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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있어 기도하라 /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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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가복음 14:32-42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연구한 책 중에 스티븐 코비 박사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1. 주도적이 되어라. 수동적이 되지 말고 능동적으로 주도하라. 2.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3.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4. 상호의존의 패러다임을 가져라. 함께 승리하는 윈윈(win-win) 방법을 생각하라. 5. 먼저 자신이 이해하고 난 다음에 남에게 이해시켜라. 6. 시너지 효과를 내라. 7.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하라.

반대로 미국 ‘뉴욕타임스’지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 로라 슐레징어 박사는 상담을 하면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변명을 찾아내어 ‘인생을 망치는 7가지 변명’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가정과 직장, 연애뿐 아니라 잘되던 일도 망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7가지 말이 무엇일까요? 로라 슐레징어 박사는 서두에서 인생은 힘들 때가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그 많은 변명과 핑계만 늘어놓을 것인가 반문합니다. 7가지 변명이란 1.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인간이라고요. 2. 그게 잘못이란 걸 알아요, 하지만…… 3. 그게 옳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4. 알고 보면 나야말로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5. 나도 한때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고요. 6. 그런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요. 7.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끌어 올라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비탄 가운데 젖어 세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십니다. “내가 너무 힘들다. 너희들이 위하여 여기 깨어서 기도하라.”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예수님은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다 와서 보니 제자들이 다 쿨쿨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셔서 “깨어라, 깨어라, 깨어라. 정말 나와 함께 잠시도 깨어서 나와 기도할 수 없더냐. 잠깐만이라도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할 수 없더냐.” 말씀하시며,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라.”

결국 그들은 주님의 충고도 무시하고 잠으로 그 시간을 다 채워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전개되는 사건의 결과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정점이 되는 십자가 사건 앞에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쳐진 반면, 잠을 잤던 세 제자들은 가장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실패자의 모습으로 오늘도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은 제자들은 어려움을 모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너 왜 신앙생활을 그렇게 했니? 왜 그렇게 살았니?”라고 주님이 물으신다면 “주님, 저는 가난했잖아요.” “저는 어려웠잖아요.” “저는 연약했잖아요” 등등 여러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명을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주님께서 수없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고 경고하시고 깨우쳐 주셨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해요. 내 속에 희망이 없어요. 하나님 기쁨이 없어요. 기쁨을 주세요.’ ‘하나님 곤고하고 어려워요. 가진 것도 없고요 많이 지쳤어요.’ 그러면 가장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주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 여러분의 손을 붙잡으실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을 데려가는 곳이 있을 겁니다. 바로 이 땅에서 당신의 문제를 풀어가셨던 겟세마네 동산, 기도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주님께서 본문 말씀과 더불어 우리도 데려가기 원하시는 데는 몇 가지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많은 부분이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기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복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고난과 어려움 앞에 당당히 서기를 원하시고 축복을 축복으로 누리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완벽한 삶, 풍성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기도로 사셨고 기도로 완성하셨기에 기도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제자들을 선택할 때도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지치고 힘들 때도 기도함으로써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두고 5000명을 먹여야 하는 절대한계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우러러 축사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녀를 데려와 당황하며 부르짖는 그 안타까움에도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 나타남이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의 중압감이 밀려올 때도, 자신의 앞길이 막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죽은 나사로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심으로 환희와 축제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 중 가장 어려웠던 십자가를 앞둔 순간에도 변함없이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 기도의 자리로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자는 모습을 보시고 깨우시며 기도하라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싶은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떠나기 전, 죽기 전에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절망 가운데 한숨 쉬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것을 바라셨습니다. 기도만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그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이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늘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먼저 구해야 할 것과 나중에 구할 것 즉 구함의 우선순위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든 영광이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진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를 풍요로운 삶으로 안내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기도할 때 주의사항과 얻는 축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말씀하실 때마다 기도 응답에 관해서도 반드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환경도 바꿀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를 바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속에 하나님 임재를 체험합니다. 능력의 주님과 교제하는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모든 문제를 기도로 풀어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문제를 해결합니까.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권세 있는 사람은 권세로 풉니다. 당회를 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어떤 안건이 나왔을 때 교수님은 “연구합시다!” 하시고, 사업하는 분들은 “융통성 있게 합시다!” 그럽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틀로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 합니다.

