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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과 마리아 / 마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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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요셉과 마리아
성경본문 : 마태복음 1: 1-25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있지만 주님의 생일잔치는 없습니다. 기념식도 없습니다. 성탄은 생일축하가 아니며 생일기념이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신 사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나신 날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적으로 성탄절을 12월 25일에 지키고 있습니다.

  성탄절 문화

  성탄절과 연관해서 교회는 여러 가지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탄날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에는 성탄날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일날이 없습니다. 교회가 만들어냈습니다. 주후 3세기경에 로마의 태양절 되는 12월 25일에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 경에 콘스탄티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12월 25일 이날을 그리스도 탄생의 의미를 부여한 로마의 휴일로 지정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5세기 경에 12월 25일을 예수님이 나신 날이라고 공적으로 확인을 한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12월 25일 성탄절은 5세기경에 만들어진 날입니다.

  그리고 성탄에 연관된 네 가지 문화가 있는데 하나는 산타크로스 문화입니다. 산타크로스는 구라파, 핀란드, 덴마크에서 많이 강조되고 있는 문화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있는 산타크로스 문화는 미국식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4세기 경에 활동한 성 니콜라스를 추모하고 니콜라스가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그 정신을 따라 만들어진 문화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카드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약 12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문화입니다.
  그리고 성탄트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교적 오래되었습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문화인데 그 기원은 마틴 루터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거기에 불을 밝히는 일을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성탄준비의 주인공

  그러나 성탄절을 가장 돋보이게 하고 흥분시키는 문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물을 주고 받는 문화입니다. 미국은 10년 전 통계를 보면 선물 값으로 100억불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탄절은 선물문화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용하던 사람도 선물을 하나 받고 나면 들뜹니다. 그래서 선물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들뜨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선물을 주지 않고 받지 않으면 성탄절 기분이 들뜨지 않습니다. 성탄절 기분을 누려 보려면 선물을 하든지 받아보든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CD를 두 개 받았는데 제법 관심 있는 분이 보내 왔습니다. 그런데 그 CD를 듣고 조금 실망했습니다. 요즘 멜로디와 요즘 풍조를 가미해서 가사도 새로 지은 것으로 했는데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없는 캐롤입니다. 예수가 없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성탄절을 맞이해서 문화적, 사회적으로 성탄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가장 한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이 두 사람을 빼놓고 성탄절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아기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성탄을 준비한 사람들 가운데 중요한 사람은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정혼한 사이입니다. 정혼은 유대의 법적으로 혼인을 말합니다. 정혼한 남녀는 이제 부부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남편이 아내를 데리러 오는 그 혼인 절차가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혼인잔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혼인잔치도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가는 날 벌어지는 것이 진정한 혼인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정혼은 법적으로 부부라는 것을 규정하는 절차이고, 정혼한 부부는 정식 부부생활을 할 때까지 신부를 데리러 오는 기간이 있는데 그것은 신랑마다 다릅니다. 신랑이 능력이 있어서 독립을 일찍 하면 신부를 빨리 데려오고 그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갖추어 질 때까지 심지어 1년이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는 그런 관계입니다. 정혼한 부부인데 이제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러 가는 시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이 마리아가 잉태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처녀가 부부생활을 하기 전에 잉태를 했습니다. 동거하기 전에 잉태를 한 것은 유대의 법으로 엄격히 금합니다. 동거하기 전에 잉태한 처녀의 잉태는 율법에서 돌로 쳐 죽이는 극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 남자도 극형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요셉은 오늘 성경에 보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즉 파혼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생각한 것은 잉태된 여자와의 관계를 끊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살아나는 길이기도 하고 어쩌면 이기적인 방법이지만 모든 남자들이 일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방법입니다. 

