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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왕이 네게 임하신다.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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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왕이 네게 임하신다. (마태복음 21:1-11)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시고 베다니에 오셔서 하룻밤을 주무십니다. 베다니는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 형제가 살고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루살렘에서 3㎞ 정도 떨어진 ‘무화과의 집’이라고 하는 뜻을 가진 벳바게에 오셨습니다.

벳바게라고 하는 동네에서 두 제자를 건너편 마을로 보내면서 나귀를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묻기를, “당신들, 무슨 지금 뭐하는 거요?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는 거요?” 그렇게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허락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명령대로 해서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경험이 없는 나귀였기 때문에 안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나귀의 등에 자기의 옷들을 벗어서 안장을 만들어서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바디메오 앞을 지나가실 때 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거기에만 따른 것이 아니고 여리고를 나왔을 때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그 길에 계속해서 따라나섰고, 또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출발할 때부터 따라나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수많은 무리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펴고, 손에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예수님의 예수살렘 입성을 환영을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이유를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건과 ,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이 온 예루살렘과 유대로 퍼져나가면서 ‘도대체 예수라는 분이 누구이기에 죽은 사람을 살렸는가?’하는 호기심, 또 ‘그런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로마의 압제 속에 있는 우리나라를 독립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많은 사람이 환영을 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월절이 되어지면 예루살렘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 하면 7백 2십만 명 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 크지 않은 도시에 7백 2십만 명이 모여서 2십 4만 마리의 양을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피비린내가 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에 요한복음 12장 19절 이하에 보면 온 세상이 예수님을 쫓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고, 또 예수님을 이렇게 영접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엄청나게 큰 무리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10절의 표현대로 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까 온 성이 소동했다. 소동했다는 이 원어적인 표현은 땅이 지진으로 인해서 흔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성이 흔들릴 만큼, 지진에 땅이 흔들리듯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런 인파로 인하여서 예루살렘성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이 묻습니다. “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모였는가? 저 분 한 사람을 환영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도대체 이는 누구요?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환영을 하는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이는 누구요? 이 사람이 누군가?”하고 물었을 때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11절에 보면 그 대답이 나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는 이 질문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분이 달라지고 그 인생이 달라지고 크게는 사회와 나라가 달라지는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2천년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때만 사람들이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 여러분은 이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의 왕, 나의 주님이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로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말 내 인생의 주인으로, 내 인생의 왕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모든 것을 다 주장하시는 그런 분으로 모실 때에 여러분의 신분이 하나님이 자녀로 변화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를 책임져 주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진정한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넘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됨의 축복을 누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잘 보고 정확하게 신앙고백하고, 신앙고백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이 사람이 누구냐 - 우리와 같은 사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또 다음날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랍니다. “이 사람이 이런 능력을 행한 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이 사람의 이런 지혜와 권능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 사람을 살리는 이런 능력이 어디서 왔으며, 회당에서 가르치는 그 지혜가 보통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그런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법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정말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 가운데서는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의 아들이다.” 그런 말이 아니고, 이것은 “아버지도 없는 사생아가 아닌가? 이렇게 신분이 천한 사생아인 예수가 어떻게 이런 능력과 이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그런 말이었습니다.

또, “그가 지금은 목수가 아닌가?” 영어로 carpenter가 목수이니까 목수로 번역했습니다만, 본래 이 원어에는 목수라기보다는 막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막노동자입니다. 그러니까 직업도 변변히 없는 예수님이십니다. “그의 형제는 야고보, 요셉, 유다와 시몬이 아닌가? 그 형제들 다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가 너무나도 그의 출생을 잘 알고 그의 자라남을 잘 알고 있는데,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런 능력, 사람을 살리는 능력과 지혜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 당시의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육신적으로만 보았습니다.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만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그렇게 물었을 때에, 그저 예수님을 단순히 2천 년 전에 태어난,  유대 땅에서 태어나서 살다간 그런 인간,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왕으로,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 사람이 누구냐 - 선지자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는 무리가 예수님을 뭐라고 했다고요? 11절에 보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단순히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예수님의 사역을 바라본 사람들은 “이 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라고 본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어서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죽은 자까지 살리는 이런 역사를 보면서 “아, 이분이야말로 선지자구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지자구나.” 