이런 우리의 실존은 베드로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힐 때 베드로는 칼을 휘둘러 아무 힘없는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뜨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실존을 지적하시면서 “베드로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이 보여주는 많은 무기 앞에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주님의 그 말씀대로 일본은 패망하지 않았습니까. 화약으로, 총으로 시작한 그들은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마쳤습니다. 힘으로 얻은 자는 반드시 힘으로 곤욕을 치르게 돼 있습니다. 지금 중앙아시아에 일어나고 있는 권력의 변화를 보십시오. 힘으로 일어난 자가 힘으로 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돈도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물질이나 힘을 사용하셨더라면 지금 우리도 같은 방법을 썼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며 기도로 하셨습니다. 가장 완벽한 인생을 살았던 주님, 가장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남겼던 주님, 그 주님이 살아가신 삶의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힘으로 나가기 전에 기도하는 자리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분개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자리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앞으로 살아갈 인생 여정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 있지요? 살아보세요. 만만치 않습니다. 내 앞에 다가오는 어려운 문제 앞에 주저앉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존심 상할 일도 많습니다. 한계상황이 벌어질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의 손을 붙들고 겟세마네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주님께서 제자들을 겟세마네로 데려가신 이유는 영적으로 승리하는 길을 알려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두려웠고 무서웠습니다. 부담스럽고 또한 고통스러웠습니다. 제자들을 깨우러 세 번이나 확인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주님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피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끊임없이 자기 육체의 소리와 환경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5장 11~12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 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봅니다. 당신이 죄를 지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야 많은 생명이 살아나고 구원 얻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그때부터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십시오. 감당할 능력을 주십시오. 이것이 진정 내 인생을 만드시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이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저를 승리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 삶에서 육이 이길 수도, 영이 이길 수도 있습니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흰 개와 검은 개가 있습니다. 이들이 싸운다면 어떤 개가 이길까요? 정답은 ‘그 동안 잘 먹인 개가 이긴다’ 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내 영과 육체의 소욕을 듣는 내 판단이 대결할 때 어느 것이 이길까요? 마찬가지로 평소에 많이 먹인 것이 승리합니다. 우리 영을 위해 쓰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께서는 육체가 우리 속에서 승리하면 결과는 파멸과 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음란과 도적질과 다툼과 분노와 무정함과 배신과 그리고 나누어짐 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그 마음이 승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고 순종할 뿐 아니라 그 순종할 수 있는 힘도 바로 기도를 통해 공급 받습니다. 41절 말씀을 보면 조금 전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이제 됐다고, 그만 돌아가자고. 이젠 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십니다. 고뇌하시던 주님이 하늘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는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여 이제는 그 걸음걸음이 당당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겟세마네 이후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당당한 주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캐리는 세계가 선교에 대해 아직 눈 뜨지 않았을 때, 인도 선교사로 자원해서 갑니다. 42년 동안 활동하면서 수많은 고초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죽음의 유혹도 받았습니다. 부인은 거의 정신병자가 될 정도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재정난에 허덕이면서 곧 주저앉을 것 같은 일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 사람과 함께 숙원사업이던 인도 45개 방언으로 말씀을 번역해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자던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 가슴을 선교사역의 불로 뜨겁게 한 사람입니다.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한 사람이 찾아가 “당신은 지치고 힘든 고난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이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저는요, 하나님 뜻 그 이하도 이상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 삶 속에서 하나님 뜻만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이곳에 보낸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내 육체와 환경이 주는 소리와 싸워 이기고 하나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 뜻만 바라보았습니다.” 순간마다 삶 속에서 육체가 주는 소리를 끊어버리고 그 음성 앞에 순종한 윌리엄 캐리, 그는 고난과 고초가 많은 생애였지만 마침내 하나님 무대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고통이 찾아오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세신바 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고통은 찾아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체 또는 영혼의 고통이 다가올 때에 고통을 주신 하나님 뜻을 안다면 훨씬 더 이기기 쉬울 것입니다. 고난 앞에 육체의 소리를 듣고 좌절하고 절망하여 죽음으로 매듭짓지 않고 나를 살리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주님 뜻 앞에 오늘도 순종하고 나아가는 삶, 그 삶 속에 승리가 있지 않을까요.

