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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 / 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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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
느헤미야 1:5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후, 자신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참모들에게 소원하는 바를 한가지씩 들어주겠다 했습니다. 전쟁에 지친 참모들은 편히 쉴 수 있는 휴가와 고향을 방문할 경비 등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또 집 한 채 마련해 줄 것을 희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데닉이라는 참모는 “대왕이시여, 대왕이 정복하신 나라들 중에 하나를 내게 허락하여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뜻밖의 당돌한 제안에 다른 참모들은 놀랐습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조금 움찔했으나 곧이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 하나를 그대에게 주겠소. 그대는 나 알렉산더가 나라 하나라도 뚝 떼어줄 수 있을 만한 큰 사람으로 믿었기에 호의를 베푸는 바이오.”

믿음은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믿음은 거세게 밀려오는 운명에 맞설 힘을 주는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자기 운명과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당대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느헤미야가 여러 사람의 방해를 실패로 만들고 불가능 했던 예루살렘 성을 52일만에 쌓을 수 있었던 힘, 그리고 건축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역사적 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힘도 믿음에서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내면과 삶 속에 희망이라는 성벽이 무너진 사람이 있습니다. 희망과 도전이 자라야 할 내 속에 상심과 비탄의 잡초만이 무성합니다. 사명의 성벽은 무너지고 자포자기와 체념으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로 점차 성벽은 무너지고, 그것이 성격의 일부가 되어 오히려 무너진 삶이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다시 세우기가 불가능해 보여 지레 포기했습니까?

바로 느헤미야의 믿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느헤미야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을 믿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잘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정신 의학자 존 화이트는 ‘탁월한 지도력’이라는 책에서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력을 이야기하며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Can”과 “Will”을 믿었다고 평가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다 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고, 간구하고 부르짖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오늘 내 간구를 들어주실 능력의 하나님, 내 간구를 외면치 않고 부르짖는 대로 응답하실 하나님을 느헤미야를 통해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가 믿음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함께 생각해보는 동안 무너진 삶의 성벽들을 다시 쌓는 귀한 역사가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 느헤미야가 믿었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었습니다. 5절 처음 부분,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이여’라는 기도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물질적이고 인간적인 신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며 인간사를 섭리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느헤미야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고백이었습니다. 신명기 7장 21절 말씀,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이 보기에 가나안 족속들은 크고 강대해 도무지 그 땅을 정복할만한 힘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일깨워 주십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크고 두려운 여호와가 너의 중에 계시는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곧 힘과 용기를 얻어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파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허황된 꿈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주저앉은 꿈, 무너져 내린 희망, 다시는 스스로 일어설수 없을 만큼 변질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방비 상태로 이방 적들을 맞이했던 상황보다 더욱더 절망적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과 800마일이나 떨어져있었고 도와줄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아야지 쓰러지고 낙망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 자신의 물질을 넘어서는 하나님, 자신의 지혜를 넘어서는 하나님, 천지를 주관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앞에 닥친 문제가 아무리 크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해결할 수 있음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너진 채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시 설 힘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느헤미야처럼 절망할 순간에 그 일을 능히 감당할 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가 아무리 크고 해결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문제보다 크시고, 능히 다스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만 변함 없다면 문제는 더 이상 크지 않습니다. 작은 문제라 할지라도 나를 돕는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 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문제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물질과 현실 앞에, 사람들이 논하는 조건 앞에 묶여 하나님을 별볼일 없는 신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태풍 가운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를 명하여 물위를 걷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자연을 통치하시는 전지전능의 신, 베드로를 명하여 인생의 물위를 걷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물 위를 걸으라 하셨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좀 전까지만 해도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는 태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태풍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물 위를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파도가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주님을 시야에서 잃어버리기 시작했을 때 물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문제가 커서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 앞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감당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내 물질과 지식, 지혜 때문에 믿지 못합니까? 만약 인간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귐과 이해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을 뛰어 넘는 하나님, 절박한 문제 앞에서 해결할 방법을 가지고 계시는 지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 찾는다면, 오늘 느헤미야에게 있었던 기적이 우리 삶 속에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믿음으로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둘째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에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삶의 환경만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고 삶을 영위할 더 이상의 힘도 없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하나님 주신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약속은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느헤미야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가 강렬하게 기도합니다. 이 민족이 당하는 어려움은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겪는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다시 회복한다면 원래 모습을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고 간구합니다.

신명기 7장 9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2절부터 15절 “너희가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로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은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한 약속으로 신약은 오신 메시아와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합니다. 약속의 궁극적인 초점은 구원입니다.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 우리를 죄 가운데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녀 삼으셔서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도행전 2장 39절에서 약속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약속의 대상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은 누구든지 주를 붙들고 의지하며 주께 나아가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는 약속대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약속대로 하나님께 다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 어떤 절망, 어떤 필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구원의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 바로 우리 희망입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을 보면 그리스도인과 희망이라는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절망이라는 거인에게 잡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절망이라는 거인이 두 사람을 잡아다가 의혹의 성(Doubting Castle), 깊은 지하실에 가두어 버립니다. 빠져나갈 길 없는 막막한 현실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인이 가슴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냅니다. 바로 약속이라는 열쇠였습니다. 시험 삼아 육중한 문을 열어보니 문이 열립니다. 그가 의혹의 성을 통과할 때마다 이 열쇠는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고 결국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절망이라는 거인은 그만 분노로 발작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견고하게 닫혀 열 수 없는 절망의 성 앞에서 의심하며 낙심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속을 믿고 주장하며 약속대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약속을 믿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증거로 받아야 합니다. 가장 희망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 약속이 이행될 것을 믿고 담대하게 기도하는 느헤미야를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내가 죄 지은 모습으로 있으면 약속을 이행치 아니하는 분이십니까? 하나님께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에는 나를 붙들지 아니하는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을 붙들고 주장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축복과 함께 신실하게 이행될 것입니다.

