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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과 기쁨/ 시 16: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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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과 기쁨

본문: 시편 16:9 - 11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독일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농촌에서 성실하게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하게 살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밤에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동쪽으로 12km정도 가면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베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부부는 노인의 말대로 큰 나무를 찾아 베었습니다. 그러자 나무가 쓰러지면서 가지에 있던 둥지에서 새 알 두 개가 나왔습니다.
두 개의 새알 중 하나에서 새끼 새가 나와 "다른 새알을 까보면 금반지가 하나 나올 것인데 그 반지에게 소원을 빌면 들어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날아갔습니다. 젊은 부부는 금반지를 두고 무슨 소원을 빌 까를 의논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참으로 희망찬 순간이었습니다. 집을 달라고 할까, 소를 달라고 할까, 땅을 달라고 할까, 돈을 달라고 할 까를 의논하다가 그런 것은 열심히 일하면 얻을 것이니 금반지를 잘 보관하고 열심히 일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반지를 잘 싸서 옷장 속에 넣었습니다. 무슨 소원을 들어달라는 요구보다 반지가 있다는 사실에 든든해하며 희망과 기쁨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힘든지도 모르고 전보다 열심히 일해 땅도 사고 논도 사고 소도 샀습니다. 나중에는 큰집도 장만해 부자가 되었고 아들 삼 형제까지 두었습니다. 이런 동안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보다 더 귀한 것이 희망과 사랑, 성실과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아들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평화롭게 숨졌습니다.
아들 삼 형제는 부모로부터 "금반지 유언"을 듣고 금반지를 꺼내 소원을 두고 의논을 했습니다. 그때 큰아들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더 이상 무슨 욕심을 낼 것인가. 부모님은 소원을 풀지 않고 희망 속에서 행복하게 사셨는데 우리가 소원을 풀면 되겠느냐? 금반지 때문에 서로 갈라질 것이 아니라 금반지를 그냥 부모님 묘소에 묻어 버리고 희망 속에 살자" 이 의견에 모두 찬성했습니다. 그래서 그 반지는 부모의 묘소에 묻혔습니다.
희망은 그 자체가 일종의 행복이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큰 기쁨입니다. 즉 희망이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희망을 위해 때로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돈이나 명예, 지위, 권력과 같이 진정한 희망이 아닌 것을 희망으로 삼고 목숨을 거는데 오늘 이 땅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 수 있는 참된 희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하나님만을 희망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의 계획을 포기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생각이나 계획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포기할 줄 압니다.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랄 땅에 거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애굽으로 내려가던 자기 계획을 포기하고 그랄 땅에 거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희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희망으로 삼는 사람은 또 싸우지 않습니다. 남을 공격하거나 해치거나 빼앗지 않습니다. 기꺼이 양보하며 삽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 살 때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시기하여 이삭의 모든 우물을 흙으로 메우고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며 추방했습니다. 그때 이삭은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나 그랄 산골짜기에 가서 장막을 치고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그랄 목자들이 와서 “이 물은 우리 것이다”며 억지를 쓰며 빼앗자 이삭은 “다투기 싫다”며 더 멀리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그곳까지 쫓아와 또 빼앗자 이삭은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또 쫓아와서 우물을 빼앗자 이삭은 더 멀리 가서 우물을 파고 “야 넓구나”하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이삭은 싸움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는 사람은 남과 다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데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비멜렉 왕이 보좌관과 군대장관을 대동하여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이삭이 “나를 미워하여 내쫓더니 왜 나에게 오셨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대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대하고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왔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해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희망을 삼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여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희망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를 해친 사람에게도 선대합니다. 우리가 나를 해치는 사람에게도 선대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자기를 다섯 번씩이나 내쫓고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편히 쉬게 한 후 다음날 평안히 돌려보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시고,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해방되기 전, 함경북도 나남에 한 여자 거지가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인데, 살이 보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구걸행각을 하였습니다. 젊은것이 무엇을 못해 거지가 됐느냐, 멀쩡한 여자가 일하기 싫어서 그 모양이냐 하며 남들이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으나 한번도 화를 내는 일 없이 그저 싱글벙글 웃어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여자로 돌려놓고 제대로 상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8.25해방이 되고 나남에 소련군이 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거지가 소련군의 장교 옷을 입고 중위의 견장을 달고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소련군으로부터 밀파된 여자 간첩이었습니다. 