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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노래를 부르는 교회(Sing a New Song)” - 시 9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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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6:1-13                                               
“새 노래를 부르는 교회(Sing a New Song)”                                 

오늘은 새해를 맞이하여 두 번째 주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날로 지키는 “주의 수세일”(Baptism of the Lord)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신 것을 뜻하는 날입니다. 이 주님의 세례일이 오늘로 지키게 된 것은 지난 화요일과 연관이 됩니다. 지난 화요일인 8일은 교회력으로 “주의 현현절”(Epiphany of the Lord)이라고 지키는 날입니다. 현현절은 “나타남”이라는 뜻의 절기로서, 교회력에서 부활절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절기입니다.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는 2세기 때부터 지켜졌다고 합니다. 1월 6일이 현현절로 선택된 이유는 그 지역에서는 이날부터 해가 차츰차츰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교회에서는 이 동짓날을 현현절로 삼아 빛의 중생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후에 동방 교회에서는 현현절을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날과 연관을 지으면서 이 날을 축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현현절이 지나고 맞이하는 첫 주일을 예수님의 세례일로 삼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세례일은 현현절과 함께 연관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알게 될 듯싶습니다. 그것은 빛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이 세상에 드러내심으로써 그 영광을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세례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연관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회력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보도록 하십시다. 오늘 본문인 시 96편은 소위 “왕위 등극 시”라고 이름 붙은 시편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왕이 즉위하는 것을 기념하고 노래하는 시는 모두 6개로 오늘 본문의 시 96편 외에도 47편, 93편, 97편, 88편, 149편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임금들이 왕으로서 즉위할 때 부르는 노래의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과 전 세계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러한 시편들 속에 나타나는 “여호와께서 왕이시다”, “여호와께서 왕이 되셨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찬양하며 노래하는 그 모습을 가지고 자기들의 왕이 왕의 자리로 즉위할 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과 그들의 역사가 결합되는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신앙 생활하는 우리들도 꼭 간직해야할 귀한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간직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이나 교회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하는 모습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에는 하나님은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은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시편 96편에 나타나는 말씀을 통하여 좁게는 이스라엘 민족의 바른 신앙자세를 배우고,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에 대한 보다 온전한 이해와 감각을 지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올해 우리 교회는 “예배드리는 공동체”라는 표어를 간직하고 이를 위해 힘쓰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라는 표현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이루어지기에는 바로 이러한 자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란 오랜 세월을 통해서 전해지고 내려온 어떤 숭고함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우리들이 간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와 마음가짐과 자세를 잘 갖출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오늘 본문인 시 96편을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낭독해 보십시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찌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찌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찌어다.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찌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찌로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찌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이 시 96편에서 우리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단어가 2절에 있다고 독일의 구약신학자인 폰 라트(von Rad)는 말합니다. 2절에 우리말로는 “선파하라”라고 번역된 단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모두 모인 자리에 임금님이 오실 때, 사회를 맡은 사람이 “이제 임금님께서 나오십니다. 모두 일어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복음”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복음이란 말의 헬라어가 “유앙겔리온(euangelion)”이란 말인데, 바로 이 “선파하라”는 히브리 단어를 헬라말로 번역하면 이 유앙겔리온이란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오늘날 ‘복음’ 혹은 ‘전도’라는 말인 evangelism이란 말이 나왔지요. 그래서 이 “선파하라”라는 말이 이 시편 96편에서 우리들에게 주는 제일 강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선파하라는 것인가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하신다”는 것을 선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서 임하심을 선파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는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적인 것입니다.

첫째는 “찬양의 의무”입니다.