셋째, 느헤미야가 믿은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합니다. 즉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당하는 괴로운 문제를 구경만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닌 함께 아파하시고 동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NLT 영어성경에 긍휼의 하나님을 ‘Unfailing Love’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Unfailing’은 ‘없어지지 않는, 끝없는, 변하지 않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확실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 사랑,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기대해도 어긋남이 없는 확실한 사랑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던 표현이 12번 나오는데, ‘긍휼로 마음을 움직여서’라는 뜻인 ‘스프랑크니조마이’입니다. 스프랑크의 원래 의미는 ‘내장’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 속에 감정의 깊은 것과 속내가 모두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긍휼이 여기신다는 것은 주님의 가장 깊은 내면, 가장 여리고 상처 받기 쉬운 곳까지 다다른 아픔과 고통으로 함께 우리 아픔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실 때에 하나님의 자궁인 깊은 곳까지 움직이시고 요동하시는 분임을 뜻합니다. 주님의 긍휼이 얼마나 깊고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온유와 친절이 숨어있으며, 감정과 정서와 열정이 거룩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로 움직이실 때에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하고 마르지 않으며 다함 없는 하나님의 온유함이 드러납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의 여러 모습 중에서도 긍휼하신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되, 치유를 통해 고통에 함께 동행하시고 동참하십니다. 헨리 나우웬과 두 친구가 정치에서는 긍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기 위해서 어느 날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허버트 험프리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의원이 끝에 조그마한 지우개가 달려있는 연필을 집어 들면서 말했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은 이 지우개와 같은 것입니다. 글을 쓰다 잘못 쓰면 그때 사용하는 것이지요.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긍휼이란 실패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해 인생은 경쟁입니다. 긍휼은 인생의 경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이 말을 듣고 헨리 나우웬은 인간의 속성 중에는 긍휼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같이 긍휼하라.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이 없는 심판으로 내가 너희를 대하리라’

맞습니다. 긍휼은 인간의 속성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긍휼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긍휼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우리 죄를 공감하시며 자신의 아픔처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나서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먼저 구원의 방법을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저와 제 아내가 결혼 후에 가졌던 첫 아이가 8개월째 되던 때에 사산되어 나왔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첫 아이에 대한 기대, 아빠 엄마가 된다는 기쁨, 아이를 향한 설렘이 하루 저녁 만에 끝나버렸습니다. 후유증이 좀 아물던 때 즈음, 아버님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모든 일이 한달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장례만 치르면 마음의 상처와 아픔도 다 사라진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제 속에는 인생을 살아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교인들이 마치 ‘당신은 얼마나 저주를 받았기에 한 달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자식 죽고 부모 죽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냐’,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냐.’흉보는 듯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힘든 일 당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라며 기도하라고 권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을 다시 살아갈 근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저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분 같았습니다. 비 오는 날 버려져 있는 신문조각 같다는 느낌, 누군가 밟아 버려서 찢어진 신문조각 같았습니다.

새벽기도는 의무적으로 참석하고 기도 시간에도 잠만 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조문객을 맞이하는 제 바로 곁에 예수님이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가득 쌓여있던 분노가 사라지면서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하나님,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되지는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고 희망은 없었습니다. 또 새벽기도 중에 제 마음속에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제 팔을 꼬집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팔을 꼬집어 보았습니다. 마음속에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어디서 아야 하는 소리가 들리느냐?’ ‘입에서 나옵니다.’ 이때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머리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 순간 이 고통은 나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이 함께 당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에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쓴 책이 ‘가시지 않는 상처라면’입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내 외로움 알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무너져 내린 내 희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나보다 더 아픈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때부터 제 삶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사람을 볼 때 마음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행복한 듯 하지만 그 속은 멍들고 피나고 곪은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상담을 공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합니다.

사람 마음을 보게 하신 하나님은 긍휼하신 하나님, 고통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느끼게 하셨습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그럴 때마다 위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나 혼자만 외롭고 고통스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주님은 내 이름과 눈물의 의미 그리고 내 방황과 절망을 아십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의 비참하고 고통스런 마음만큼 동참하실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의 성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강렬했으며 지속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가를 통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음을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도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끝이 없으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라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고백했습니다.

한동대 조준모 교수님이 지으신 시가 있습니다. 목사님의 아들로 자랐으면서도 하나님을 잘 몰랐던 자신을 자책하며 앞으로 태어날 아들을 위해서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르게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은 ‘그의 생각’이라는 시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원하시는 분
이 세상 그 무엇 그 누구보다
너와 같이 있고 싶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시는 분
광야에서도 폭풍 중에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이미 무너져 성벽이 무너진 곳에 절망의 잡초만 무성하지는 않습니까? 민족의 상황을 보아도 희망의 성벽은 무너져 낙담과 절망만 가득한 모습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언가 변화되어야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생각만 했지, 불가능 할 것이라 포기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나를 도와줄 능력과 마음을 갖고 계신 분으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약속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 그 사람이 어떠한 죄를 짓고 어떤 상황 속에 있었든지 구원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분이시기에 십자가에서 죄를 대속하신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볼 때에 느헤미야가 세웠던 기적이 우리를 통해서 다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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