그렇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자가 “내게 남편이 없습니다.” “그래,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닌 줄 안다.” 아, 그러니까 이 여자가 자기의 과거를 꾀 뚫어 보시는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고백 했는가 하면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 주변에 예수님을 이렇게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역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상여를 메고 가는 장례 행진을 보았습니다. 그 뒤를 따라가며 비통해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시고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이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그리고 말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상여를 메고 가던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런 기적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광경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이 분은 큰 선지자구나.”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선지자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거의 마쳐져 갈 즈음에 제자들을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데리고 가서 지금까지 배워온 것을 좀 점검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때에 제자들이 “네, 선생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 또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물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을 같은 입장에서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사대성자 중의 한 분으로, 도덕가로,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본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말도 맞아요. 그런데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완벽한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만족하셨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만족하셨습니다. 우리 베드로의 고백을 다시 한번 해보십시다. 같이 하겠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시요, 나의 그리스도시요, 메시야시요,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아들이라는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내 아들’ 그런 개념이 아니고 동질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요, 나의 메시야시요, 구원자시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이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정말 기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벽한 대답은 아닌데, 예수님은 누구냐?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왕이시요,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에 대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이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얼마나 지금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3. 이 사람이 누구냐 -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예수님께서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두 제자를 보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와 새끼가 매어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그 나귀와 새끼를 풀어서 오너라. 누가 말하기를 ‘당신 뭐하는 거요?’ 그렇게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렇게 말했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서를 쭉 읽어보면,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서 일반적으로 ‘인자’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 말에는 ‘우리와 꼭 같은 그런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예수님 자신을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서 한번도 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귀를 끌고 갑니까?”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라고요?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이 예수님이 예수님 당신 자신을 위해서 주라고 한 말은 오늘 이 본문 말씀 외에 다른 곳에는 없어요.
주가 뭡니까? 여기에 말하는 주는 단순히 주인이 아니고 임금이요, 메시야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곧 왕이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내가 곧 메시야다.”하는 이런 표현을  여기에서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예수님께서 내가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그랬습니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뭔가 하면 스가랴서 9장 9절의 말씀인데, 오늘 이 본문에는 조금 줄여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스가랴서 9장 9절에 있는 말씀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여러분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아니, 나귀의 수놈도 아닙니다. 그리고 암나귀도 아닙니다. 새끼를 낳은 어미 나귀도 아닙니다. 나귀 새끼. 아직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경험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겨우 사람을 태울 만한 그런 나귀인 것 같아요.

그리고 여러분들, 소를 밭갈 때 길들여 보면요, 멍에를 메어놓으면 얼마나 안 메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경험이 없는 이 나귀 새끼를 예수님이  탔다고 해보세요. 뛰기도 하고, 바로가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면 위에 있는 예수님이 안 넘어지려고 얼마나 애를 쓰셨겠습니까?  참 우스운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할 때에 ‘왜 예수님께서 타고 가시려고 하면, 말을 타고 가시지 왜 나귀를 타시는가, 또 한번도 사람을 태워보지 못한 나귀를 타셔서 저렇게 고생을 하시고 어려움을 당하시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알았느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아하, 예수님께서 예언된 그 왕이심을 나타내기 위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셨구나.’하는 사실을 부활하신 다음에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신 것도 “성경에 예언된 대로 나는 왕이다. 스가랴가 이야기한 그런 왕이다.”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서 일부러 그 나귀를 탔고, 그것도 한번도 사람을 태워보지 못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신 다음에라도 내가 이런 일을 행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말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그런 일들을 행하고 난 다음에 일부러 숨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신데, 여기에는 “내가 왕이다.”하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도 “내가 구약시대에 예언된 그런 왕이다.”하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나귀의 새끼를 타고 간다 이 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 많은 사람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서 환영을 했습니다. 겉옷은 이불과 같습니다. 상당히 당시에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의 대통령이 오면, 귀한 사람이 오면 카페트를 깔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펴서 당신을 영접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겉옷을 깔고 맞이하는 것은 왕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셨기 때문에 평소에 그런 대접을 받았으면 “너 왜 이러지? 이렇게 귀한 겉옷을 이렇게 못 쓰게 하면 안 돼.” 그렇게 할 분인데, 이 때는 당당하게 그 겉옷을 밟고 왕처럼 올라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왕이기 때문에.