윌리엄 캐리의 전기를 쓴 작가는 어떻게 윌리엄 캐리가 열정을 가지고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캐리에겐 몸 약한 누나가 있었습니다. 누나는 인도를 떠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윌리엄,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구나. 나는 병상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몸이라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밖에 없구나.” 전기작가는 윌리엄 캐리의 위대한 사역 배후에 있는 ‘기도밖에 할 수 없는 한 여인,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여인, 기도 외에는 자기존재를 발견할 수 없는 여인’에게로 초점을 맞췄습니다. 누나의 기도 속에 윌리엄 캐리가 사역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음을 전기작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캐리의 누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 앞에서 자기가 왜 나약한 모습으로 일평생 누워 지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풍성한 삶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라면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향한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뜻을 찾는 사람은 인생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무대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그 뜻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고난이 그를 덮쳐버릴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죽음으로 끝나버립니다.

남들보다 생활이 풍요롭고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모든 것 허락하신 의미를 찾지 못하면 축복은 저주가 됩니다. 축복이 축복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 고통 속에서도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는 지혜, 영적으로 승리하는 길, 그 길은 기도에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말씀은 네가 무엇인가에 크게 눌려 있구나, 누가복음을 보면 ‘근심하고 슬퍼했다’고 돼 있습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눌려 자기 신념의 틀 속에 꼭 박혀 있었습니다. “난 새벽 체질이 아닙니다. 난 야행성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라는 말은 내게 순교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전 새벽에 나오면 하루종일 정신을 못 차려 직장생활을 잘할 수 없어 주의 영광 가립니다. 잠 푹 자고 직장에 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에 묶여 있습니까. 일년에 두 차례, 그것도 한 두 주간 새벽시간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고 해서 여러분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까. 그것이 여러분 믿음의 삶을 중단시킬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줍니까.

주님께서 조건과 상황에 따라 우리를 구속하셨다면 구원 받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내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달려와 들으시고 해결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풍성한 삶을 원하시기에. 오늘 여러분이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 육체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를 겟세마네로 초청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겟세마네로 데려가신 이유는 기도할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아무 때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기도할 시기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시키시는데 두 번이나 깨워도 계속 잡니다. 41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에게 와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됐다. 이젠 됐다. 이젠 기도할 필요도 없다. 기도할 이유도 시간도 없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자 이제는 들어가자!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그 문제를 잘 풀 수도 있지만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 로마군대를 상대로 싸우다가 로마군은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비무장 상태인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짤라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으로 서 있었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것이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그는 잊어버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이 자고 있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의 이름을 다 부르지 않고 ‘베드로야’ 하셨습니다. 성경책에 그렇게 쓰여 오늘날까지 전해질 줄 알았다면 베드로는 억울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만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앞장에 보면 “주님, 다 배신한다 해도 저 그럴 사람 아닙니다. 주님 저를 잘못 보셨습니다. 이 뜨겁게 찬양하는 이 모습 보십시오.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이 모습 보십시오. 주님께 헌신하는 이 모습 보십시오. 입으로 선포하는 이 담대함을 보십시오. 주님.” 이렇게 베드로가 호언장담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러고 싶지. 베드로야. 그 마음은 내가 이해한다. 그러나 기도 없이는 하지 못한단다.”

행복하고 싶지요? 여러분, 인생 승리하고 싶지요, 사랑하고 싶지요, 이 젊음을 하나님께 아름답게 드리고 싶지요, 허튼 데 시간 쓰지 않고 촌음을 아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를 보내신 목적을 이뤄드리고 싶지요? 그러나 기도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잠으로 기도할 시간을 채운 베드로는 그 상황과 현장 속에 실패자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작은 계집아이의 말 앞에 굳게 맹세한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흔들리고 요동합니다. 위기를 극복할 지혜도 능력도 사랑도 다 놓쳐버리고 시험과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 발로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감 안 나시겠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 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감당할 수 없는 일,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십니까. 기도로 준비할 기회를 놓쳐버리면 시험으로 남게 됩니다. 상처로 남게 됩니다. 좌절로 남게 됩니다. 기도로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아름답고 존귀한 모습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10명의 처녀, 그 중 5명은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나머지 5 처녀는 기름을 구하러 갔습니다. 갔다 오니 잔칫문은 이미 닫혔습니다. 노아 홍수를 보십시오. 120년 동안이나 배를 지으며 사람들을 초청했지만 그들은 콧방귀만 뀌었습니다. 비가 오고 홍수가 나서 방주가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방주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전도서 3장 1절에서 8절을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16장 19절을 보면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얼마나 하십니까? 지혜로운 선택, 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이 이 땅에 나 보내신 목적을 이뤄드리는 선택을 얼마나 하고 계신지 묻고 계십니다. 선한 일에 지혜로우라 말씀하십니다. 악한 일에 미련하라 이야기합니다. 정작 우리는 악한 일에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에베소서 5장 15절과 16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지혜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지혜를 가지고 자기의 시간, 때를 적절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깨닫고 이에 자신을 맞춰서 살아갑니다.