이 찬양은 1절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새 노래”로서의 찬양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새 노래”란 과연 어떤 노래인가요? 새롭게 찬송가를 작곡하여 부르는 노래를 말씀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말씀하는 이 “새롭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새 것, 혹은 새롭다” 하면 “지금까지는 없었는데 나타나거나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 성경 전도서 1: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뭔가 새로운 게 나온다 하지만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새것이 아니라는 뜻 아닙니까?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새로운 것 혹은 새롭다는 의미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우리 인간적인 모든 상황과 모습을 침묵시킬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이나 힘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 이런 일들이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는데도 선생님이 오지 않습니다. 수업 종이 울리면서 아이들은 조용한 마음으로 공부할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안 오시니까 옆의 아이들과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보니 반 아이들 모두가 옆의 아이들과 이야기하느라고 교실이 시끄러워집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아이가 “야, 선생님 오신다!” 하고 한마디 하면, 순간 조용해지지요. 마치 이런 상황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새로움입니다. 인간의 모든 조건과 모습과 형편을 침묵시킬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이 바로 새 노래입니다. 어떤 아이가 “야, 선생님이 저기 오신다!”라고 외치는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선파하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새 노래의 가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오셨다!”라는 내용의 가사입니다. 그러면 이 새 노래의 곡조는 어떤 곡조이겠습니까? 오늘 시편을 읽어보면 그 곡조의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어떤 곡조입니까? 기쁨의 곡조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에 임하셨다면,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오심으로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나오는 모습이 바로 찬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운데에 나타나는 찬양이란 우리 인간에 의해서 계산될 수 있는 그러한 것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벌써 이루어진 것을 확신하게 되는 찬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습을 11-12에서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은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찌로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불러야 할 “새 노래”로서의 찬양의 의무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과 의미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의 선포에서 오는 이러한 거대한 기쁨을 간직하고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쁨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규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심으로 우리 인간의 모든 상황을 침묵시키고, 판단하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깨닫고 또 이를 증거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파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이것이 우리가 꼭 불러야 할 “새 노래”인 것입니다.

둘째는 “온 세계에 대한 선포”의 의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신앙의 담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민족의 신들을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성경 당시 다른 나라의 종교적인 자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다른 민족은 자기들 스스로만을 종교적으로 고립시키고, 자기들의 신화 속에만 머무르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러 다른 민족들과, 세계 역사와 그리고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 활약하고 있는 세력들에 대해서 알고 있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간직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이방 세계를 향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떳떳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3-5절에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배타적이거나 독단적인 모습이나 자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7절과 10절, 그리고 13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여호와께 돌릴찌어다,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찌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찌로다,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왜 이렇게 이방신은 헛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는 선포를 하면서 떳떳하고 그리고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운데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때에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로 세우시는데 있어서 책임을 지시는 분이심을 선포하고자 하는 그 의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13절의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판단하신다(히브리어로는 ‘샤파트’)”는 표현이 세 번 나오는 것을 압니다(원문에는 두 번). 그런데 여기 나오는 “판단”이란 말은 심판이란 말인데, 이 심판한다는 말은 벌을 준다는 의미에서의 심판(독일어로 Strafgericht)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정해 준다(schlichten)”, “바르게 되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의 심판 즉, “돕는 심판”, “구원하는 심판”이란 의미의 뜻입니다. 이는 다른 이방종교가 자기들의 신을 자랑하는 그러한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을 믿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식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이 오실 때에 이 세상을 바로 잡아주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책임을 떳떳이 선포하는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는 “공평하게 판단”(11절), “의로 판단”(13절), “진실하심으로 판단한다”(13절)라는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이나 교회도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유일성을 전파하는 모습은 기독교의 배타성을 드러내기 위함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대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진실한 판단에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 모습 속에 바르게 되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손길이 있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소식을 우리들과 이 세상에 전하시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고 이 세상에 나아오신 것입니다. 새 노래의 찬양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저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이 세상의 어두움의 세력을 향해 참된 빛을 전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 자신의 몸을 이러한 빛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죽음의 상징인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우리 세대에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이 왕으로 오심을 전하는 의무, 그리고 신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이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으로 선포하는 그 의무를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기도>

독생자를 이 세상의 빛으로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귀한 뜻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옵니다. 이 예수는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으로 나타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졌습니다. 오늘날 저희들도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새 노래로 우리 인간 세상의 모습을 잠잠케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왕 되신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새 노래를 기쁨 가운데 부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아울러, 저마다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나름대로의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이 어두움의 세계와 사람들을 향하여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하나님을 증거 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스스로 이러한 기쁨 가운데, 그리고 공평과 의와 진실함으로 우리를 통치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모습이 되도록 성령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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