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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과 함께하면 (행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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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함께하면
(행5:38-42 )
 
 
  지금은 조금 주춤한 듯 보입니다만 몇 개월 전만해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는 ‘사스’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이라고 불리는 사스는 2002년 11월부터 중국 광동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하여 홍콩, 싱가포르, 캐나다 토론토 등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신종 전염병입니다. 병에 걸리면 38도 이상의 발열과 기침, 폐렴 등의 호흡기 증상을 보이며 사망하는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아직까지 정확한 병의 출처와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입니다만 쥐들에 의해 발병되어 공기를 타고 확산되는 변종 바이러스가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어떤 덩치있는 것보다 무섭습니다. 바이러스의 특징은 급속도로 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것을 막기위해 마을을 고립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세계가 하루생활권으로 오픈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전염병의 확산은 더욱 가속도가 붙어 온 세계가 사스로 공포에 떨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6월 한달동안 우리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령에 관한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주 우리는 이땅에 최초로 강림하신 성령의 모습을 사도행전 2장을 통해 보았습니다. 성령은 당시 120명 소수에게 영향을 미친 작은 불씨와 같았습니다. 전 세계와 인류역사를 생각하면 팔레스틴의 작은 땅,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파급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확산된 부흥의 물결은 예루살렘을 넘어 세계로 퍼졌습니다. 120명으로 시작된 기독교의 인구는 3000명, 5000명, 수만명, 그리고 셀수 없는 숫자로 불어났습니다. 2000년동안, 전세계를 돌면서, 성령은 우리 인생을 풍요와 기쁨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엄청나게 확산되어 가는 성령의 물결을 감격과 흥분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하면, 이런 폭발적인 힘과 놀라운 역사를 연상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현장에 언제나 기쁨과 형통과 축복이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면 난관도 없고, 장애도 없고, 문제도 없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 시작된 성령의 바람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배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사랑으로 교제하고, 서로 물건을 통용할 만큼 하나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상태로 가면, 예루살렘은 물론, 사마리아와 로마도 금방 복음화가 될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2장 3장, 4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5장부터 다릅니다. 도저히 성령의 바람앞에 보여서는 안될 것들이 나타납니다. 마치 찬물을 끼언고, 잘 가고 있는 사람의 발목을 잡아 족쇄로 채우는 것과 같은 모습니다. 그들에게 장벽이 생긴 것입니다. 도대체 성령의 은혜속에 이들의 발목을 잡았던 장벽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죄입니다. 5장 초반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사람이 끔찍하게 죽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속인 ‘죄’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처음으로 성령과 함께 죄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성령이 임하면 죄는 꼼짝도 못하고 잠잠할 것 같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모가지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여전히 사람을 넘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완벽한 사람, 죄없는 사람이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없는 사람이어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교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알면 알수록, 신앙의 연조가 깊으면 깊을수록 구석구석 추악한 자기 속의 죄를 봅니다. 성경이 믿는 자를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법정적인 선언이지, 실제적으로나 내용으로 보면 여전히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가 우리를 올가맵니다. 죄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우리의 성숙한 삶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6장에 언급된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모두가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사랑을 엮어가던 교회안에 파벌이 조성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안에 헬라파, 히브리파로 갈라졌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섬기지 못하고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혈안에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구제문제로 싸움이 터진 것입니다. 공동체안에 분열과 갈등이 온것입니다.
교회안에 분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중의 하나가 일치, Unity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사탄의 공격은 바로 일치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공략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보다도 일치를 강조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특히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그렇지 않아도 주춤했던 교회가 구제문제로 터진 분파의 갈등으로 성령의 바람을 잠재우고 있던 것입니다.

  셋째, 큰 장애는 고난입니다. 본문 말씀을 포함한 5장 후반부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일대가 성령의 물결로 충만하자 종교인들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때부터 방해하던 자들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의 확장을 막고 기독교를 완전히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교회의 핍박은 로마 황제들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처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자 사도들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수 없다’ 고 하면서 담대하게 나갑니다. 그러자 이젠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날밤 천사는 사도들을 빼내었고 다음날에도 여전히 힘있게 복음을 전합니다. 화가 난 그들이 다시 3차 소환합니다. 그리고 강경하게 이젠 떠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끝까지 복음 전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자 이제는 죽이려고 모의 합니다. 결박과 환란과 죽음, 바로 이것이 다가온 것입니다.

