정신인 이 섬김의 정신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참된 권위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발바닥 인생을 사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이 발바닥 같이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을 요청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13:14)
1940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오산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스승은 민족운동가 조만식 장로였습니다. 주기철이 후에 목사가 되어 목회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주일날 주 목사가 예배를 인도할 때 스승인 조만식 장로가 늦게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자 주 목사는 "장로님, 오늘은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그대로 했을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그 날 참석한 많은 성도들은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칭찬했습니다. 자주 민족독립은 이런 분들의 정신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여섯째. 불굴의 도전정신입니다.
마르코니는 전선을 사용하지 않고 소리의 진동을 전달하는 에테르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성공하여 세상에 최초의 무선통신을 선사할 수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4륜 운송기구를 저렴한 비용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포드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자동차를 만들어내어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라듐이라는 금속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전까지 아무도 라듐을 본 적이 없었고 어디에서 라듐을 찾아야 할지 몰랐지만 꼭 찾아내겠다는 집념을 가진 퀴리는 마침내 라듐의 근원을 밝혀내고야 말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확신이야말로 분명한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그리스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을 잘하는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상아로 여성상을 조각했는데, 너무나 멋지게 조각된 나머지, '이 여성상을 현실의 여성으로 변하게 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아프로디테 신은 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기대를 하고 있으면, 그것에 부응하는 현상', 이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라 부릅니다. 우리가 꿈과 희망을 가지고 불굴의 정신으로 계속 전진하면 대개 그 소원을 성취하게 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는 우리들 속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정신 혁명" "심령의 변화" "의식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마다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군인은 군인 정신을 가지고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농부는 농부의 정신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학생은 끝없이 탐구하는 학생의 자세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 혁명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정신에서 새 사람의 정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정신에서 반석 같은 신앙정신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새롭게 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의 체제나 구조를 뜯어고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체제나 구조를 운영하는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다면 두 번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 차례 혁명도 치렀습니다. 어이없는 군사독재 시대도 지냈고 문민정부, 열린 정부 시대가 되었다고 그렇게 기뻐하며 소망 중에 기다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크게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어긋나는 데서 오는 실망감, 배신감 같은 것마저 느끼는 현실입니다.
부조리는 여전하고 부정과 부패는 그 단수를 달리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정신의 혁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구조와 정신자세, 사고방식과 성격구조를 바꿔놓는 정신 혁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신의 혁명이 따르지 않는 체제개혁이나 구조변혁은 아무리 해봐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옷을 바꿔 입는다고 그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돼지를 잘 씻기고 목에 리본을 달아서 방에다 들여놓아 보십시오.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고 맙니다. 그것이 그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환경을 변화시켜도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마침내 다시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즉 새 마음을 가지지 않는 한 얼마가지 아니해서 낡은 폐습과 낡은 풍토로 다시 후퇴하고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외부의 혁명이 아니라 내부의 혁명입니다. 인간 자신이 달라지고 정신이 바뀌기 전에는 외적인 변화나 혁명으로는 큰 결실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정신을 혁명할 수 있습니까?
인간 존재의 중심핵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거듭나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낡은 사람을 그대로 두고 아무리 겉의 체제나 구조를 바꾸어 보아도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사람, 인간의 깊은 뿌리를 새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정신의 혁명입니다. 종교는 여기에 목표를 둡니다. 우리는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 이기심과 탐욕과 거짓과 게으름과 교만과 증오의 감정이 깊게 뿌리를 박고 있는 한 아무리 겉의 체제나 조직을 바꾸어도 무엇이 좀 되는 것 같다가도 결국은 유야무야한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회칠한 무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얗게 회칠한 무덤은 겉에서 볼 때는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썩은 송장의 더러운 냄새와 무서운 부패균이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우리 국민의 정신이나 생활이 회칠한 무덤과 같지는 않습니까?
우리 마음의 밭에 새로운 생명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진실과 오래 참음, 근면과 절제, 화목과 긍휼, 사랑과 희락, 온유와 겸손, 양선과 충성의 새싹을 심어 새로운 마음의 밭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 하나 하나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물질의 건설에만 급급하지 말고 정신의 건설에 힘을 씁시다. 그래야 우리가 바로 살고 잘 살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크리스천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시발점은 정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 이상 큰 변화와 큰 혁명과 큰 개혁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의 심령 변화와 정신 혁명처럼 소중한 것이 달리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하는 것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내가 사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우리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 따라 떠내려갑니다. 죽은 정신은 세상 물결에 멀리 떠내려갑니다. 그러기에 히브리기자는 너희 중에 세상 물결에 흘러 떠내려가는 자가 있을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히2:1)
그리스도인들은 산 물고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산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리심이라"(빌2:5-11) 그리스도의 정신이 나를 구원했고, 우리 모두를 구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 크리스천들이여,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자복하여 회개하고, 우리의 마음 밭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고, 아울러 세상 모든 민족의 마음속에도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정신혁명의 기수(역군)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와 같은 정신을 알고 있지만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을 맞아서 주님의 이 정신을, 이 성품을 우리도 좀 닮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에 병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모든 죄인들을 주님 앞으로 구원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도 이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쌀과 헌금을 모으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계절에 작은 믿음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북돋워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서 상한 갈대, 감옥에 갇히고 억울하게 밟힌 불쌍한 이들을 함께 붙들어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 국민의 정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