  사자의 현몽

  그리고 그는 작정을 했습니다.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말에 실감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파혼이 되면 소리가 많이 납니다. 시끄럽게 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우려니까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무책임하다고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최선의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꿈에 현몽을 합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로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에 대하여 파혼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입장, 감정, 당한 처지를 우리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무시하는 일방적인 명령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런 자세로 많이 살아오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 사정이 있습니다. 내 입장이 있습니다. 내 자존심이 있습니다. 지금 유보해 주십시오. 지금은 제가 주님 앞에 희생을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요셉에게 명령할 때 요셉의 입장을 한 푼이라도 배려했습니까? 호리라도 요셉의 감정을 배려하고 있습니까? 그의 생각은 파혼입니다. 마리아와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이 요셉의 입장을 깡그리 무시하고 “요셉아 데려 오너라 두려워 하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이런 대목을 순종하는 그것이 믿음의 순종입니다. 100% 내 것을 하나님이 무시하고 요구하는 거기에 ‘아멘’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순종을 요셉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 말씀도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마리아가 부정한 여자라고 오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마리아에게 멍에를 벗겨주는 길은 마리아가 부정하지 않다는 것, 즉 정결성을 보장해 주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마리아의 순결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마리아의 순결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데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우리 하나님은 독재자입니다. 아들을 낳아 놓고 애비가 이름도 짓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은 절대명령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 감정을 섞어서 해석할 명령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명령을 요셉에게 하나님이 꿈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늘 성경에 보니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용납했습니다.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고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한 남성교인이 이 대목에 대한 성경공부를 하다가 자기를 인도한 장로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장로님, 내가 성경공부를 좀 하려고 결심하고 왔는데 성경 첫 장부터 이런 허망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습니까? 성령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내가 보니 요셉이라는 남자는 바보입니다. 그런 여자를 왜 데려옵니까?” 하고 자기 나름대로 불평을 했습니다. 그 때 그 장로님이 아주 유머러스한 대답을 했습니다. “이봐, 요셉이가 괜찮다고 데려왔으면 그대로 믿어. 네가 왜 열을 내.” 그 장로님이 연예인교회 구봉서 장로님이십니다.

  여러분, 요셉의 믿음은 우리가 배울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한다 하면서도 내 계획, 내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과 항상 대항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사람에 대한 오해도 풀립니다. 마리아의 순결을 믿어 주는 길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마리아의 잉태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의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의 회개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유효합니다. ‘주 예수여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해야 우리의 죄가 사함을 얻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은 구원입니다. 그 예수의 이름의 뜻이 구원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22절에서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서 예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반드시 새겨야 될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런데 성탄절 캐롤을 보면 예수의 이름이 없는 캐롤이 많습니다. 예수 이름을 찬양하는 문맥이 없습니다. 예수라는 단어는 들어가는데 그 예수 이름을 찬양하는 문맥이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이름 가지고 우리끼리 노는 것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캐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은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인재명이요 호재피라”는 한자명이 있습니다. 인재는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김소월의 초혼에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렇게 이름을 노래하는데 문학적으로는 이런 표현이 평가를 받습니다만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부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은 구원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사죄와 구원과 영광이 충만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헌신 때문에 오늘 우리는 평화로운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결심의 대가

  끝으로 가장 함축적인 의미를 하나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와서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할 뿐 아니라 그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보호하고,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를 탄생하는 그 일을 완성시키기까지 요셉과 마리아는 목숨을 건 모험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에는 대가를 하나님이 요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나면 그 다음 장면부터 면류관이 올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기로 작정을 하고 나면 짐이 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온 그 때부터 무서운 짐이 온 것입니다. 그 일이 탄로 나면 두 사람 목숨은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희생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는 그때까지 순종을 하려니까 그 기간동안 요셉과 마리아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하는 자의 삶입니다. 순종하는 삶의 대가입니다. 하나님이 대가를 요구합니다.
 
힘드니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에는 힘든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힘들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부활의 아침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주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 힘든 것을 감당했던 그들에게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나시는 그 사건에 결정적으로 헌신하고 준비했던 사람들이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의 성탄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요즘 술집에도, 백화점에도 크리스마스 기분이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금년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조금 썰렁합니다. 셋방 사는 교회에 화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생각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성탄준비입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마리아와 요셉의 신앙을 무장할 때 우리도 뜻있는 성탄절이 될 것이고 우리의 삶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성탄절은 세속문화 속의 성탄절입니다. 그러면서도 한갓 우려가 됩니다. 혹시 교회들이 예수 없는 성탄절이 되지 않을까? 예수가 있기는 있어도 저 뒤에 계시라 하고 사람들끼리 노는 성탄절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를 높이는 것이 성탄의 뜻일진대 금년에 우리의 성탄절도 우리 각자가 마리아와 요셉의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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