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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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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어떤 남자 분이 직장 일로 인해서 잠시 해외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출장을 떠나면서 아내가 걱정을 할까봐 아내에게 단단히 약속을 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걱정하지 않도록 내가 매일 한 번씩 전화를 하리이다."
그리고서는 출장을 떠났습니다. 무사히 목적지에 잘 당도했습니다. 행여라도 아내가 걱정을 할 것 같아서 그는 얼른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 잘 당도했소. 집에는 별 일 없지? 내가 또 전화하리이다."
그리고서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출장 간 일이 너무 바빠서 그는 아내에게 한 번도 전화를 못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짐을 싸다 보니까 그제서야 아내에게 전화를 하지 못한 것이 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싸던 짐을 옆에다 밀어놓고 아내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서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감이 있어서 꼭 이렇게 말을 하리라고 속으로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보, 그동안 전화하지 못해서 미안하오. 얼마나 수고가 많았소? 나는 당신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그러면서 그는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꼭 하리라고 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수화기를 들고 보니까 자기 생각하고는 전혀 달리 엉뚱한 말만 튀어나왔습니다.
"응, 나야. 별 일 없지? 애들은 어때? 강아지는 잘 있고? 화분에 물도 잊지 않고 잘 주고 있소? 물고기 밥은 잘 챙겨주고 있소?"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에게서 더 이상 아무런 대꾸가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급기야 아내가 울먹 울먹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 해도 해도 너무하군요."
그러면서 딸까닥하고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이 남자 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애들 챙기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강아지도 챙기고, 물고기에 신경을 쓰고, 화분에까지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일 먼저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할 사랑하는 아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표명을 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전화를 끊어 버릴 만도 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깊은 성탄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성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성탄절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속이 상하시겠습니까?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얘들아,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니?"
제일 많은 답변으로 나온 것이 크리스마스 트리였습니다. 많은 어린아이들이 성탄절을 크리스마스 카드나 주고받고, 선물을 받는 날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탄절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생일날로 생각하는 어린아이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성탄절을 예수님의 생일이라고 제대로 답변하는 아이들이 그다지 흔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만 그렇습니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극단적으로 이런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마귀가 일 년 열두 달 가운데서 가장 좋아하는 달이 언제이겠는가? 바로 12월 달이다. 그 가운데서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 언제이겠는가? 바로 12월 25일, 곧 성탄절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탄절을 방종이나 방탕의 면허라도 받은 날처럼 그들은 육신의 향락을 도모합니다. 그러면서  깊은 죄악 가운데로 빠져듭니다. 그러니 마귀가 성탄절을 제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깊은 성탄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성탄절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드높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요1:14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성탄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이 바로 성탄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incarnation, 곧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뜻깊은 성탄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성탄과 관련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왜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까? 그 목적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으셨다고 해서 예수님의 신성이 사라져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사도 요한의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그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본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뜻깊은 성탄 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각자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왜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거하신다"는 말의 본 뜻은 "장막을 치신다," "성막을 치신다"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갈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막을 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도에서 사역을 하는 어떤 선교사님의 체험담입니다.
어느 날 그는 힌두교 승려 한 사람과 함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던 중에 그는 실수를 해서 길가에 있는 개미집을 발로 밟아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개미집이 부서졌습니다. 그 속에 있던 많은 개미들이 발에 밟혀서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그러자 힌두교의 승려가 그것을 보고서 안타까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수많은 개미가 목숨을 잃었군요."
그 말을 듣고 그 선교사님은 너무나도 민망해서 정중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고 제 발가락에 눈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실수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저 개미들에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힌두교 승려는 정색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정 개미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거든, 당신은 죽어서 다시금 개미로 태어나야 할 것이요."
힌두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윤회설을 믿습니다. 그러니 그 사상에 의하면 개미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개미로 다시금 태어나는 방법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선교사님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주신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승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군요. 바로 똑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을 단순한 하나의 신학적인 교리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사실을 날마다 체험적으로 느끼면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어린아이가 주일학교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집을 나섰습니다. 동네 어른이 그를 보더니 물었습니다.
"얘, 꼬마야! 너 어디 가니?"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가요."
그러자 그 어른은 빈정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하나님이 어디 있어?  너 하나님을 봤어?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어? "
그러자 이 아이는 똘똘하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셔서 온 우주에도 담을 수가 없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작으셔서 지금도 내 마음속에 계세요."
