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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문난 믿음 (살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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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믿음
살전 1:1-10

데살로니가 교회는 가장 모범적이요 은혜스러운 교회였습니다. 별로 책망할 것이 없고 남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칭찬과 감사의 조건이 넘치게 많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믿음과 소망의 생활을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도 지킨 믿음
일본에 하세가와 다모쯔 장로는 일평생 예수님의 사랑으로 결핵환자들과 고아와 미망인과 불우한 노인들을 보살펴 일본을 사랑의 도가니로 융화시킨 인물입니다. 그가 청년 때 중일전쟁에 출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주여,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 저는 싸움터에 나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에서 '살인하지 말라.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컨대 단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죽이는 일이 없도록 지켜 주옵소서. 저는 중국 사람을 사랑합니다. 부족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전쟁이 끝나도록 하는 일에 저를 써 주시옵소서" 라고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살상용 군도와 권총을 살 돈이 없습니다" 라고 신고함으로써 스스로 장교로서의 임관을 포기하고 일반병으로 입대했습니다. 일본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중국의 전쟁터에 갔습니다.

그런데 첫 출정에서 우연히도 중국에서 홍수를 만나게 되었고 다모쯔는 강변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중국 어린아이를 구해 주게 되었습니다. 이어 그는 홍수로 집과 가축, 식량, 가족까지 떠내려 보낸 많은 수재민들에게 구호 양식을 공급하고, 많은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기도한 대로 중국 대륙에서 4개월의 전쟁 기간을 보내면서 그 동안 한 사람의 중국 사람도 다치게 하지 않았고, 죽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수백이 넘는 중국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기 전에 드린 철야기도가 응답되어진 것으로 믿고 감사했습니다.

기도에는 어떤 다른 조건도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믿음이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그 같은 기도를 해보십시오.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신앙인은 좋은 소문 아름다운 소문을 퍼뜨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15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소문이 나려면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의 영역 안에 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원받은 천국의 백성은 성경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행한 사람과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과는 생명과 사망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후에는 그 믿음을 삶 속에서 나타 나야만 합니다.
한 여행자가 그랜드캐니언 가장자리에 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굴렀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는 간신히 매달여 있었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해줘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이다."
"주님, 당신이 거기 계신다면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구해 주마.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넌 나를 믿느냐?"
"주님, 제가 확실히 믿습니다. 주님, 저는 매주일 교회에 나갈 뿐 아니라 새벽기도회에도 나갑니다. 헌금은 몇 달러씩 합니다."
주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네가 정말로 날 믿느냐?"
"제가 얼마나 당신을 많이 믿는지 모르실 거예요. 저는 당신을 믿어요."
"좋아! 그렇다면 이제 붙들고 있는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그렇지만…… 주님……"
"정말 나를 믿는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네 손을 떼거라."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절규하며 부르짖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이 없소!"
믿음-신앙이란 결단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이 끝나는 데서 무한영생의 세계가 열리고, 일상적인 경험과, 재고 튕기는 계산기를 던져버려야 하늘 창고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보여지는 것만 믿는 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행위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곧 믿음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을 통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성도로서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놓아야 할 것을 못 놓고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죄악가운데 죄악된 모습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믿음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소문을 퍼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이 생활 속에 깊숙이 젖어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거나 귀하게 여기는 것 때문에 믿음의 행위들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놓을 것을 놓을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의 생활을 통해 좋은 소문을 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소문이 나려면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캠피스는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즉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 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가올 십자가의 잔에 대하여 고민하고 슬퍼하였으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인류 구속의 대속물로 드려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이란 자신을 희생하여 줄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돈타령 노인’으로 불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물려줄 자녀도 없었으나 밤낮으로 돈을 모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돈만 아는 수전노’라고 놀려댔습니다.그의 재산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그의 장례식을 치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청 직원들이 대신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언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마르세이유 시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식수 때문에 질병에 걸려 일찍 죽는 것을 수없이 목도했다. 내 삶을 희생해서라도 시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주위의 욕을 먹어가며 돈을 모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나의 모든 재산은 시청에 기부한다. 이 기부금으로 시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기를 바란다”
사랑은 ‘나’를 희생해 ‘너’를 돕는 것이다.
사랑은 가장 큰 은사로서 세상에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받는 즐거움이 아니라 주는 기쁨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가 함께 하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수고가 없는 말만의 사랑은 거짓 사랑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이 있는 성도 교회가 되어야 정말 소문난 성도, 소문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문이 나려면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소망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낮고 천한 물질에 대한 소망이 있고 어떤 사람은 높고 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가 219장, 337장, 434장, 492장과 같은 감동적인 곡들을 23곡이나 작사한 화니 크로스비(F. J. Crosby)의 이야기입니다. 화니는 생후 6주 만
에 시각장애인이 되어 평생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불평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그녀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 많은 은사들을 당신에게 주시면서 왜 시력을 주지 않으셨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자 화니 크로스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께서 제 눈을 뜨게 해주시길 바라지 않아요. 왜냐면 저는 제가 처음 보게 될 분이 바로 천국에서 뵙는 주님이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녀가 만든 찬양곡들은 모두가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모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소망하는 진정한 비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찬송 안에는 천국에서 주님을 뵙겠다는 구절이 아주 많습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맑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231장)
** 나그네는 항상 본향을 바라보며 간다 **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이루는 데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소망을 이루는 데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농부가 갖는 소망은 추수의 소망은 일년 동안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학생의 학업 대성의 소망은 십수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직업인의 영달의 소망은 평생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인내도 커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바라는 성도의 소망이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큰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최대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큰 소망을 이루기 위해 많은 인내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내한 만큼 우리는 소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며 소문난 신앙인으로 멎진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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