외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쳤는데, 이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 란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야. 왕이여’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왕, 우리의 구원자여, 우리를 이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시오.”라는 고백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니까 참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항의를 했습니다. “예수님, 저 시끄러운 소리 듣지 않습니까? 저 소리 좀 하지 않도록 만류해 주십시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그 말 하지 아니하면 돌들이 일어나서 나에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렇게 할 것이라”고. “그들이 하는 말이 맞다”고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습니까? 또,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에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께서 바로 이야기하기를 “그렇다.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여러 가지 희롱을 당합니다. 물론 거기의 희롱은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배후에는 예수님의 왕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이면 왕관 써야지. 왕관을 씌울 수 없으니까 가시관이라도 써야지.” 그래가지고 가시를 씌워준 이게 바로 예수님에게 왕관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왕은 선조들처럼 흰옷을 입지 않고 붉은 옷을 입었습니다. 붉은 옷을 걸쳐주는 것은 “당신이 왕이지. 한번 왕노릇 해봐.” 그렇게 조롱하는 것입니다. 손에다가 지휘봉 홀을 주는데, “왕은 이런 것을 가지고 지휘하는 거야.” 그러면서 막대기를 들려줍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조롱이지만 왕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그 팻말이 붙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시고 왕으로서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렇게 명령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은 예수님은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또 군림하는 왕이 아니고 정복하는 왕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탄 것이 아니고, 코끼리를 타고 온 것도 아니고, 나귀를 탔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계획

사실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은 왕이 되시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며 복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계획을 하셨어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온갖 행복과 온갖 만족과 온갖 풍족이 다 보장돼 있는 아름다운 장소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그렇게 살기를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뱀의 꼬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 하시더냐? 왜 그런줄 아느냐? 네가 만약에 그것 따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걸 알고 네게 따 먹지 말라고 했어. 따 먹어봐. 그러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되고 하나님의 지배받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어.”
아, 이 아담과 하와가 그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다고 하는 것은 왕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내가 임금 되겠다, 내가 왕 되겠다고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파멸이었습니다. 자기가 왕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모든 축복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이라는 왕을 제거하고 자기 자신이 왕 되겠다고 한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저주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한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내려갈 때는 칠십 여 명이 내려갔는데, 4백여 년이 지난 다음에 2백 만 명의 큰 민족이 되어서 올라옵니다. 올라오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어라.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모든 이야기를 다 순종하면 정말 너는 행복한 나라, 제사장 나라가 되어지고 한 사람이 백을 쫓고 두 사람이 천을 쫓는 능력 있는 민족이 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가나안 땅에서 살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살다가 보니까 다른 나라에는 왕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이야기합니다. “사무엘 선지자여, 우리에게 왕을 주십시오.” 그러니까 사무엘이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신정정치를 하고 있었는데, 아주 매우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내가 다스리고 있는데, 나를 제치고 다른 왕을 달라고 합니다. 기분 나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이 나를 버린 것이다. 왕이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는 줄 아느냐? 너희 아들들 전쟁터에 데려가고, 딸들 데려가서 음식 만들고, 너희의 모든 물질을 세금으로 내게 하여 군비에 충당하는데, 그래도 좋느냐?” 그래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면 왕 한번 받아봐라.” 그래가지고 주신 첫 번째 왕이 사울 왕 입니다. 그 왕 다음에 다윗이 되고 솔로몬이 되어졌는데, 40여 명의 이스라엘의 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왕을 버리고 정치적인 왕을 구하고 그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결국 이스라엘은 망하고 맙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쪽 유대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또 메시야라고 하는 왕을 보냅니다. 이 예수님이 왕이라고, 마태복음 1장에 보면 그 족보가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태복음 읽어보면 왜  처음에 누가 누가 낳고 낳고 낳고 42번을 낳아가지고 이 족보를 넘어가지 못하고 포기하게 하는지, 때로는 좀 귀찮아집니다만, 그러나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는 예수님이야말로 왕이시다, 왕통이다, 바로 다윗의 자손이다 하는 사실을 소개하기 위하여서 거기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왕으로써 박사의 경배와 예물을 받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백성 앞에 세우고 묻습니다. “보라, 너희의 왕이다. 너희의 왕. 내가 너희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아니면 말랴?” 제사장들이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라는 왕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서 유대인은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고, 600만 명이 가스실에서 죽고 비누 되어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는 곳에는 영혼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적으로 이런 파멸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 되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만족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넉넉함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좋은 왕, 좋은 대통령을 모시면 백성이 살기가 좋아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곳은 언제나 참된 생명이 있고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서 2천년 전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마지막에 예루살렘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왕 되기 위하여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편 24편에는 이런 왕의 입성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왕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말하고 있습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지금도 예수님은 영광의 왕으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왕국, 천국을 건설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문들아, 너희 마음의 문들아, 다 열릴찌어다. 