언제 우리가 기도로 준비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었습니까. 한 해를 살아왔습니다. 올 한해만 해도 나와 비슷한 연령에 있는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죄가 많아서 먼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나를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살려주신 하나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선 자매가 53%의 화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자기보다 훨씬 덜한 화상을 입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왜 절 살려주십니까?”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이 땅에 왜 하나님 나를 남겨두셨습니까. 또 한 해를 선물로 주시려고 하시는 주님, 내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왜 주님은 2004년에도 나를 살려두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가 주님 앞에 올려드릴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장년층 실업자도 문제지만 청년실업이 더 큰 문제입니다. 꿈을 안고 출발해야 할 청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 없습니다.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한 한 자매가 미화원에 지원해서 16.5대 1의 경쟁률로 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첫 사회 진출부터 꺾이면 인생을 바라보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것은 측정되지 않는 엄청난 손실입니다.

우리나라 경제구조를 보십시오. 제조기업들이 중국으로 계속 이전하고 있습니다. 경제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이 북한을 잡기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이용하면 우리나라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데올로기 싸움에서도 이미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을 사랑하되 지혜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저들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대비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끌어안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한반도가 공산주의로 통일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 말씀으로 주님이 다스리는 의와 희락과 평강의 나라가 될 때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나라든 간에 그 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강이 있다고 믿는 것 아닙니까.

남과 북이 정말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 싸움이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의 간격이 더 벌어질 것입니다. 북한은 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사랑하기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두고 양보하지 않으며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양쪽이 다 망해야 정신을 차릴 것만 같습니다. 물리적인 벽에 부딪히기 전에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이겠습니까.

노동자도 고용주도 양극단으로 대치합니다. 요즘 자기 주장 굽히는 사람 있습니까. 자기 보기에 좋고 옳으면 기본적인 틀도 뒤바꿔 몰아붙이려는 것이 요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바른 질서와 순종의 길로 가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청소년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양로원 갈 때쯤 양로원에 쌀을 지원해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세대입니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에게서 이 민족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 속에 무엇이 보입니까. 음란물 앞에 무너지는 동심, 돈 앞에 정조를 파는 여중생,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양심을 잃고 쾌락을 쫓아 오늘도 생각하기 싫어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편하게 살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은 수많은 욕구, 바로 병든 어른의 모습을 찾기가 훨씬 더 쉽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민족의 절망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해야만 될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희망을 다시 노래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주님께 이 문제를 안고 기도할 때 제 손을 붙들고 겟세마네로 이끄시는 주님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지난 한 주간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당파도 많습니다. 이웃 나라에게 수없이 침략당했습니다. 역사책을 보면 찢어지고 잉크 묻어 읽을 수 없는 역사, 아픔의 역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어떻게 우리 미래에 희망이 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단지 멸망의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까요. 희망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 민족을 부여잡고 겟세마네로 가는 젊은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내 인생의 미래를 안고, 깨진 내 가정의 아픔을 안고, 부숴진 이 사회의 갈등과 다툼과 상처를 안고 나아가시지 않겠습니까. 겟세마네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이끄심 앞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고 그 자리를 지키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주님, 오늘 또다시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고민하십니다. ‘나와 함께 겟세마네로 가자.’ 예수님이 가장 힘들고 절망하며 앞날을 알 수 없던 그 순간에 계시던 자리,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에 함께 가자 초청하십니다. 주님의 초청 앞에 함께 나가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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