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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것 보다 많이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계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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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2:19 처음 것 보다 많이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두아디라 교회에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절)라고 하십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에게서 믿음에 걸 맞는 행위가 날마다 더 풍성해 졌다는 말씀입니다. 퇴보하지 아니하고 날이 갈 수록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보다 많도다 라는 말은 처음 행위와 나중 행위를 비교하여 나중 행위의 풍성함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사랑과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 충성했던 그들의 행위를 주님은 아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과 온갖 죄악의 범람 속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했던 그들의 인내를 하나님은 아신 것입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름답게 살기를 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연륜이 더 할수록 신앙이 날로 성장해야 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소유했던 처음 사랑을 잃지 않고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는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위하여 성도는 모든 일에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생활화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자는 표어 아래 이달은 처음 것 보다 더 많이 섬기는 달입니다.

그래서 처음 것 보다 더 많이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줄 믿고 처음 보다 더 많이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고별식사로 최후의 만찬을 하시었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행하신 이 일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내용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에 대하여 무지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사랑의 표로 성찬식을 통하여 자기 몸을 주시고 피를 흘려주시는 뜻을 가르쳐 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므로 구체적인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먼지 묻고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어루만지시면서 닦아야만 하심은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신다는 말은 우리의 인격 전체를 씻어 주시는 뜻입니다. 우리 영혼의 죄악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일을 생각하고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피 흘려주심으로 모든 죄악을 씻어 주신다는 뜻으로 발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발을 씻어 주셨듯이 발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씻어 주시고 만져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피 흘리신 뜻을 깨달았을 때 발을 씻기신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발을 씻어 주시는 은혜를 입은 후에 그 발로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하되 아주 심하게 박해를 했습니다. 자기의 시상을 돋우기 위해 로마 시에 불을 질러놓고 불구경을 하며 시를 짓던 그가 피해가 커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자 기독교인들이 불로 심판을 한다고 하더니 불을 질렀다고 거짓을 선포하고 기독교인들을 하나하나 체포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베드로는 제자들의 권면으로 로마 성을 피하여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로마 성을 향하여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면서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쿼바디스 도미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피하여 도망치는 로마 성으로 들어간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들어가 붙잡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십지가의 형틀에 매달렸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말하기를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주시오. 우리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자요, 로마 성을 피하여 살려고 도망친 자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온 탕자니 나를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발이 위로 올라갔습니다. 얼굴은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발을 마지막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가 거꾸로 매달려 회개와 겸손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겸손히 처음보다 더 많이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1938년 어느 날 평양경찰서에 연행되어 신사참배에 협조할 것을 회유 받았습니다. 주 목사님은 기독인으로서 우상숭배를 할 수 없고 일제의 폭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기개의 표현으로 이를 거절합니다.

일본경찰은 주 목사의 절개와 애국심을 꺾기 위해 목사직 사직과 설교정지 명령을 내립니다. 주 목사님은 이를 거부하여 석방 다음날 다시 연행됩니다. 모진 고문과 회유가 시작됩니다. 회유와 아내 오정모 사모의 구속이 이어지지만 주 목사님의 신앙의 힘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차례에 걸쳐서 총 5년 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일사각오'의 자세로 일제에 항거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항거 끝에 주기철 목사님은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에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남기고서 감옥에서 소천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일생은 다룬 돌박 산에 핀 꽃이라는 연극에서는 일경은 평양형무소 안에 못 판을 설치한 뒤 주 목사에게 못 판을 밟으라고 명령합니다. 목사님은 찬송가 364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을 부르며 못 판 위에 오릅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공연장에 함께한  주위의 모든 이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 부릅니다.

이 길을 가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발은 온 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몸의 무게로 못에 찔리어 상하고 다시 옮기려 발을 빼 실 때의 고통은 더 했을 것이며 다시 올기 실 때는 상처에 상처가 더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하셨는지 영문 밖의 길이란 부흥 성가 가사를 남겼습니다,

서쪽하늘 붉은노을 영문밖에 비취누나
연약하온 두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한발자욱 두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물 붉-은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욱마다 가진포악 지셨구나

눈물없이 못가는길 피-없이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아픈다리 싸매주고 저는다리 고쳐주사
보지못한 눈을열어 영생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십자가 바로지고
골고다의 높은고개 나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어찌 못가오랴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랴 (영문 밖의 길)

