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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의 권위(벧후 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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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후서 1장 19-21절
*제목: “성경의 권위”
*설교자: 피영민 담임목사

“19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
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20먼저 알 것
은 경의 모든 21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서론)

  저는 지난주의 설교를 통해서 사도 베드로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
한 예언을 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되고 
그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며, 반면에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는 사망의 부활로 일어나서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
라고 사도 베드로는 증거하였습니다. 이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향하여 다음
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여보시오? 사도 베드로여,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진리
라고 증명할 증거가 있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모든 예언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변증하기 시작합니다. 
 
그 변증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먼저는 제가 지난 수요일 저녁에 설교한 것처
럼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일어난 신비한 사건을 자신이 직접 보았고 들었다는 경험과 
감람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에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는 
천사들의 신령한 음성도 직접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의심을 
품고서 질문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는 보고 들었으므로 
그대로 증거한다’고 담대히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베
드로의 첫 번째 변증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베드로의 두 번째 변증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
서 저자인 베드로는 예언이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말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베드로는 성령
의 영감성을 근거로 해서 자신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진리임을 주장하고 있습니
다. 본문 20절을 보시면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라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처럼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말씀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
정과 사고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해서 영감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이 시간 선포되어지는 설
교를 통해서 확실하게 깨닫고 신뢰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1. 예언의 의미