  죄는 개인적인 것이기에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 계파간의 갈등은 내부적인 문제였기에 빨리 수습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당한 핍박과 고난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이들의 근본을 흔드는 문제였기에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이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현장에 고난이 왔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것이 온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딜레마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평생 풀 수 없는 숙제일지도 모릅니다. 잘 믿는데, 잘 사는데, 잘 나가는데, 왜 고난이 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어려움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난을 당할때 ‘왜’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하나님은 고난을 허용하시는가? 왜 많고 많은 사람가운데 하필이면 나인가? 도대체 고난을 당할 때 왜 하나님은 잠잠하시는가?...” 이것은 지금까지 성령의 은혜와 함께 기독교역사에서 끊임없이 질문되어진 것들입니다. 아니 그것은 성경의 사람들에게도 영혼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의문입니다. 특히 시편에는 영광과 감사와 기쁨의 노래가 많지만, 아프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는 탄식의 노래도 있습니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고,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까...”

  모두가 탄식과 아픔의 노래입니다. 그들 마음과 육체의 심한 괴로움으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 부르는 밤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믿고, 신앙으로 살고, 성령과 함께 동행하고, 성령의 뜨거운 능력이 나를 지배하는데 삶의 고난과 육체의 고통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지난 주 저는 우리가 오래동안 기도하고 있는 유명이 집사님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일반병동에 있던 집사님이 전날부터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긴 것을 모르고 갔습니다. 중환자실의 면회시간이 이미 끝난 상태라 간호사에게 부탁해 어렵게 저는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집사님을 보면서 저는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얼마나 사람의 몸을 많이 찔러놨는지 볼수가 없었습니다. 어디가 제일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통증을 호소하면서 일어섰다 앉았다 합니다. 그러면서 집사님이 나지막히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정말 기도가 필요했고, 목사님이 왔으면 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지쳐서 견디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왜 인간이 저런 처절한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필립 얀시’ 라는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작가가 쓴 ‘삶이 고통 스러울 때’ 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주 작지만 고통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잘 정리가 된 책입니다. 거기에서 저자도 저와 똑같은 질문을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이 하신 가장 큰 ‘실수’로 본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 삶에 고통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나병환자를 위한 병원에서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나병은 육체적인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토록 찾았던 고통없는 곳이 하늘나라 외에도 나병환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 없음이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고통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 마디가 죽어 나병 환자들은 고통을 느낄 수 없기에 모든 신체적 기형이 발생합니다. 발가락을 몽땅 잃어버린 환자는 꼭 끼는 좁은 신발을 억지로 계속 신었기 때문입니다. 엄지손가락을 잃어버린 환자는 자루 갈레의 손잡이를 너무 꽉 쥐어서 생긴 쓰린 상처 때문입니다. 눈에 멀어져 가는 환자는 고통을 느끼는 세포들이 죽어서 눈을 깜빡거려야 할때를 알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병환자를 통해 우리 삶에 ‘고통’이 매일 우리를 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건강하다면, 고통을 느끼는 세포가 신발을 바꾸어야 할때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걸레의 손잡이를 느슨하게 잡아야 할 때를 알려주고, 눈을 깜박거려야 할때를 경고해 줍니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생명의 위험 가운데 처합니다. 그는 그제서야 고통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계획’인 것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비참하게 하기 위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사도행전의 가르침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런 면에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를 줍니다. 성령과 함께 해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과 함께 하면 그것을 반드시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기 위해 여기 추잡한 사건을 공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박과 환란을 말하지 않아도 성경은 얼마든지 좋은 이야기로 성령의 역사를 이끌어 갈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혜와 함께 이런 아픔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안에 해결이 있다는 것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이 메시지를 위하여 사도행전 5장, 6장은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 다시 성경을 보십시오. 이들의 난관이 어떻게 극복되었습니까? 우선 죄의 문제는 베드로의 영적인 통찰력으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속일 수 없는 하나님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죄를 극복하는 길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분열의 문제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결됩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선언하면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난은 어떻게 해결이 되었습니까? 본문 41-42절이 그 해답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두 개의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합당입니다. 그들은 능욕받고, 고난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고난을 인정한 것입니다. 고난을 원망과 불평없이 받아드린 것입니다. 현실을 수용하고 받아드리는 것부터 문제는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할 또다른 단어는 ‘쉬지 아니하니라’입니다. 어제도 한 것 오늘도 하고 내일도 계속한 것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중간에 고난이 낀 것입니다. 고난이 와도 쉬지 아니합니다. 어제 하던 기도를 계속하고, 오늘 하던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지속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소망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갑니다.

  여러분, 빌립보서 1장 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우리 삶은 은혜가 고난과 함께 갑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 죄가 꿈틀거립니다. 성령이 중심인 공동체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성령이 머무는 현장에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함께 하면 죄는 극복되고, 문제는 해결됩니다. 무엇보다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난은 물론 견디기 힘든 아픔이지만 반드시 뭔가의 유익이 있습니다. 시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해 내가 주의 율례를 배웠나이다..” 그래서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아담스는 “그대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의 유익으로 계산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내 삶에 고난이 없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내 삶에 혹 고난이 오더라도 내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신앙으로 성령과 함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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