그래서 영광의 왕을 모셔드려서 천국을 만들고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천국을 주시기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집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되어집니다.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와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왕으로 삼으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담처럼 “내가 왕이 되겠다. 하나님 제쳐버리고 내가 왕이 되겠다.”하는 그에게는 파멸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하고 정치적인 어떤 사람, 왕을 의지하게 되면 노예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 참된 생명과 축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이 아니라 참된 삶으로,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평강이 넘치고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서 건설되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예수님도 왕이고, 나도 왕이고, 물질도 왕이고, 다른 어떤 사람도 왕이 되어져서, 왕이 여럿이 있어 보세요. 그 마음이 어떻게 평안하겠습니까? 남편이 한 너댓 명 있어보세요. 얼마나 그 아내가 평안을 잃어 버리겠습니까?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한 너댓 명 있어보세요. 얼마나 정치가 혼란하겠습니까? 한 왕이 있어야만 거기에 질서가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라는 왕만이 내 마음의 왕좌에 있어야만 그 마음에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정도 남편도 왕이고, 왕 노릇 하려고 하고, 아내도 주인노릇 하려고 하고, 그러면 두 주인이 날마다 싸우겠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정의 왕이 되면, 모두가 다 거기에 순복하면 질서 있는 가정이 되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가슴에 모셔드려서 마음의 참된 평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가정에 모셔드려서 가정 천국, 우리 교회에, 우리 국가에 모셔드려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정말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보세요. 내 인생의 핸들을 맡겨보세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드려서 내 인생의 계획도, 내 인생의 결정권도, 내 모든 물질의 소유권도 다 주님께 한번 드려보세요. 그럴 때에 정말 우리 마음속에 천국의 지점이 만들어 질 것이고 우리 마음속에 평강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 하나가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 천지가 진동할 만큼 예수님을 환영했는데, 이들이 하루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그때부터 예수님에 대한 딴 생각을 가집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못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라고 외치게 되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일들을 하기가 참 쉽습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입니다. 오늘 주일날은 예수님이 왕이신데, 예배드리는 이시간은 예수님이 왕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딱 교회 문만 나가면 내가 주인이 돼요.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한 주간 동안 내내 내가 주인이 되고, 물질이 주인 되고 어떤 사람이 주인 되고, 예수님을 내 마음의 구석에 처박아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내가 주인 되어있는 이런 비극적인 모습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까지 내내 우리의 마음중심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평안을 주기 위해서 오신,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이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여서 천국을 경험하고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의 그 축복을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기만 하면 아담이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의 그 축복을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을 모신 자들의 자세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하고 대통령하고 비교 안 되겠지만, 대통령을 내 가정에 모신다고 했을 때에 설레임과 준비와 온갖 예를 다 갖추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대통령하고 비교가 안 되는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역사 가운데 오셨습니다. 또 특별히 에수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맞이하여서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맞이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나귀의 주인 보세요. 나귀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 타 보지 아니하는 나귀를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거저 주었습니다. 나귀하면 우리나라로 말하면 소입니다. 요즘 송아지 한 마리가 얼맙니까? 한 3백만원쯤 합니다. 타고 다닐 만 하면 중소인데, 그게 돈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한번도 타보지 못한 나귀를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민수기 19장 2절과 신명기 21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 드리는 제물은 헌 것 아니라 쓰던 것 아니라 깨끗한 것 새 것을 주님 앞에 드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이 나귀의 주인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했겠어요.

며칠 전에도 어느 한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면은 “내가 부산영락교회에서 제일 십일조 많이 하는 사람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요. 지금 여러 가지 환경적으로 힘들지만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분인데, 그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월급을 타면 내 통장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찾아가지고 주님 앞에 십분의 일을 드리려고 하면 그 전에 자동이체로 떨어져 나가는 돈이 있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동이체 되지 아니하는 통장을 따로 만들어서 월급이 들어오도록 만들고, 그것을 찾아가지고 주일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받는 날 그 다음날 새벽에 직접 주님 앞에 드리면 내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손대지 못하게 가장 정성어린 예물을 주님 앞에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복을 주십니다. 내가 영락교회에서 가장 십일조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그분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때에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왕을 대접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영접해야 되겠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들도 무리가 겉옷을 길에 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여러 수백 명이 지나가면 그 겉옷 아마 다 찢기고 못 쓸 거예요. 그 당시의 겉옷이 이불이었는데, 지금 우리 경제적인 사정과 비교하면 여러 수개월 벌여야만 겉옷 하나 살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겉옷을 다 벗어서 예수님 가는 길에 깔고 “예수님, 이 내 겉옷을 밟고 오시옵소서.” 그렇게 영접했다고요.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영접해야 할 것입니까? 동방의 박사들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려서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왕으로 오신 주님을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영접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으로 영접하고, 정말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내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내 가정에 오셔서 내 가정 천국을 이루고, 우리 교회에 오셔서 교회 천국을 이루고, 우리 민족에 우리나라에 주님께서 왕 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여서  정말 평화가 넘치는 나라를 만들어나가는데 앞장서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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