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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란 무엇인가(23) “대적하고 분열하는 것” / 왕상 11:26-40, 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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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23) “대적하고 분열하는 것”         
왕상11:26-40, 겔37:15-23

인간의 역사는 적대와 분열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역사는 화해와 통일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싸우고 분열하지요. 그러나 십자가가 가는 곳에는 화해와 통일이 있습니다. 죄는 적대와 분열을 초래하고 은혜는 화해와 통일을 가져 옵니다. 뱀은 적대와 분열의 상징이고 십자가는 화해와 통일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심각한 문제는 적대와 분열입니다. 세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아침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23번 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대적하고 분열하는 것”입니다. “대적하고 분열하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죄란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그만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도 죄란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성도들이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교회에 새로 나오기 시작한 김한수씨는 강변교회에 와서 들은 설교 중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설교였다고 말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언제나 마음을 열고 설교를 듣는 김기배 집사님은 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는 평생 껍데기 신앙 가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박치원 장로님 이영란 전도사님 등도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설교를 읽은 송명희 시인은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나의 애인이신 목사님, 마음이 통하고 생각이 같으면 사랑하는 애인입니다. 감추고 숨기면서 배설치 못하는 문제들로 많은 사람들이 욕을 자처하며 더 크게 병들어 가는 세상입니다. 그 포근하고 정겨우신 모습 늘 존경하며 그립습니다.” 설교를 매체로 감동을 받으며 마음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고 느낌이 통하고 믿음이 통하고 사랑이 통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축복해 주실 때 피차 마음과 생각이 통하는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 강변교회 성도들이 설교를 매체로 감동을 받으며 마음과 생각과 사랑이 통하는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는 죄 중에서도 비극적인 죄인 대적하고 분열하는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가정이 나뉘어지고 교회가 나뉘어지고 민족이 나뉘어지는 것보다 더 비극적이고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서 분열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이고 불행한 죄는 없을 것입니다.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형제가 동족이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고 분열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이고 불행한 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적대와 분열이 극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제일 많은 나라가 되었고 자녀와 부모가 대적하는 나라가 되었고 동족이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는 불행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적대와 분열로 이어진 인간의 역사와 화해와 통일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단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인간의 역사는 적대와 분열의 역사입니다.

적대와 분열의 역사는 가인과 아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적대와 분열의 역사는 야곱과 에서에 와서 민족주의로 발전했습니다. 적대와 분열의 역사는 여로보암과 르호보암때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이 세가지 사건들을 간단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 적대와 분열은 가인과 아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하고 대적하다가 아벨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4:8). 두 형제의 적대와 분열의 원인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가 못 되는 것을 싫어한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비롯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이 분하여 아벨을 미워하고 대적하다가 그를 쳐 죽였습니다. 두 형제의 적대와 분열의 원인을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죄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리고 서로에게 죄를 돌리며 부부 싸움을 했습니다. 부모의 적대와 분열을 목격한 가인은 아벨을 대적했습니다. 가인과 아벨 두 형제의 적대와 분열에서 인류의 역사는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과 땅의 도성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적대와 분열은 히브리민족의 역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2) 적대와 분열은 에서와 야곱에 와서 민족주의로 발전했습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을 미워하고 대적하다가 서로 분열했습니다. 야곱은 간사해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자기가 몽땅 가로채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에서는 방성대곡하면서 동생 야곱을 미워하며 죽이려고 했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창27:41). 두 형제의 적대와 분열의 원인은 역시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가 못 되는 것을 싫어한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비롯했습니다. 자기만 복을 가로채서 받으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비롯했습니다. 에서와 야곱 두 형제의 적대와 분열에서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야곱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이 생겼고 에서에게서 아랍 민족이 생겼습니다. 두 민족은 지금까지 서로 적대하면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적대와 분열은 히브리 민족 역사에 비극과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3) 적대와 분열은 여로보암과 르호보암때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져서 서로 대적하며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신복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하고 북쪽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습니다. “솔로몬의 신복 여로보암이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왕상11:26).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을 공회에 청하여다가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으니”(왕상12:20).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부친 솔로몬보다 백성들을 무겁게 괴롭히면서 남쪽에 유다 나라를 세웠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왕상13:21). 그 후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남북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남북의 적대와 분열의 원인은 솔로몬의 우상숭배의 죄와 함께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반역의 죄에 있었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는 그후 계속해서 동족 상쟁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남북이 모두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여년 동안 극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상숭배의 죄와 더불어 적대와 분열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로시대에 바벨론에 잡혀가서 그곳에서 예언한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에스겔이었습니다. 그는 적대와 분열의 죄 값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다와 이스라엘의 모습을 마른 뼈들로 묘사했습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겔37:11). 여기 이스라엘 온 족속은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모두 가리킵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37:11). 적대와 분열의 결국은 심판이요 죽음이란 사실을 묘사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와 히브리 민족의 역사에 나타난 적대와 분열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죄는 적대와 분열을 초래하고 적대와 분열은 심판과 죽음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역사는 화해와 통일의 역사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적대와 분열의 죄 값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가서 마른 뼈가 된 이스라엘 족속들의 절망적인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마른 뼈가 살아나서 다시 남북이 하나가 되는 희망적인 예언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를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겔37:15-17). 두 막대기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가리켰습니다. 하나님은 남북의 적대와 분열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지난 11월 방지일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남북으로 갈라져서 싸우며 범죄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려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호6:4).
하나님은 적대와 분열의 죄 값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죽어가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시 살리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비결 두 가지를 여기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말씀과 또 하나는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겔37:16-19).