그렇습니다. 온 우주조차도 담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고서 살아갑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날마다 체험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윗과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시23:4말씀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할찌라도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사자 굴에 던지움을 당한다 할찌라도, 풀무불에 던지움을 당한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의 종으로 팔린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요셉처럼 총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 길을 지나간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옵니다. 우리가 물에 빠졌다 할찌라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게 될 때 우리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할찌라도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뜻깊은 성탄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이 믿음이, 이 확신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길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르게 보았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찌라도 사흘만 가까이 있으면서 따라 다녀보십시오. 이런저런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삼 년이나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요한복음을 기록하기까지 이미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한 사도 요한의 평가는 조금도 절감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생생고도 분명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해서 완전히 육신으로 변해 버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예수님은 육신을 덧입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신성이 조금도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100%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100%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배척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보지 못하고 인성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영국 런던의 근교에 있는 어느 농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누군가가 농가의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농부는 대문을 열고서 내다 보았습니다. 몇몇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여자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농부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갑자기 날씨가 흐리고 소낙비가 올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우산이 있으면 하나만 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농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우산 가운데 가장 허름한 것 하나를 찾아서 그에게 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을 그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농부가 대문을 열고 보았습니다. 어저께 우산을 빌려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산을 되돌려 주면서 예쁘게 포장한 카드 한 장을 주었습니다. 농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그 카드를 열어보았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 밑에는 그 우산을 빌려 쓴 장본인의 이름과 싸인이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가지고 있던 우산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드렸을 텐데… 그럴 줄 알았으면 내 정성을 다해서 그분을 영접했을 텐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날 농부가 저질렀던 실수, 여왕을 여왕으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영접하지 못했던 실수가 영적인 세계에서도 계속해서 반복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십니다. 만 주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는 놀랍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는 이상하고도 큰 별이 떠올랐습니다. 멀리서 동방 박사들이 그 별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물을 드리면서 아기 예수에게 경배했습니다. 들에서 양치는 목동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의 허다한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엄청난 사건을 보고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보지 못하고 인성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보았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여관집 주인이 그러했습니다. 헤롯 임금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삼 년 동안 따라다녔던 가룟 유다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서 배척받는 초라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그는 낙심하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한 불행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보았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십니다. 만 주의 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에게 우리 삶의 전폭을 맡기십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해주시고, 우리의 삶 전체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뜻깊은 성탄 주일을 맞이해서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사셨습니까? 사도 요한은 간단하게 한마디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은혜는 공로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값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가운데 가장 놀랍고 고마운 은혜가 무엇입니까? 찬송가 405장 가사에 나와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이 무엇이기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나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절로 감격하지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프로야구 LA다저스 팀의 감독이었던 타미 라소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박찬호 선수를 매우 아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몹시도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고물 트럭을 운전하는 기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늘 싱글벙글했습니다.
"야, 세상에서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
자기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린 라소다가 하루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집보다 잘 살지도 못하는데, 아버지는 뭐가 그리 행복하시다고 늘 싱글벙글하세요?"
그때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들어봐라. 나는 어릴 때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자랐단다. 그런데 지금 내게는 멋진 아내가 있고, 너처럼 훌륭한 아들이 다섯 명이나 있지 않느냐? 우리에게는 집도 있다. 비록 고물이지만 쓸 만한 트럭도 있지 않느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느냐? 그러니 이 세상에서 누가 나보다 더 행복하겠느냐?"
그는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생각하면서 늘 감격하는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다섯 아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라소다는 자라서 야구선수가 되었습니다. 최우수 투수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라소다가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기를 보기 위해서 그의 아버지도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날 따라 라소다의 투구가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그를 도중 하차시켜 버렸습니다. 그는 게임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감독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료선수들에 대해서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그만 해라. 너는 지금 좋은 호텔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있지 않느냐? 얼마든지 너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너의 가족들이 다 건강하지 않느냐? 너의 가족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도 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나의 미소라도 좀 빌려 가거라."
아버지 말을 듣는 순간에 그는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그래, 맞다. 하나님께서 나의 얼굴에 미소를 주셨으니 내가 미소를 띠면서 살아가야지.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바라보시면서 미소를 띠시니 나도 미소 띤 얼굴로 살아가야지. 그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의 미소라도 빌려서 내 것으로 삼자.'
그는 그 뒤에 어느 때라도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소를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있는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 예수님이 충만하신 은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은혜가 넘쳐 흘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들도 얼마든지 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웃으며 사십시다. 미소를 띠면서 사십시다.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십시다. 이처럼 은혜로운 삶이 여러분에게 날마다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예수님에게는 진리도 충만합니다. 요14:6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에게 맡기면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의의 길로, 진리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어느 공항에서 생긴 일입니다. 어떤 사업가가 시간에 쫓기면서 공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는 줄을 서서 검색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검색이 너무 까다로와서 도무지 줄이 줄어들지를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 사업가는 행여라도 비행기를 놓칠까봐 안절부절 못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어떤 사람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비행기를 타시기 전에는 절대로 비행기 문이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테러 때문에 검색이 아주 심합니다."
그는 너무나도 조바심이 난 나머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장담하십니까?"
그러자 뒤에서 또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당신이 타야 할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입니다."
그러니 조종사가 타기 전에는 그 비행기 문이 닫힐 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우리 뒤에 세워 놓은 채 우리 혼자만 바쁘지 않습니까? 마음 조급해 하지 않습니까? 분주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예수님보다도 앞서지 마십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 인생의 조종사가 되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십시다.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앞으로 모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면 우리의 걸음이 의의 길로, 바른 길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신실하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게서 보았던 아버지의 독생자의 그 영광, 만 왕의 왕이시요, 만 주의 주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면서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관자로 모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우리 삶의 전폭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 받아서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십시다. 진실된 모습으로 바르게 살아가십시다. 뜻깊은 성탄 주일을 맞이해서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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