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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갑절의 영감을 주옵소서(삿 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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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절의 영감을 주옵소서(삿3:7-11)

가인의 영이 역사하는 듯합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죽인 가인처럼 사람들이 울분을 참지 못합니다.
주차시비를 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무고히 어린이를 죽이기도 하고, 등교하는 하는 초등학생을 폭행하기도 하고, 차를 파출소로 돌진하기도 합니다.
저마다 사람들이 분을 삼키지 못하고 폭발하는 시대에는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성령 충만한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영성이 없으면 나 자신도 이기지 못하고 세상도 이기지 못합니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갑절의 영감을 구해야 합니다. 시대가 조급증에 걸리고 분냄이 도에 지나칠 정도가 될 때는 더욱 갑절의 영감을 구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가 빛을 잃어갈 때는 더욱더 갑절의 영감을 구해야 시대정신에 함몰되지 않고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구약에 엘리야가 승천하기전 엘리사는 갑절의 영갑을 구합니다
(왕하2:9)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왜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했겠습니다.
그 시대가 하나님을 버리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있을 때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쉽게 버렸습니다. 우상들을 섬기고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 앞에서 음란한 짓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능력의 종인 엘리야가 있어도 사람들은 신앙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엘리야가 다들 주님을 떠났고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고 부르짖겠습니다. 하나님은 순수 신앙을 가진 7000명이 남아 있다고 하셨지만 전 인구의 7천이면 극소수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엘리야같은 능력의 종이 있어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는데 엘리야가 승천하면 그 다음 사회는 어떻게 됩니까? 갑절의 영감을 받지 못하면 그 다음 세대를 책임질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세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맘몬주의와, 성적 쾌락과 폭력을 은근히 즐기는 세속주의 속에서 믿음을 유지하고 믿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에 갑절의 영감이 없으면 있는 믿음도 다 빼앗기고 숨막히게 신앙 생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사는 무슨 신비한 능력을 행하기 위해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있는 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들 하나님을 버리는 시대에 어떻게 여호와 신앙을 유지하고 전하여 민족을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구한 것이 갑절의 영감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갑절의 영성이 없으면 세속주의와 맘몬주의에 함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여호와 신앙을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갑절의 영감이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 민족은 고사하고 성남시는 고사하고 저는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들만이라도 세속주의와 싸워 이기고 맘몬주의와 싸워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마저 신앙의 힘이 없이 겨우 신앙의 끝자락만 붙들고 있으니 더욱더 갑절의 영감이 필요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교회에 등록한 성도들은 한명도 잃지 않도록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교회 왔다가 믿음이 떨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작년에 70명 등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반 이상이 다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한 생명이 구원받아 마귀의 밥이 되어 세상에 빠진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 것입니까? 이것 때문에 울 수 있는 분들이 많아야 합니다. 저는 저의 무능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갑절의 영감이 없으면 우리 교회에 등록된 성도들의 믿음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남시와 나라의 어둠의 영의 활동을 대적하며 여호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구해야 합니다.

왜 갑절이 영감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보냈습니다. 이유가 있기에 보낸 것입니다. 잘먹고 잘 살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거룩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거룩한 땅이 되게 하기 위해 보낸 것입니다.

