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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전도회설교] 섬기는 사람들 (눅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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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8:1-3
섬기는 사람들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가장 헌신적인 선교팀을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갈릴리의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여러 여자들입니다. 

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많습니다. 그 중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는 성경에 14번이나 이름이 나오는 참으로 헌신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높여진 자라는 뜻이 있으나 이 여자는 그 이름의 뜻과는 달리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일곱 귀신이 나간 자라고 소개 하고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란 말은 말 그대로 일곱 가지나 되는 귀신에게 씌웠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7이란 숫자를 완전 숫자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일곱 귀신 들렸다는 것은 병의 증세가 매우 심하다는 뜻입니다.

그 병이 정신병인지, 육체적인 질병인지, 아니면 실제 귀신이 들린 것인지, 귀신들린 여자로 취급받을 만큼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비웃음과 소외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는지 오늘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삶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쳐 주셔서 일곱 귀신의 역사를 벗어버리고, 이제 새 사람, 새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런 일곱 귀신 들렸던 보잘 것 없었던 여인도 주님을 섬길 수 있구나 하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여인도 주님을 극진히 섬겼거늘, 하물며 오늘 이렇게 많은 은혜와 축복을 덧입고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이야 더 주님을 아름답게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가 등장합니다. 당시 왕의 청지기 자리는 오늘날 대통령 재정담당 보좌관이나 재경부 장관과 같은 자리입니다. 따라서 구사는 당대의 뛰어난 실력가였을 것이며, 부와 권력을 모두 소유한 막강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요안나는 이렇게 남이 부러워 할만한 남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류층 귀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보다 부귀영화보다, 예수님 따르는 것을 선택한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이곳 한 곳에만 나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의 신분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먼 친척뻘이 된다고 합니다. 수산나는 백합을 말합니다. 

비유컨대 막달라 마리아는 야생의 들꽃이요, 요안나는 왕의 궁정에 핀 장미라고 한다면 수산나는 백합같이 아름답게 헌신의 꽃을 피우는 여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이들 뿐 아니라 이름을 모르는 다른 여러 여자들이 함께 하여, 예수님의 선교 사역을 도왔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는 몇 가지 신앙의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다 체험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통해 병 고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병이 자신의 병일 수도 있고, 남편의 병이나 자식의 질병일수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을 치료받고, 요안나는 요한복음을 추적해 보면 아들의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그들의 체험적인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변함없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혹 오늘 우리의 육신의 질병은 고쳐주신 일이 없을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저주받은 영혼의 질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사람의 육신은 한 번 고침을 받아도 또 다시 병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치유는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은 요즈음 기적적인 은사뿐 아니라, 의사의 치료에 의해서 대부분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치유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로서도 고침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으로부터 해방 받은 여인들이 그 체험적인 신앙으로 열심히 주님을 사랑했거늘,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영생을 얻은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어찌 주님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의 체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갈릴리 여인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뭐니뭐니해도 체험입니다. 머리 속에 성경 66권의 내용을 꿰뚫고 있어도, 신학에 박사가 되어도, 내 체험이 없으면 든든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제껏 신앙생활 해 오시면서 아마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 체험을 나누는 것이 간증입니다.

