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빛을 주시는 분(세상의 빛) / 요 9:1-7

  • 잡초 잡초
  • 222
  • 0

첨부 1



  본문  요한복음 9:1~7 
  제목 빛을 주시는 분(세상의 빛)


주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을 갖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구주대망 2003년 마지막 달 세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달을 맞이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살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무엇을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예수께서 자주 하셨던 질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주님은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묻곤 했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눈을 바로 바라보시며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지난 몇 주간 동안 우리는 예수께서 무엇을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께서는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셨지만 가르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진 않았습니다. 엄청난 기적을 행하시곤 했지만 기적이 그의 사역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덫에 걸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 오셨습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시려 오셨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려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또 다른 것을 하기 위해서 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두운 곳에 빛을 주시려 오신 분을 만납니다. 그는 한 평생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멀어서 한 번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삶에 찾아 오셔서 신체적으로 동시에 영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9장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눈먼 것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영적으로 눈먼 것을 치유하십니다.

이 나면서부터 소경인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전에 볼 수 없던 우리에게 어떻게 보도록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의 과정에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또 다른 분들을 믿음의 빛으로 인도하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 위해서 “보기를 갈망합니다.”는 소원을 여러분 마음에 가득 채우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하시는 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여러분 자신을 이 소경의 자리에 두시길 바랍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생애에 한 번도 눈으로 무엇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소경이기에 언제나 구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에는 소경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만 뜬다면 내 삶을 달라질 터인데, 모든 것이 변화할 것인데, 볼 수가 없구나,”라고 한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의미에서나 개인적인 의미에서 보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은 진정으로 보고 싶습니까? 소원하지만 여러분이 볼 수 없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부부 생활이 좀 더 나아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까? 신앙생활이 좀 더 개선되는 것을 보고자 합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크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자 합니까? 여러분의 삶이 기쁨으로 넘쳐나는 것을 보고자 합니까? 자녀들과 화해하는 것을 목도하고 싶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마음속에 기록해 보십시오. 그것을 분명하게 하십시오. 그것을 분명히 할 때 주님께서도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지가 분명해 질 것입니다.

네 가지 일이 이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도록 한 후에 네 가지 일이 그의 신앙을 돕기 위해서 일어났습니다. 동일한 네 가지 일이 우리의 삶에도 일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1. 잘못된 양자택일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9장 2절에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면서 이런 유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까? 아니면 부모가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어릴 적부터 배워온 제자들로서는 유일한 선택입니다. 무언가 잘못했기에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잘못입니까? 부모가 죄를 지어서 소경으로 태어났습니까? 아니면 이 사람이 장차 지을 죄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 사람의 형편은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잘못된 양자택일적 사고방식의 결과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꼼짝하지 못하게 사로잡습니다. 그리하여 활짝 열려있는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전혀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기 싫은 이 직장을 그만두면 먹고 살 길이 없어질 거야” “외로이 지내든지 아니면 결혼을 해야 하든지 선택할 수밖에 없어” “이혼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 남자와 더불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든지 둘 중 하나 밖에 길이 없어”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죄책감을 안고 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더 이상 세상 즐거움을 포기하든지 해야 해”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잘못된 양자택일적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무어라고 답하십니까?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은 마치 “너희는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어, 책임전가를 할 사람을 찾고 있군, 잘못된 양자택일에서 벗어나야해, 오히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생각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잘못된 양자택일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실 제 3의 선택을 찾아보십시오. 삶을 다르게 바라보면 지금 당면한 어려움도 새로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힘들게 하는 배우자도 새로운 사역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 그가 문제의 원천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애먹이는 자녀들, 그들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사고방식을 벗어버리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끔찍한 상황도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3의 선택에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어쩔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황을 바꾸시기도 하고 그 보다 더 자주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기도 합니다. 


2.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씨름하는 문제를 두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이 사람은 보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해 예수님은 말합니다.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순종해서 가서 씻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어떻게 기적은 시작되었습니까? 예수께서는 일상적인 일을 명하셨습니다.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명했습니다. 얼굴과 눈을 씻는 일은 날마다 그가 한 일입니다. 어쩌면 이전에 실로암 못에도 가서 씻은 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가 바로 기적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일에 하나님을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비록 매우 일상적으로 보이는 일이라도 그가 명하시면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길 원하실 때에 말합니다. “네 지팡이를 들라” 지팡이를 쳐드는 일은 모세가 이전에도 수없이 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그 성을 돌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나팔을 불라고 합니다. 모두 다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순종의 걸음이 하나님의 기적을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일에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전화 한 통을 돌리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한 통의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 순종하십시오.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때로는 무언가를 두고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도움의 손을 베푸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드려야 할 만큼 드리지 못한 연보일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순종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첫 발자국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적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방법을 기적과 혼돈하지 마십시오. 눈에 바른 진흙이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말로만 명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서서히 밝아오기도 했고 즉시 밝아 모든 것을 밝히 보게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을 두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진흙을 발라야 한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진흙을 바르지 않았다면 눈이 뜨진 것이 아니라고 우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하실 지는 하나님께 맡겨드리십시오.