  우리가 이 말씀을 상고하기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예언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문자적으로 예언이란, 미리 ‘예豫’자
를 써서 앞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행에 가서 돈을 예금할 때에 사용된 ‘예’자는 미리 ‘예’자가 아닙니다. 
그 ‘예’자는 맡길 ‘예預’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언도 맡길 ‘예’자를 사용해서 하
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예언이
란 과고와 현재와 미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말씀은 모두 예언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을 보면 예언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권
위에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시대에 속한 모든 사람이 다 믿어야 되는 규범성을 갖고 
있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어떤 특정 시대에 살고 있는 특정한 사람에
게만 해당되는 성령의 은사적인 활동의 예언이 있습니다. 은사로써 하는 예언은 절대
적인 권위를 소유하고 있는 성경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권위가 없
습니다. 그 예언에는 성경과 같은 권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은 성령께서 자신의 영혼에 어떠한 즉흥적인 인상을 주실 때에 그 인상을 말하
는데 그때에 그 성령께서 주시는 인상이 그 사람의 영혼상태와 혼합이 되어서 선하게 
증거될 수가 있지만, 또 다른 반면으로는 잘못된 예언으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가 있
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은사를 받아서 하는 예언은 성경처럼 
절대적인 권위가 없음을 인식하고서 단지 멸시하지 않는 정도의 태도를 보이면 됩니
다. 또한 그러한 예언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서 받아들
일 것은 받아들이고 배격할 것은 지혜롭게 배격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었으면 합니
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예언은 절대적인 권위를 소유하고 있
습니다. 그 예언은 모든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규
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의 20절 말씀을 보면,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경은 성경
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 20절에 나타난 예언은 성경의 일부분으로서의 예언입니
다. 동시에 모든 시대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규범적인 구속력을 행사하는 예언을 의미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예언은 무엇일까요? 우리 모
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예언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예언은 바
로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야말
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든 아니면 과거에 살았고 미래에 살고 있을 사람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지는 규범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경의 모든 예언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
기에 지금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예언은 성경의 한 부분이며 성경과 똑같은 구속력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신령한 예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성령의 역사가 자꾸만 임해서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마치 구약시대의 선지자 예레미야나 다니엘이나 에스겔이라도 된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다니면서 예언의 은사를 자랑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신령한 예언
자로 인정하고 그 예언에 순종하기 보다는 그 사람을 교만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예언
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선지자는 그 예언이 
곧 성경의 예언이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규범적인 예언이지만 은
사를 가진 특별한 개인이 말하는 예언은 즉흥적인 영감을 갖고서 하는 예언이요 모든 
사람에게 규범을 미치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
이 하는 예언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지금 사도 베드로가 주장하고 있는 성경의 예언은 
그보다 억만 배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교회
의 모든 성도님들은 사람의 이상한 이야기를 무조건 좇아가지 마시고 오직 성경의 예
언만을 믿고 따라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은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요 신약성경
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만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재림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
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가장 확실한 예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 21절의 말씀을 통해서 예언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
임이니라” 또한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
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처럼 모든 예언도 성령의 영감을 받았고 모든 성경도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되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본문 20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문제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 말씀은 극히 짧은 말씀이지만 이 한 구절은 기독교 역사상 
해석학적인 면에 있어서 가장 충돌이 많았던 부분입니다. 소위 ‘사적 해석권’에 관
한 문제입니다. 이 구절만큼 교회 역사상 해석과 의견이 분분했던 말씀은 없습니다. 
우선 로마 카톨릭은 이 구절을 인용해서 평신도의 성경 해석권을 박탈하였습니다. 평
신도들이 성경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자유롭게 읽고 해석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고 
불경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13세기 초에는 유럽의 평신도들 가운
데에 ‘왈도파’, ‘알비겐’파가 일어나서 로마의 가톨릭의 처사에 반발하여 개인적
으로 성경을 소유하고 해석하는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은 이 같
은 운동을 주도하는 단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을 연구한 사람들이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었고 
로마 카톨릭을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 그레고리 9세
는 1229년에 툴로스 종교회의를 소집하게 되었고, 평신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성경
을 소유하지 못하고 개인이 성경을 읽고서 해석하지 못한다는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교황과 사제단만이 성경을 소유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참으로 어처구니
가 없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의 카톨릭 평신도들은 성경
을 개인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그 변화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 일어
납니다. 1960-65년 사이에 바티칸 2차 공회가 열렸습니다. 이때에 로마 가톨릭에 혁신
적인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서 평신도들에게도 성경을 소유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리
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평신도들도 개인이 자유롭게 성경을 소유하고 읽
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로마의 카톨릭은 무려 800년 동안이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개신교는 카톨릭보다 훨씬 늦게 탄생을 했지만 평신도들에게는 성경을 
개인이 소유하고 읽고 해석하는 것이 자유롭게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성경
을 마음껏 읽고 해석하고 삶에 자유롭게 적용하였습니다. 성경의 해석에 관한 의견 차
이로 인해서 수많은 교단들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한 성경을 믿고 있지만 해석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교단들이 생겨나서 장점과 단점도 많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같
은 현상을 카톨릭은 지금도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적으
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다가 조금 그릇된 해석을 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대한 사적 해
석권을 갖는 것이 훨씬 더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은 틀리게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해석하다가 보
면 언젠가는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로마의 
카톨릭은 성경보다도 교황이 만든 교리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인정하고 있습니
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20절을 해석하는 로마 카톨릭의 해석은 가장 독재적이고 가
장 군주적이며 본문의 문맥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해석이고 본문의 의도와는 완전
히 상반된 평신도들의 성경해석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는 
구절의 정확한 해석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어떤 분은 우리 침례교의 입장은 로
마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중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사람은 성경과 역사를 잘못 배운 사람입니다. 우리 침례교는 카톨릭과 완전히 다릅
니다. 우리 침례교는 엄연한 정통 개신교입니다.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성경적이며 가
장 개혁적인 교단입니다. 개신교 중에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등 많은 교단들이 있지만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침례교가 가장 성경적인 교단임을 저
는 자신 있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침례교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침례교는 그 옛날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웠으며 그로 인해서 침례교만 피를 흘리
고 다른 교단을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역사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는 학설에 불과합니
다. 이것을 가리켜서 소위 ‘피 흘린 발자취 사관’이라고 하는데 이같은 감상적인 사
관은 우리 침례교에서 사라져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 침례교는 개신교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개신교입니다. 