고대에는 경찰 제도가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힘있는 자가 법이요 정의였습니다. 지금처럼 나라 개념이 가나안 땅에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부족들이 있었는데 그 부족들은 거의가 마피아 수준입니다. 온간 모든 죄들을 다 짓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장에 아도니베섹은 부족의 족장 왕 70명을 잡아 엄지 손,발 가락을 끊고 짐승처럼 기어서 먹게 했다고 합니다. 그 시대에 동성연애도 팽배하였고 온갖 죄악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경찰 국가로 가나안에 보낸 것입니다. 죄를 청소하라는 것입니다. 정의가 하수처럼 공법이 물처럼 흐르는 거룩한 땅을 만들라고는 것입니다. 죄를 합법적으로 짓는 모든 우상들을 부수어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쫓아 버리고 거룩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구경삼아 가나안에 간 것이 아닙니다. 잘 살기 위해 이민들을 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거룩한 땅을 만들기 위해 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세상에 파송을 하였습니다. 부활후 처음에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서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에 복음을 가지고 가서 죄와 저주와 사망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전권대사들입니다. 그냥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먹고 잘 사는 것은 두 번째 목적입니다. 첫 번째 세상에 보냄을 받은 목적은 복음을 통하여 가인의 영을 받아 어두움의 일을 행하는 세상을 구원하는 목적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고 보낸 것입니다. 복음으로 죄를 다스리라고 보낸 것입니다. 복음으로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를 만들라고 보낸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가 되고 거룩한 세상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에덴의 은총을 회복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들이 직장에 가는 것은 직장으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학교에 가는 것은 학교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 것은 그 가정으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 가정에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거룩한 가장을 만들라고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직장에 복음을 전하고 뇌물 문화가 변화되도록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성실과 열심히 살아도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주어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는지 확인하셨습니다. 그것이 시험입니다. 정말 중심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는지 확인하기 위해 열국을 남겨 주셨다고 했습니다.

1절에 전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험하려 하사 열국을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4절에 남겨두신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했습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란 정복 전쟁의 경험이 없는 자라는 뜻도 있지만 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보냄을 받았는지 그 정신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는 말입니다.
경찰이 왜 현장에 출동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도박판을 덮치기 위해 가서는 같이 도박이나 하고 있다면 경찰의 정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경찰을 승진  시키겠습니까? 해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마치 경찰이 도박판을 덮치려 가서는 그들도 사람인데 봐주어야 한다든지, 고위층의 자녀들이니까 건드리면 안된다든지.. 이렇게 나오면 이것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힘없고 약한 자는 구속시키고 강하고 고위층은 불구속 시켜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피아 조직같은 죄악이 차고 넘치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체포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잘 감당하나 시험하신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나 시험하는 것입니다. 결과에 따라 징계를 받을수도 있고 상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냄의 목적이 이루어야 합니다. 만약에 보냄을 받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징계를 받습니다.

1. 보냄 받은 자가 타협의 정신으로 살면 악한 자를 통해 징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갑절의 영감을 받아 믿음을 지켰던 것이 아니라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산 것입니다.

믿음이 변질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브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삿3:5-6)
변질되는 과정의 첫째는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동거하는 것입니다. 경찰이 폭력조직배와 싸우나도 같이하고 술잔도 같이하고 함께 거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것이 좋지 않으냐 식으로 함께 거합니다. 동거하기 시작합니다.

둘째 서로 좋아지자 딸들을 시집보내기도 하고, 며느리로 데리고 오기도 합니다. 연합입니다.
고대에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습니다. 정략적으로 결혼합니다. 다른 부족과 결혼을 하면 적어도 그들과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로 많이 결혼을 한 것입니다. 다른 부족과 결혼한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셋째 단계는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한 집안에서 2-3종교가 가지고 있으면 끝에 가면 넘어 질 수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1000명의 아내들을 둔 후 성전에 이방신전을 세우고 하나님을 버리는 타락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셨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여호와를 버리고 재앙을 받을 것을 아셨기에 그들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어린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를 사귀고 모르는 아저씨가 따라 가자고 하면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과자 한봉 때문에 따라가다 유괴되는 사건이 간혹 일어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따라 가지 말라고 했는데 마피아와 같은 사람들과 동거하다가, 연합하다가 결국은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처음의 동거는 생각의 일치 마음의 일치는 동거로 이어지고, 결국 죄를 짓게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처음부터 강하게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으로 유혹하게 나중에 큰 죄에 빠지게 합니다.
마치 개구리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개구리를 끊는 물에 집어 넣으면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미지근한 물에 넣고 조금씩 불을 올리면 조금씩 따뜻해 지는 것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결국 삼겨 죽습니다.