또한 여러분이 순종한 것을 두고 하나님의 능력과 혼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순종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나팔을 불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실로암 못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은 하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순종의 걸음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도되었으나 역사를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순종이 차이를 만든 것은 틀림없지만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신 모든 일에 대한 찬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이 소경이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절망 가운데 이렇게 부르짖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시 70: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은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 도와 주셔요, 지금 바로 도와주십시오.” 절박한 상황에서 그런 기도 없이 살아온 사람이 있겠습니까?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고 나서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우리의 위기 상황에 하나님은 우릴 사랑하셔서 도와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한 무엇을 기대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본문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나자 그를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가 영적으로도 밝히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 주님은 그 사람에게 또 다른 믿음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새로운 종류의 기쁨을 그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3.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과거를 보십시오. 그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고침을 받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구걸하던 것만을 보아온 사람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들었지만 그들의 얼굴을 본 것은 이제 처음입니다. “그 동안 방송을 통해 목소리만 들었는데, 그동안 책으로만 대했는데 이제 얼굴을 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목소리로만 들어온 사람을 이제 처음으로 보지만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은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하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하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은 이상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보게 된 사실을 두고 함께 기뻐하는 대신에 서로 논쟁을 벌입니다. 도대체 이런 기적은 있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입장이 우세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도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을, 아니면 일어날 일을 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부부생활이 새로워질 수 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라고 주장합니다. “애 먹이는 자식들이 변화한다고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요”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망가진 건강이 새로워질 수 있다고요, 별로 소망 없는 이야기이지요.” “다 망한 사업을 새로 일으킬 수 있다고요, 다 쓸데없는 소리지요”라고 우리의 믿음에 찬물을 끼얹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여러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버려두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시작하신 놀라운 일을 보지 못하도록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하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희망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불꽃을 꺼버리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힘든 삶의 투쟁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불꽃을 사그라지게도 합니다. 그러나 서로 돌아보아 믿음의 불꽃이 점점 크게 타오르도록 도울 수도 있습니다.

여기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보십시오. 이 기적이 안식일에 일어났기에 그것이 없었던 일로 치부하려 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또다시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른 다음에 내가 눈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들의 논리를 들어보십시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더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하여 보일 수 있겠는가?”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습니다.

다시금 눈멀었던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는데,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답합니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하지만 자기 논리에 갇힌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했다면 그는 계명을 어긴 죄인인데 어떻게 죄인이 이렇게 엄청난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는 논리입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자기 논리에 갇혀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까지 나오셔서도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어  하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유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전에 눈이 멀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 부모를 불러다가 묻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들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예,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왜 그 부모가 이렇게 대답합니까? 그것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그 아이가 다 컸으니 그에게 물어 보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의 아름다운 고백을 들어봅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하고 위협적으로 말하면서 다그칩니다.

그 때 이 소경되었던 사람은 답합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을 여러분은 아시지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영어로 보면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나는 전에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았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때는 보지 못한 자들이었으나 이제 보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찬송이 노래하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 사실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한 때 나는 소경이었으나 이제는 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신자입니다. “한 때 불평분자였으나 이제는 기뻐합니다.”라고 말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한 때 소망이 없던 자였으나 이제는 소망이 넘칩니다.” “한 때는 미움이 가득했으나 이제는 사랑이 넘칩니다.”라고 고백해야 건강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와 같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4. 여러분을 구원하실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출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회복하십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구조원과 같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그 본래적인 관계로 우리를 회복하십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실로암 못으로 보냈습니다. 돌아오자 친구들이 지도자들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교회당에서 그를 내어 쫓기까지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에게 이런 일을 겪도록 했을까요? 왜 이 사람 곁에 서서 모든 것을 변호해 주시지 않았을까요?

궁극적으로 주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하늘의 평안을 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체적인 눈을 띄워주는 것이 마지막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지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어려움과 난관을 통해서 이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보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경우는 갑자기 빛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천천히 더 많은 빛을 보게 됩니다.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첫 발을 디디는 날 모든 것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오히려 다반사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마침내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러자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어떻게 구원자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보기 위해서 자신이 영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4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 12:46)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려는 일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에 빛이 찾아오면 우리는 예수께서 좋으신 분 정도가 아니라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빛이심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빛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나누시는 분이 아니시라 세상의 빛이십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이에게 예수님은 다만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뒤에는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뒤에는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분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관계를 갖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그 분께 우리의 삶을 위탁해야 합니다. 결코 강제하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위탁 없이는 제자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맡기지 않고는 주님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가운데는 이미 주님의 도움을 받으신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 도움을 받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업에 도움을 받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결단의 순간에 도움을 받은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그가 믿기 전에도 주님께서는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물론 그 분은 여러분이 바로 믿기 전에도 도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어려운 여정에 있을 때마다 그 분의 도움은 필요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처럼 고백하십시오. “주님, 내가 믿습니다.” 그 때 주님은 여러분의 삶에 빛을 주시고 모든 것을 바로 보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