  본문 20절을 해석할 때에 개신교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
이 풀 것이 아니니”라는 구절에 대해서 ‘예언이란 오직 실현된 이후에만 그 의미를 
알 수 있기에 실현되기 전에 사람이 해석하는 것은 사사로운 해석이다’ 그러므로 예
언이 실현되기 전까지는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펼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예언은 한 가지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전체의 예언과 조화를 이루어서 해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한 가지만 가지고 해석하는 일은 사사로운 해석이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예언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성령
의 조명을 받아서 해석을 해야지 그렇지 않고 성령의 조명이 없이 해석을 해서는 절대
로 안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예언한 관한 이러한 모든 주장들은 로마의 카톨릭을 제
외하고는 저마다 약간의 진리를 내포하고는 있습니다마는 그것들 역시 본문의 해석에 
관한 정확하고도 올바른 해석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대한 가장 성경적이면서도 올바른 해석은 바로 21절의 말씀을 통
한 해석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예언은 선지자가 사사로이 푼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주관과 생각을 통해서 예언 하는 것이 아니라
는 뜻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 20절의 가장 정확한 해석은 바로 성경에 나타난 모
든 예언은 그 예언을 말하는 자가 사사롭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에 대해서는 21절이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보실까요? “예언은 언제든
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
아 말한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
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만들어졌음을 믿으시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자들의 머리가 아주 뛰어나서 예언을 기록한 것이 절대
로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오랜 묵상과 연구와 통찰로 인해서도 예언이 기록된 것이 결
코 아닙니다. 이사야서 53장을 보시면 선지자 이사야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
님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뛰어난 머리와 오
랜 묵상을 통해서 기록되었을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또한 시편 22편을 보십시오. 여
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님에 대해서 다윗이 너무나 정확하
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을 다윗이 미리 알고서 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
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고 있는 예언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하심
이 다윗에게 임하게 되었고 그 신비한 능력으로 인하여서 다윗이 인류의 죄를 속죄하
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그토록 정확하게 예언을 할 수가 있
었습니다. 

  또한 선지자들은 자신이 하기 싫어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강제로 예언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대표자입니다. 유다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할 때에 예레미야는 수많은 백
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유다의 백성들이여 우리는 바벨론에게 항복
을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이 예언을 예레미야가 하고 싶어서 했을까요? 아닙니다. 
틀림없이 예레미야는 유다의 백성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우리의 목숨
이 다할 때까지 저 원수인 바벨론과 싸웁시다”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러한 예언을 하도록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하심 속에서 사랑하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예
레미야서 20장 6절이 너무나 상세히 그 당시의 예레미야의 절박한 심경을 잘 묘사하
고 있습니다. 한 번 보실까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
딜 수 없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언은 사람의 사사로운 생각이나 
개인적인 사상이나 주관적인 해석과 통찰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절대로 아닙니
다. 성경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부산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기독
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진리임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밥을 먹고 심심
하니까 고민하고 오랜 시간동안 연구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학
문과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성경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소위 
‘고등비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진 진리의 말
씀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우리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신앙의 전제를 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고등 비평가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말씀들을 머리가 좋고 아주 뛰
어난 사람들이 역사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
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현대 신학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에 대
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사사로운 인간의 생각이 절
대로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본문 19절과 연관해서 “예
수님의 재림하심을 우리가 왜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무엇입니까?”라고 의심을 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담
대히 증거합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예언은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과 판단에 의
해서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
터 받아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베드로의 담대한 신앙을 본 받아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말씀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진 영원불변한 진리의 말씀임을 확신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가 확신하건대 이 세상에서 성경과도 같은 절대적인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
고 있는 책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주 훌륭하고 고귀하고 감
동적인 책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사상이 만들어낸 책에 불과합니다. 심지
어 어떤 책들은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영혼을 파괴
시키는 마치 쓰레기와도 같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 성경의 영감성