처음 보다 더 많이 섬기는 성도의 삶의 모범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처음 보다 더 많이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처음 사랑을 버리고 책망 받은 사실을 알고 처음 것 보다 더 많이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4)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5)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식어졌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종말론적인 사상이 팽배하여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면서 점차 식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처음 우의와 사랑을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렘 2:2).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처음 가졌던 열의, 감격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잃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 체험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 때문에 처음에는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점차로 자신의 체험을 잊으면서 동시에 열정도 사그러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따라서 꾸준한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게으르고 나태 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마을에 한 게으름뱅이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나 게을렀던지 누가 음식을 차려 주면 먹고  차려 주는 사람이 없으면 굶어 죽는 쪽을 선택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일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루 종일 굶은지라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상태로 가다가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만 할까봐 겁이  난 나머지 그냥 죽은 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일을 하느니 차라리 땅에  평안히 묻히고 말지.' 중얼거렸습니다.  몸이 바짝 야윈 채 침대에  누어있는 그를 발견한 이웃집  사람은 그가 죽을 줄로만 생각하고 신부님들을 불러 장례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게으름뱅이의 시체를 메고 걸었는데 그를 본 한 노파가 동정 어린 눈초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쯧쯧, 불쌍도 하지 배가 고파 죽은 것이 분명해!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감자라도 갖다 주는 건데....." 관속에 누어있던  게으름뱅이는 이 말을 듣자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키더니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찐 감잔가요?"  "아...아니요. 안 찐 감자요."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일어나자 노파는 너무 놀란 나머지 더듬거리며 대답했습니다. "에이, 그렇다면 신부님들 장례 곡을 읊으세요." 게으름뱅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관속에 눕더니 눈을 꼭 감았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1)하신 모습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1)

는 말씀대로 처음 보다 더 많이 섬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하시는 섭리를 믿고 처음 보다 더 많이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7)는 말씀은 욥기의 전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고난 중에서는 참으로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매우 창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시작은 매우 미약해도 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창대함을 성경은 교훈 합니다. 초대 교회의 시작이 그랬고, 우리 성도들의 삶이 또한 그러합니다. 선한 것은 신실한 데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의 겨자씨와도 같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이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깨닫지 못하다가 차츰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발전해 갑니다. 믿음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받은 은혜는 다른 형제들이 받은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이 오거나 유혹이 올 때 상당한 경지의 믿음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한 자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기를 두려워하고 멀리합니다. 영적 깨달음도 차츰 발전하여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설교 듣기를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성화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믿음이 성장의 단계를 거쳐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은 계속 성장하여 드디어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응하게 하십니다.

시작은 작은 것 같이 보이지만 충성한 결과는 크게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약속의 말씀의 성취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구하여 알고 행하는 자는 지금은 미약할지라도 장차 창대해짐을 믿고 예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었던 전 유엔사무총장 함마슐드는 1961년 9월 17일 아프리카 정글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일기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사랑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안에서 살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위하여 몸을 바치신 주님, 저도 주님께 [예] 하고 대답하나이다]이런 기도문이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신앙은 함마슐드 자신의 꾸준한 신앙생활의 연마 에서도 기인되었으나 그의 일기 집에 의하면 부모님의 영향도 컸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일기에 "나의 아버지는 여러 번 나에게 가장 만족한 인생은 조국과 인류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생애라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되풀이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인간을 섬기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라고 쓴 일이 있습니다.(예화 뱅크-예 하고 대답하나이다.)

우리도 예하며 순종하며 더 많이 섬길 때  나중은 매우 창대해질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지금보다야 나중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희망이야말로 사람이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며 나아갑니다. 창대케 하심을 맛보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 대학교 안에서  동생 찰스 웨슬레등 몇 사람과  더불어 성경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모임은 그 규모가 극히 미미한  채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나마도 중간에서 한 차례 중단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모임이 터가  되어 오늘날 전 세계에 뻗혀  감리교라는 교단을 이룩하였습니다.

시작이 미약하더라도 신앙과 일치될 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창대해 지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시작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미약해도 그 결과는 창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보다 더 섬기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9)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임종 직전에 '나는 칼로써 전 유럽을 제패해 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는데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는 오늘날 온 세상을 제패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복음이 세계를 제패하게 됨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작은 거창하나 나중은 미약해 지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까? 한 해의 첫 걸음은 많은 꿈과 포부로 계획 하였지만 실천한 결과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아닙니까?

처음 보다 더 많이 섬기는 자에게 복된 은총이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 2:26)하신 말씀 믿고 처음 보다 더 많이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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