이것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으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100원을 훔치고 나중에 소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타협하면 나중에 완전히 넘어지는 것입니다. 건물이 조금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끝에 가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 작게 여기며 함께 어울리며 웃고 울고 즐긴 것이 발전하여 타협하고 연합하여 끝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같이 동거하면 모든 것이 편안할줄 알았습니다. 마피아 조직들과 전쟁하지 않기에 평탄할 줄 알았습니다.

보냄을 받은 목적은 모르고 같이 타협하면 앞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완전히 하나님을 버림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호하지도 않고 책임을 져 주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정말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혼자 힘으로 살다가 강한 상대를 만나면 보호해 줄 세력이 없는 것입니다.

타협정신으로 살다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7절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절 여호와께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에게 손에 파셨기에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8년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더 강한 적이 나타나셨습니다. 가까운 적과 적당히 타협하면 괜찮을 것으로 여겼는데 더 강한 대적합니다. 먼 곳에 있는 생각지도 않았던 메소보다미아의 공격을 받고 무너집니다. 이제 하나님이 더 이상 보호하여 주지 않습니다. 메소보다미아는 가나안 부족들과 다릅니다. 아주 못된 왕입니다. 구산리사다임이란 배나 악한자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부족들보다 배나 악한 자가 괴롭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배나 악한 자는 멀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백성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에 감히 이스라엘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죄와 타협하고 세상과 타협할 때 멀리서만 있던 더 못되고 악한 사람이 와서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떠난 것을 알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혀 상관없이 악한 자의 괴롭힘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멀리서 있던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자가 어느날 잡아 삼키려고 하지 않습니까?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던 재앙들이 나의 발등에 떨어지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기보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여 산 결과는 아닐까요? 적 당히 이정도면 되었지 정도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온 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온 전심을 드릴때까지 완전히 주님을 사랑하기까지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적당히 타협하면 궁극적으로 죄로 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할 때 하나님은 구산리사다임을 보냅니다. 나와 상관없던 악인이 등장하게 됩니다. 악인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전쟁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스나, 조류독감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꾸 하나님을 버리고 마치 인간이 신이라도 된것처럼 동물 복제에 성공했니, 동물 복제로 인류의 낙원이 올 것처럼 떠들 때 꼭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악인도 하나님이 적당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꾸 타협하고 죄로 넘어지면 악인을 사용하십니다. 거룩한 열망도 없고 하나님 나라의 이룩하기 위해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사명도 없이 적당히 타협할 때 악인을 사용하십니다.

경찰을 보낼 때 악인을 체포하라고 보냈듯이 하나님의 성도들은 세상에 살 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거룩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돈신을 섬기는 맘몬주의와 싸워야 하고 섹스의 노예가 되고 폭력을 즐기는 세속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마귀가 쳐놓은 덧을 치워야 합니다. 부적을 떼고 죄의 모습들을 버리고 거룩의 싸움을 하여 합니다.

보냄 받은 신자들이 가는 곳마다 거룩의 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피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깃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도 요즘 거룩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적당히 세속주의와 맘몬주의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연합되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버리기 직전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중심을 하나님을 이미 버려 하나님의 징계의 매를 들기 직전인지 모릅니다.