이 거지가 그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 앞에 서 태연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그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소련 장교인 그는 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긍지가 있었고 자기의 능력에 대하여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멸시할 자격이 없다고 믿었으므로 주위가 자기만 거지로 알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조금도 괴롭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됨을 자랑하는 우리들이 핏대를 올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낼 만한 일이 세상에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는 배신을 당하고, 무지한 로마 병정들에게는 매를 맞고, 얼굴에 침을 받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빗발치는 욕설 속에 못 박혀 죽으신 일, 살인강도들과 꼭 같은 대우를 받았으나 한마디의 불평도 아니하신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호강하는 셈이며 앞으로 어떠한 부당한 욕을 먹어도 기쁘게 참아야 할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어느 날 우연히 할머니 몇 사람이 양지에서 햇볕을 쪼이며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들은 기쁨이 가득 찬 얼굴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존 번연은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했으며 새 사람이 되는 확실한 경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위대한 신앙의 문학은 바로 그 기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기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시편 4장 7- 8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두신 기쁨이 얼마나 풍성하고 온전한 것인지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 보다 더욱 풍성하다고 고백합니다. 새 포도주는 다윗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재산 증식의 수단이며 삶의 즐거움의 원천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돈과 명예, 육체적 즐거움 등으로 대변되는 세상 모든 즐거움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한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을 성도들의 마음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곡식이나 새 포도주'로 결코 만족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참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과 만족이야말로 농부가 곡식과 풍성한 과일을 수확하는 것보다, 어부가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더한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주께서 내게 두신 기쁨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그러우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에 기쁨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흔들어 놓는 기독교 안에는 분명히 기쁨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울한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서 우울한 삶을 살 수 있냐는 말입니다. 또한 “기독교를 검은 상복과 슬픈 얼굴에 연관시키는 것만큼 해를 끼치는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곧 기독교에는 세상이 모르는 독특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기쁨을 알면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고, 이 기쁨을 알면서도 잘 누리지 못한다면 병든 신앙이고, 이 기쁨을 전혀 모른다면 아직도 기독교의 신앙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사람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세인트 루이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여행 중에 있던 한 변호사가 그곳에서 하루를 머물게 됐습니다. 마침 그 날은 주일이어서 크리스천인 그는 낯선 이 도시에서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호텔을 나섰으나 어디에 교회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순경한테 물었습니다. "여행 중에 주일을 맞아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면 교회가 있습니까?" 순경은 이렇게 저렇게 가면 교회가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변호사는 순경이 일러 주는 대로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 순경을 또 만났습니다. 변호사는 그 순경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이 일러준 교회를 찾아가면서 보니까 도중에도 다른 교회가 많던데 하필이면 왜 맨 끝에 있는 그 교회를 소개하셨습니까?" 순경이 대답합니다. "저는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통정리 하면서 그동안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제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했습니다." 이 순경의 말에는 매우 중요한 뜻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 마음, 그것이 바로 그 교회의 성격이요, 교회의 수준이며 교회의 성장도입니다.
기독교는 소망과 기쁨의 종교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유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는 상갓집과 같다. 그저 '나미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요, '인생 무상' 이라고 하면서 모두가 다 죽고 다 없어진다 하니 죽음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유교는 마치 제사집과 같습니다. 밤낮 효도한다고 하면서 제사지내는 일에만 정성을 다하니 유교식대로 살다보면 일년 내내 제사만 지내야 된다. 반면에 기독교는 잔치집과 같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확실히 '희락의 종교'입니다. 복음은 바로 행복과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욕망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식욕이라든가 성욕이라든가 정치적 욕망이라든가 지배욕이라든가, 혹은 어떤 지식을 추구하는 지적 욕구 등을 충족하는 데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기쁨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오는 영광과 특권,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죄를 용서함 받은 데서 오는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얻는 기쁨입니다.
나치 독일에서 살아남은 어떤 사람이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해서 기차표를 찢든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더냐? 기차가 터널 속으로 지나가게 되어 캄캄해졌더라도 우리는 운전사의 기술을 믿고 조용히 기다리지 아니하겠느냐?"
성경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아니하느니라"(요16:21)하였고,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할뿐더러 오히려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롬5:3)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과 기쁨이 모든 근심을 이기고 어리석음을 이기고 절망을 이기고 승리하게 합니다.