여기 ‘네 손’은 선지자 에스겔의 손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종들의 손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내 손’은 하나님 자신의 손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손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예언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와서 이루어졌다고 해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적대와 대결과 분열이 극복되고 하나가 되는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 안에서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종들의 손 안에서 적대와 분열이 극복되고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물론 완전한 화해와 통일은 역사의 종말에 가서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십자가 시대에 이미 부분적이나마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화해와 통일의 역사가 이미 신약시대에 와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손 안에서 그리고 빌립과 베드로의 손 안에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가 하나되는 화해와 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손 안에서 그리고 베드로의 손 안에서 예루살렘과 가이사랴가 하나되는 화해와 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손 안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의 손 안에서 예루살렘과 소 아시아가 하나되고 예루살렘과 마게도냐가 하나되는 화해와 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손 안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의 손 안에서 예루살렘과 아덴이 하나되고 예루살렘과 로마가 하나되는 화해와 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명이 바로 화해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느니라”(고후5:18).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셋째 오늘 우리들이 이루어가야 할 역사도 화해와 통일의 역사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들을 향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옛날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과 꼭 같은 말씀이고 사도 바울에게 하신 말씀과 꼭 같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를 나와 화목하게 했고 또 너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노라.”

우리들에게 주신 직책과 사명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가정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일이고 둘째는 교회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일이며 셋째는 사회와 나라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되게 하는 비결은 오직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지위와 자기의 체면과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영광을 버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십자가를 붙잡을 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사고방식과 생활방식과 종족의 모습이 다른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십자가를 붙잡을 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개 같은 사마리아 사람과 돼지 같은 아랍 사람과 쓰레기 같은 세리와 창기를 받아드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십자가를 붙잡을 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그저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만남의 상징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거저 만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도 이방인도 흑인도 모슬렘인도 일본인도 북한인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모두 그저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십자가를 붙잡을 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십자가의 정신으로 가정에서 하나 되게 하는 일을 잘 하고 있지만 더욱 더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새로 나오시는 분들 중에서 가정이 하나되게 하는 일을 잘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상봉 집사님, 이혜원 집사님, 박종서 집사님, 조현덕 집사님, 김홍영 집사님, 권덕영 집사님, 김기배 집사님 등등이 가정에서 화해와 화목을 이루는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강변교회 안에서 화해와 화평을 이루는 일을 잘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흥규 장로님, 한도정 권사님을 비롯해서 백혜란 집사님, 박영희 집사님, 박정희 집사님, 노오현 집사님 등등이 강변교회 안에서 화해와 화목을 이루는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강변교회가 한국교회와 사회 안에서 화해와 화목을 이루는 일에 앞 장 설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강변교회가 교단을 초월해서 원로 및 지도자 분들을 초청해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한국교회 안에 화해와 화목을 도모하기 위함이고, 사랑의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도 지역사회 안에서 화해와 화목을 도모하기 위함이고, 북한 동포들을 돕는 것도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도모하기 위함이고, 조선족 및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돕는 것도 조선족과 외국인들과의 화해와 화목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오는 1월 29일 서로 갈등을 빗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사역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해서 화해와 협력을 이루는 일을 계획하고 있고, 오는 4월 25일 주일 오후 5시에는 영락교회에 10여 교단의 지도자들과 성도들과 성가대가 한 자리에 모여 한국교회 연합예배를 드리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힘써야 할 두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영성과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고 둘째는 적대와 분열을 극복하고 화해와 통일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가정과 교회와 사회 안에서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고 설교를 마칩니다.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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