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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막 6: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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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성  경 : 마가복음 6:30~44절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 이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행1:6).

이스라엘의 회복은, 제자들의 알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능력 받고, 내가 은혜 받고, 내 문제를 내가 알고 대처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시급한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영혼이 병들고, 궤도에서 이탈해 있는 나의 삶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내 자신을 바로 아는 知分(지분)의 삶입니다.  그리고 나의 분수를 지키는 守分(수분)의 삶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들의 어그러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오늘 예수께로 나아가야 하는가?


Ⅰ. 예수 안에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1절에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집으로 가니 무리들이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고 했습니다(막3:20). 

본문 31절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삶은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의 빈 그물 인생처럼, 소득 없는 삶을 살면서도,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 뛰고, 뛰고 또 뛰고 -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늘 피곤하고, 늘 지쳐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쉬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셨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안식일, 휴식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휴식은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인간은 휴식을 통해서 새로운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길을 가는 나그네는 잠시 머물 수 있는 객사를 찾고, 항해에 지친 선원은 항구를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노동을 명하셨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라고 하셨습니다(창3: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 4계명인 안식일 계명을 주시면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하셨습니다(출20:10).  그리고 안식일을 축복하셨습니다(사58:14).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엿새는 일하고 하루는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의 빗나간 열심은, 이 생의 질서를 스스로 파괴함으로, 곤비한 가운데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11:28).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일어도 안전한 포구”라고 했습니다(찬464장).
수고의 짐, 무거운 죄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쉴 곳은 오직 십자가 앞입니다.


Ⅱ. 예수 앞에 나아갈 때 영혼의 양식을 받습니다.
본문 34절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했습니다.

양은 어떤 짐승인가?  스스로 꼴을 찾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스스로 방어할 줄 모르는 짐승입니다.  비가 와서 몸이 물에 젖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두워져도 제 집을 찾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벳새다 광야에 모인 군중들을 “목자 없는 양 같다”하셨으니,  그들은 목말라 있고, 굶주려있었던 것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의 말씀에 “보라 날이 이른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벳새다 광야에 왜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는가?  영혼이 갈증을 느껴서-, 영혼이 기갈을 당하여서 예수님 앞으로!  예수님 앞으로 모이다 보니 5천명이 모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마4:4).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의 갈함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하셨습니다(요14: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48).

예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생명을 받고,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 것 다 가졌는데 만족이 없습니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공허함이 있습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하십니다(사55:3).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영혼의 생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Ⅲ. 예수님 안에 만족이 있습니다.
본문 42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소유는 얼마나 되는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한 사람의 한끼분 양식입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너무나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가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요6:9).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소유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물질 뿐만이 아닙니다.  건강이 그렇습니다.  감기겠지, 소화불량이겠지,  그래서 동네 의원에 가보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합니다.  지식이 그렇습니다.  무엇 좀 아는 가 했더니, 어느 날엔가 돌아보니 아무 쓸모없는 케케묵은 낡은 정보입니다.  마치 창고 구석에 팽개쳐져 있는 타이프라이터 같은 것입니다.

실로 끈기 없는 보리떡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고 쓸모없는 것이 예수님의 손에 넘겨지니 5천명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넘치도록 남았습니다.  예수 안에 만족함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 기쁨도, 축복도, 사랑도 풍성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천명이 배부르게 만족하게 먹었습니다.  그러면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치는 풍성한 양식은 누구의 몫입니까?  아마도 그것은 예수님을 수종든 종들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작은 것 드려 충성하시고 바구니에 차고 넘치게 거두시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땀 드려, 몸 드려 충성하시고, 풍성한 건강을 거두시는 성도님 되시기 바랍니다.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치는 은혜와 축복이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의 몫 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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