맘몬주의와 세속주의와 너무 친구가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싸워야 할 대상과 싸우지 않습니다. 세속적 가치관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은근히 즐기고 있습니다. 실제 행동만 하지 않으면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이 불행해 져도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이 울고 있는데 별고 관심이 업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고 사탄적이고 세속적인 생각으로 삽니다. 사탄적이고 육신적인 세계관과 전쟁을 벌어야 하는데 적당히 타협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병들게 하는 영화와 드라마와 전쟁하기보다 방치하고 은근히 즐깁니다.
영화 친구나 실미도같은 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습니다. 사람을 때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대리 만족을 얻고 쾌감을 얻고 있습니다. 온갖 것들을 통해 성적 쾌감을 즐기고 있습니다. 음단패설이 신자들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혼자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때의 은혜를 받았다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장에서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사상과 전쟁을 하고 있느냐 타협하여 유혹에 넘어가느냐입니다. 소돔의 딸처럼 고모라의 아들처럼 삽니다. 마귀의 신자들의 마음을 자기집처럼 들락날락하여도 방치합니다. 마귀가 뿌린 세계관대로 살아도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마피아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안전을 취하는 것이 지혜라고 착각을 합니다.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하십니다.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함께 동거하면 머지않아 연합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암5:19)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문이 열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라고 합니다. 너의 마음에 누가 들어와서 주인노릇하는데 확인해 보라고 합니다. 문이 잠겼는지 세속주의와 맘몬 주의가 들어오려고 할 때 차단하는지 확인하라고 합니다. 한발이라도 문 안에 세속 정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8년은 배나 악한 자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괴로운 가운데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으로 돌아섭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희망입니다.

2. 보냄 받은 자의 자리로 돌아오려고 하면 구원자를 세워 도우신다.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나가서 싸울 때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여 이기게 하였더라. 나라가 40년이나 태평하였더라(삿3:9-11)

배나 되는 고통 중에 부르짓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이요 구원이요 산성이요 요새요 방패라는 것을 인정한 거 t입니다. 그동안 수고한 결과가 무위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손길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완전히 손발 다 들고 하나님께 항복한 것입니다.

고통중이라고 하여도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회복시키십니다. 구원자를 세워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인정하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타협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기도하면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던 일이 무너질 때 사람이나 세상을 원망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악한 구산리다임을 욕해도 소용 없습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해고한 회사를 욕하고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녀를 욕해도 소요이 없습니다. 문제 해결의 길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복입니다.

'내 힘만으로 사업하고 내 힘만으로 애들 키우고 내 힘만으로 살려고 한 것 회개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셔야 사업이 되고 주님이 함께 하셔야 아이들도 잘 키우고 주님이 함께 하셔야 하는 일도 잘 되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직장이 전부인줄 알고 직장에 목숨마치면 행복이 올 줄 알고 죽도록 일했는데 해고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이제 주님을 사랑하면 살겠다고 고백하며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내 인생의 행복인지 알고 자녀에게 온갖 헌신을 했는데 그 아이가 나를 버렸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주님입니다. 하고 주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돌아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구원자를 붙이십니다. 그가 사사 옷니엘입니다. 사사 옷니엘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국에서 메소보다미아보다 더 강한 군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에 살고 옷니엘을 일으킵니다. 그는 8년동안 같이 압제를 당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켜 하나님을 찾을 때 외국이 있는 어떤 유능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도울 사람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친구, 친척, 혹은 어떤 사람이 도와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을 구원자로 쓰시는 것입니다.

둘째 옷니엘의 특징은 성령이 기름부으심이 임한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0절이 성령이 임하여 ....

왜 8년동안 하나님 백성이 고생을 할 때 힘을 쓰지 못한 옷니엘 어느날 갑자기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자 힘을 얻오 전쟁을 하여 8년동안 괴롭힌 메소보다미아를 몰아냅니까?

성령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 성령이 임하면 한 시대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술과 성령입니다. 술은 내성적인 사람이 용기가 넘치게 합니다. 평상시 말도 못하는 사람이 술이 들어가면 따지기도 하고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진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보통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소심하고 얌전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영의 문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환경의 문이 열려지게 합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닫혔던 문들이 여는 지혜와 능력을 가집니다.

이 시대는 가인의 영이 역사하듯 온갖 분노들이 터지고 절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추방하는 세속주의가 판을 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세력이 역사합니다. 그 결과 인간성이 파괴됩니다. 증오와 복수심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사탄에 걸려 개인과 가정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갑절의 영감을 가진 옷니엘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를 구원하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평범한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전문가이신 주님께서 영감을 갑절로 달라고 간구합시다.

갑절의 영감으로 시대의 구원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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