  그러면, 성경과 예언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을 입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오
늘 본문 21절에도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
서 우리가 그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로 기록된 원문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이끌림을 당했다”고 쓰
여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예가 사도행전 27장에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죄
수의 몸으로 로마의 감옥으로 지금 끌려가고 있습니다. 지중해 바다 위를 배를 타고 
무려 276명의 사람들이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사도 
바울이 탄 배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유라굴로라고 하는 큰 광풍이 일어
나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파도가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파도가 더 크게 일어나서 14일 동안 바다 위를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동쪽으로 불면 배도 동쪽으로 움직이고 바람이 서쪽으
로 불면 서쪽으로 무작정 움직일 수밖에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무
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고 노련한 선장이라고 할지라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오직 바람
이 이끄는 대로 배는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은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의지와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성령의 인도하시는 데로 성경은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
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은 성경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서 이르기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가 겨자씨라고 했
지만 실제로는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가 있기에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
나 성경은 분명히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
의 역사는 성경을 쓴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한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결코 잘못된 길로 
인도하시는 심술쟁이가 아니십니다. 요한복음 16장13절은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
경에 대하여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을 아주 나쁜 유괴범으로 
전락을 시키는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이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진리의 말씀이라
는 사실을 깨닫고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대학교 시절에 두꺼
운 육법전서를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성경이 주는 진리의 맛과는 비교할 수
가 없습니다. 지금도 성경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사실이지만 이 한 구절 한 구절에 
얼마나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지 그 비밀을 깨달을 때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
한지요! 성경은 어린아이도 깨달을 수 있는 단순한 진리도 있지만 박사학위를 소유한 
사람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비밀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영감 받은 말씀임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요 우리의 삶에 절대
적인 규범이 되는 권위의 말씀이요 신자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도 올바
른 영혼의 안내자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는 날마다 성경
을 부지런히 읽으시고 그 가운데 기록한 모든 것을 열심히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
을 살아가는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신령한 축복을 받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
기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가 현대의 바쁜 일정 때문에 성경말씀을 읽을 시간이 없다
고 해도 하루에 3장을 읽고 주일날에는 6장을 읽는다면 최소한 일년에 한번은 정독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단 한번도 읽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망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성령의 영감으로 받아 쓰인 성경을 
읽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에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시면
서 성경의 말씀을 잘 읽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다른 기도하지 마시고 “주
여, 제가 성경을 한 번도 읽지를 않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엉터리로 믿었습니다. 그
러나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그 누구보다 사모하는 심령으로 읽게 해 주
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들에게 송이꿀보다 더 달고도 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깨달아 질 줄로 믿습니다. 

  다음으로는 성경에 대하여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 학
설은 성령이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을 무의식의 상태에 몰아넣고서 마치 사람이 손에 
펜을 들고 글을 쓰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없이 펜이 가는 대로 성경이 쓰였다는 주장입
니다. 즉 성경의 기자들은 단순히 펜과도 같은 기계에 불과했다는 학설입니다. 소위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성경의 저자들의 인격과 지식과 삶의 경륜
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이 쓰일 때에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을 성
령이 무의식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고 그들의 개성은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믿기 때문입
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서 성경을 읽어도 그와 같은 ‘기
계적 영감설’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는 저
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저자들이 기록한 성경을 보
면 그들이 살아온 삶의 자취와 흔적들이 스며들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 수가 있습니
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저자들의 개성과 단어와 언어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시편 23편을 기록한 다윗은 과거 자신이 목동생활을 
했던 경험에 비추어서 하나님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를 하였고,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높은 학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아주 논리적으로 로마서를 기록하
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서신을 보면 사도 바울의 향기가 나타나고 베드로서신을 보면 
사도 베드로의 향기가 나타납니다.

(결론)

  우리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중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확실
한 권위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존경받는 권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
들에게 있어서 부모님의 말씀은 이 사회의 그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러한 가정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하고도 단란한 가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님이 말씀을 해도 자녀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
면 그 가정은 틀림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가정을 지탱하는 부모님
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의 권위
가 확실한 기업은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 직원들이 진심으로 사장님을 존
경하고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명령에 질서 있게 움직이는 회사는 탄탄대로의 
길을 걸어가며 크게 성장하는 기업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장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고 마지못해서 눈치나 살피면서 일하고 뒤에서 불평하는 직원들이 있는 회사는 조
만간 문을 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에는 확실한 사장님의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
다. 이처럼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분
명한 권위가 꼭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도 확실한 권위
가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세운 주의 종에게는 신령한 
영적인 권위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그 영적인 권위 앞에 모든 성도가 기쁨
으로 순종하고 충성스럽게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는 오늘날에도 초대
교회처럼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크게 부흥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
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최고의 권위는 무엇
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영감
을 받아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입니다. 우리
가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을 믿어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의 모든 예언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믿음의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위에 여러분의 인생을 세
워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된 성경의 말씀에 여러분의 인생을 맡겨보십
시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불경과 사서오경과도 같은 인간의 사상으로 만들어
진 책들에 여러분의 인생을 설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양의 밝은 빛에 조그마한 반딧불의 반짝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이 세상의 학문과 철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그 어떤 뛰어난 
책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 앞에서는 휴지조각처럼 초라해질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만을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
고 있는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시고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러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가장 확실하면서도 권위가 있는 말씀, 그리고 성
령의 감동으로 지어진 성경에 약속된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은혜가 날마다 쏟아 부어
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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