얼마 전 연세 많으신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장로님은 6.25 당시 국군으로 싸우셨는데, 한번은 부하 장병들을 이끌고 부대 밖 교회에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전장터에서 심신이 피곤하고, 또 굶주리고 힘든 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예배를 마치고는 그 교회 전도사님이 점심식사나 하고 가시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차린 음식은 별 것 아니었지만, 전도사님은 군인들을 위해 눈물로 식기도를 하시는데, 얼마나 큰 감동이 되는지, 모두들 음식을 앞에 놓고 펑펑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고 합니다.장로님은 당시의 그 기도를, 그 기도의 감동을 오늘날까지 잊지를 못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기도가 당신의 신앙을 오늘날까지 붙들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젊었을 때의 연애 감정보다도 더 진하고 감동적으로 오늘날까지 마음 깊이 남아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로 오직 신앙의 외길을 걸어 왔노라고 간증하십니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만난 체험입니다. 인생의 고비에, 혹은 힘들고 어려운 때에,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이 체험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더 귀한 체험은 진정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체험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이 예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 여인들처럼, 체험한 은혜가 감사해서 그저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 이들은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끝까지 잊지 않고, 나아가서 예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중에 도리어 배은망덕하고 배신하여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갈릴리 여인들은 그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봉사했습니다. 헌신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충성하되 죽도록, 죽기까지 충성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 다니되, 한 번 두 번 다니다가 슬그머니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열심히 봉사하면서 신앙생활은 하되, 한 해 두 해 열심히 하다가, 그만 시들시들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됩니다. 기왕 믿으려면 한 번 열심히 믿어야지요. 일단 신앙 생활하기로 했으면, 때로 피곤하고, 때로 어려운 일이 있고, 때론 유혹이 있어도 좀 이런 것들 다 훌훌 떨쳐 버리고, 열심히 씨름해 보아야지요. 내가 뿌리를 뽑아야겠다, 이 적극적인 자세로 신앙 생활하는 이를 예수님은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믿되 열심히, 일하되 끝까지, 은혜를 알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담대히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우리 주님은 놀라운 하늘의 은혜로 그 심령 심령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에 대해 감동 깊은 얘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 서머나 교회는 폴리캅이라는 목사님이 참 헌신적으로 목회하시면서 지켜 오셨습니다. 로마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에 이 늙으신 폴리캅 목사님이 그만 잡혀 왔습니다. 그런데 폴리캅의 신앙 인격에 감동받은 심문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영감님, 영감님 같이 고귀한 인격을 갖춘 분을 재판해야 하는 제 자신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제발 부탁이니 그저 입으로만, 앞으로 예수 믿지 않겠다고 한번만 말씀하세요. 입으로 한번 말하고, 이 박해가 끝난 뒤 슬그머니 예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당신을 처형해야 할 내 자신을 봐서라도 한번 예수를 부인하세요.

그 때 이 폴리캅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내가 80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예수님은 한 번도 나를 배반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이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굶주린 사자들에게 물어 뜯겨 순교했습니다.

갈릴리 여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일평생 간직하면서, 어찌 이 은혜를 갚을꼬? 하는 고귀한 심령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우리도 오늘까지 나를 한 번도 배반하거나,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인들 모두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이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서 자기들의 재물로 주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보살펴 드렸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이든지 주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거짓된 사랑은 오히려 받기를 더 즐거워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음을 깨달을 때가 진정 사랑할 때입니다.

이 여인들은 아낌없이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것도 한 마음이 되어서 섬겼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바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린 여자였습니다. 요안나는 귀족 출신입니다. 수산나는 평범한 여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고,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의 구별이 없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직 함께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자였기 때문에 고대 사회에서 설교를 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을 불편함 없도록 여러 가지로 공급해 줄 수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소유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예수님을 섬긴 것입니다.

어떤 구두방 주인은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그런 기회나 자격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느 가난한 신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구두 만드시는 노인은 이제 자기 일생동안 그 신학생의 구두를 담당하기로 자청하고 약속했습니다. 자기가 설 수 없는 강단에 자기가 만든 신이라도 올라가기를 바란 것입니다. 자기가 갈 수 없는 가정에 자기가 만든 구두가 심방을 간다는 것이 보람이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로 이 분은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고질적인 심장병으로 거의 평생을 병원에서 보내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 머리맡에는 항상 성경책과 더불어 공책이 한 권 놓여있어서, 그 공책에 무엇이 쓰여 있는가 보았더니 사람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이름입니까? 물었더니, 나는 병원에서 남의 신세나 지고 살아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침상에 누워서 기도하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공책에 내가 기도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이 공책을 보면서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시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제 이름도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분의 기도로 말미암아 부족하나마 저도 목회 사역을 은혜 가운데 감당할 수 있었음을 두고두고 기억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지 사랑이 짧아 섬기지 못할 뿐입니다. 갈릴리 여인들은 진정 함께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넷째로 이 사람들은 끝까지 충성스럽게 주님을 따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은 30냥에 판 사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버리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갔던 비겁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소심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이 지켜보았습니다. 주님의 시체에서도 떠나지 못했습니다. 진정 사랑에는 두려움을 내어 쫓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지키는 여인이 되었고, 영광스럽게도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이자 증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선포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이 첫 증인이 바로 이 갈릴리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입에서 우리 기독교의 증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정말 이 사람들은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에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선교 후원회 팀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갈릴리 여인들보다 더 아름답게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성도들을 주님은 보고 싶어 하십니다. 누가 그 일을 감당할 것입니까?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나를 부르시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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