문득 ‘쨍 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는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훑어보아도 희망은 없고 귀를 쫑긋 세워 무슨 소리가 들릴까 싶어 기다려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요즘 TV 뉴스에서는 신바람 난 듯 정치계 비리와 뇌물 보도, 아니면 살인, 자살, 자식을 강물에 던진 비정한 아버지 등의 사건을 연일 보도합니다. 무엇이 윤리고 도덕일까요?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보면 어느 것 하나 기쁠 것도 좋을 것도 시원한 것 하나 없이 슬프기만 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을 쳐다보고 사람에게 기대하다보면 우리에게 돌아올 몫은 늘 씁쓸한 것이요, 낭패와 고통스러움뿐입니다. 자, 한번 하늘을 올려다봅시다. 하나님은 태초에 시원한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을 주셨습니다. 푸른 하늘을 쳐다보노라면 비록 시인은 못되지만 한 수 읊어지고 싶어집니다. 한 점의 구름이 부풀어 소나기가 된다 해도 그것은 한 폭의 수채화일 것입니다.
우리는 실의와 고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고요 가운데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엘리야처럼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고 영원하리라”고 선포하는 소리,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기뻐하라”(요14:27) 하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은 다 파괴되고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변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것,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키티라는 프랑스 시인은 “진리는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은 진리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좋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일 뿐입니다. 세상은 결코 슬프고 아픈 것만은 아닙니다. 기쁨을 해산하기 위한 과도기일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정말 살맛 나지 않습니까. 다 망가지고 터지고 무너지고 죽었다고 해서 주저앉아 통곡만 일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는 이 나라 중천에 떠있습니다. 주안에서 주시는 기쁨과 희열, 믿음이 허락하는 희망을 꽃피워봅시다. 보다 나은 내일이, 민족이, 이 땅의 교회가 신바람 나는 새로운 계절을 맞기 위해 우리 모두 슬픈 노래 아닌 희망가를 노래합시다. 쨍 하고 해뜰 날이 곧 돌아오기를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항상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 주님을 믿고 따르고 시인하며 전파하게 된 기쁨, 주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기쁨, 주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게 된 기쁨, 주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기쁨,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기쁨, 나에게 허락하신 가정과 교회와 사업과 나라와 민족에 대한 기쁨….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웃음은 우리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밝은 웃음입니다. 믿음의 삶이 깊으면 깊을수록 영적인 기쁨도 풍성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리 광풍이 몰아치고 어떤 악조건의 괴로움이 다가와도, 주안에서 복음의 기쁨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면 참 평안이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주안에서 기뻐하는 자에게는 환난 그 자체도 기쁨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온전한 믿음에서 샘솟는 기쁨은 환경을 초월한 진정한 주안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기쁨입니다. 필립스 부룩스는 “우리가 서로 기뻐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셨으며,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를 그 분의 진리의 선포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과 웃음으로 살아야 다른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구원의 기쁨을 전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는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에게 극한 상황에서도 인내와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희망입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 한, 어떠한 시련이라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정열과 생활의 보람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삶의 목표도 없기 때문에 일시적 쾌락에 탐닉하여 방종과 타락을 일삼거나 절망 속에서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반복하는 자들은 순간적으로는 기쁨을 얻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한 허탈감은 오래도록 지속되기 마련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라는 말씀처럼 희망 속에서 절망을 이겨내고 일시적 욕망을 절제할 때 비로소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희망이란 "신뢰와 확신의 감정"이라 정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희망이 종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으면 참된 신앙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희망을 주시고 그 성취를 약속하셨습니다. 희망은 신앙과 확신 속에서 성장해 가는 미래의 열매이며, 인내와 갈망 속에서 표현되는 기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속에서 희망을 키우고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희망의 실현을 약속 받은 자들은 결코 자신의 열악한 현실과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참된 희망을 간직한 사람은 오로지 미래의 목표를 성취할 날을 고대하며 그 날의 열매를 위해 오늘도 현실 속에서 성실히 땀을 흘립니다. 희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미래의 축복을 향해 오로지 신앙과 노력을 양손에 쥐고 달려가는 자입니다.
런던의 한 길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 위해 구두를 닦아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밤늦게까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으면서도 그 소년은 얼굴에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늘 노래를 부르는데 밝은 노래만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니?" 그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작가 찰스 디킨스입니다.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어린 찰스 디킨스가 손님들의 반짝거리는 구두 코 위에서 희망의 별빛을 보았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당신의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면서 사는 복된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옆에 계신 분에게 인사하세요 "새해에는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소망의 하나님, 진정한 기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광과 특권을 안겨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오늘 예배드린 모든 성도들, 나는 왜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가를 깊이 반성하고 돌아가게 하시고, 주안에서 기뻐하기로 선택하는 아름다운 삶을 날마다 이어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냐고 물어올 수 있도록 우리 삶을 기쁨으로 충만케 해주시옵소서. 특별히 생활고와 연약한 몸으로 고통 당하는 자녀들에게, 세상에서 실패하여 좌절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신비스러운 기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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