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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배자 / 마 2:1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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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마태복음 2장 11절 - 12절
제  목 : “경배자”


기독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 하나님께만 경배하다 최후를 마치신 신앙 영웅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의 갖은 회유와 고문 속에서도 하나님 아닌 천황께 절하지 않으므로 옥고를 치르다가 순교하셨습니다.

1) 경배의 대상

누구에게 경배하는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만물의 영장인 인생이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생이
◎ 하늘을 향해서 머리를 들고 다니는 인생이

누구에게 머리를 숙이는가? 는 자존심을 떠나 그 경배자가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혹자는 돼지 머리에게 절하고,
혹자는 기암괴석에게 절하고
혹자는 말 못하는 또 다른 형상에게 절합니다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제 1계명과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제 2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향해서 절하느냐? 는 그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하는 신앙주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 부처를 보고 경배한다면 불자입니다.
◎ 기암괴석을 보고 경배한다면 우상 숭배자입니다.
◎ 하나님과 예수님께만 경배한다면 성도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두 모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신랑신부가 서로의 정조를 지키듯 마음과 생각을 물론 행동까지도 분명하게 가져야 됩니다.

요즘,
위대한 것처럼 비취어지는 한 모습이 있습니다.

◎ 중과 수녀가 함께 어울려서 성탄절에는 찬송가를 부르고 사월초파일에는 찬불가를 부릅니다.

이제는 중도 함께 자선냄비 앞에서 사랑모금을 합니다.

더 나아가 어느 사찰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하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세상은 이 모습을 보고 믿음이 크다. 사랑이 좋다 할지 모르지만,
실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이탈된 타락의 모습이요.
두 주인을 섬기는 변질의 모습이요.
두 남편을 섬기는 정조 없는 여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사람은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니와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기느니라”

◎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신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좋다. 사랑이 크다 칭찬하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너희가 머뭇머뭇하느냐? 며 책망하셨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고 촉구하셨습니다.

혹 세상과 세상일에는,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의 두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할 순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특별히 기독신앙에는,
타협은 없습니다.
오직,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등의
님 향한 일편단심을 배워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포로된 신분에서도
신앙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예수님께만 경배하는 경배자여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을 보십시오.
천군천사도 아니었고, 요셉이 있고, 마리아가 있지만,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 말구유의 아기 예수님이든,
◎ 십자가의 피 흘리신 예수님이든,
◎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든,

동방의 박사들처럼
나이와 직업과 환경에 상관치 않고 경배해야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창조주로써
그리고 예수님을 만유의 주재로서 고백하는 믿음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2) 경배의 모습,

하나님과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두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① 계시에 따라 해야만 합니다.

흔히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한다고 하는데
이 예배는 예의를 갖춘 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근거한 예의입니까?
레위기 제사법에 근거한 예배모범에 따라 해야 합니다.

◎ 왜 예배 중에 시편낭독이 있습니까?
◎ 왜 성시교독이 있습니까?
◎ 왜 말씀 선포가 있으며 축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계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 하나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달리 해석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고 친수로 지은 전에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경배도,
사람이 의도한 경배가 아닌,
계시해 주신 경배일 때 주님 만족하십니다.

한 예로 구원의 방주는 노아의 의중이 아닌,
하나님의 식양 따라 지었기에 홍수 날에 뜰 수 있었고,
홍수를 견디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광야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의 의중 따라 지어진 것이 아니라
계시에 의했기에,
훗날, 지어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나 모세나 오늘의 우리나 할 수 있는 일은 「명하신 대로 되니라」한 것처럼
계시대로 경배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의 경우
성찬을,
계시에 의하지 않고 임의대로 먹고 마셨다가 화를 자초한 경우가 그 예입니다.

계시에 의한 경배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 피 없이는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의 경배입니다.

◎ 전심으로 경배해야 했습니다.

  마 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경배가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 참 경배인 것입니다.
이런 경배자는 옷차림도 다릅니다.

제가 아는 모 장로님 부부는,
새벽이든, 비 오는 날이든, 꼭 정장으로 예배에 임했습니다.

여쭈었더니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날과 시간이 다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른 예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좀 덥다고 벗고 예배하고
좀 춥다고 쓰고 예배하는 일은 삼가며,
이런 분을 본 받아야 합니다.


②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시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예배, 경배의 본질은,
하나님 찬양입니다.
하나님 영광입니다.
하나님 감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래나 흥정이 아닙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이 본질을 알았기에
보배합을 열어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언제 보배합을 엽니까?
누구에게 엽니까?

어느 할아버지는 96세의 할머니와 사시는데 자식이 없습니다.
묻힐 묘자리를 장만하는데 수십 년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장 밭을 사서 동네에 기증했습니다.

◎ 예배 때 보배합을 엽니까?

◎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까?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의 참뜻은 보물보다 경배자의 마음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가 드릴 수 있는 황금은 무엇일까요?
몰약은? 유향은?
개인마다 다를 수는 있으나 중요한 것은
보배합을 나 아닌 주님께 열수 있어야 합니다.
보배합은,
마음합이 먼저 열려져야 열 수 있습니다.


3) 찾으시는 하나님

신앙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신앙이 있고,
찾아주시는 하나님을 뵙는 신앙이 있습니다.
다 훌륭한 신앙자태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른 경배자는
하나님이 꼭 찾아 주십니다.

◎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내시도 찾아 주셨고,

◎ 지금의 동방박사들도 찾아 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경배자입니다.
경배는 큰 의무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누구나 경배자가 될 수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머리를 아무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성호와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누가 찬양하겠습니까?

내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동방의 박사처럼,
예물과 경배로 예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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