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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치도록 사모하자 / 고후 5: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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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도록 사모하자

본문: 고후 5: 13-21

농구의 여왕 박신자 양을 아시지요 박신자 양은 국제 농구 시합에서 최우수상을 탔습니다. 그가 경기에서 이겨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열렬하게 환영을 하였습니다. 어린 학생 중에는, "나도 박신자 언니처럼 훌륭한 농구 선수가 될테야"하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박신자 양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신문기자들과 방송기자들이 한 마디씩 부탁을 하였습니다. 어느 잡지 기자가 말했습니다. "후배와 농구 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나, 좋은 도움이 될 말을 한 마디 해주세요. 특히 성공의 비결을 말씀해 주세요" 그 때 박신자 양은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미치는 거예요. 무엇에나 한 가지 일에만 미치는 거예요. 이것이 성공의 비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간단한 말이지만 참으로 유명한 말입니다. 한 가지 일에 미친 사람처럼 열심을 내면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씨가 전에 아프리카에 갔을 때, 슈바이쳐 박사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김찬삼 씨는 물었습니다. "박사님,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때 슈바이쳐 박사는 조용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한 우물을 파게" 한 가지의 일에만 몰두하는 일이 성공의 비결이라 하였습니다. 신앙이든, 교육이든, 사업이든 한 가지 일에 미친 사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김길창 목사가 처음 전도사로 파송 받아 경남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창녕 어느 지방으로 혼자서 전도하러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루종일 전도하고 밤이 되어 작은 주막집을 찾아 유숙을 청했습니다. 방에든 그는 그 밤에도 피곤을 모르고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따라 따라 예수 따라 가네. 아무 데나 예수 따라 가겠네. 전도 전도 예수 전도하세. 아무 데나 예수도 전하겠네"

이 소리를 들은 주인 아주머니는 혀를 차면서 "아까운 사람이 미치다니, 생기기도 잘 생겼구먼"하자 그 남편도 "누가 아니래. 제 부모가 얼마나 간장이 타겠소?" 하였습니다. 주인 내외의 대화를 들으며 잠이 든 김길창이 이튿날 아침을 먹고 나오면서 "잘 자고 갑니다. 주인 내외분께서도 함께 예수를 믿고 복 받읍시다"하면서, 구세론책 1권과 쪽 복음책 2권을 숙박료와 함께 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 사람아, 자네같이 미친 사람에게 숙박료를 어찌 받겠나? 불쌍한 것, 쯧쯧"하면서 숙박료를 연신 사양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이 시작되는 1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정말 미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무엇에게 왜 미쳤을까요? 이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저는 여러분도 저와 한가지로 미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무엇에 미쳤습니까? 우리는 무엇에 미쳐야 합니까?

1.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야 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권이란 말은 꼼짝달싹 못하도록 붙잡아버린 모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랑의 열병에 걸린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우리가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오늘 날 또한 그와의 사랑에 빠져야 할 두 가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엇입니까?

첫째 이유, 그는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14절)
지금은 탄광에 환기장치가 잘 되어 있어 큰 위험이 없지만 예전에는 메탄가스 폭발사고가 많았습니다. 안심하고 일하기 위해서는 누적된 메탄가스를 새벽에 태워버려야 했습니다. 파이어 맨(불 붙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젖은 두꺼운 옷을 입고 긴 나무 막대기 끝에 불씨를 켜서 누적되어 있는 가스를 태웁니다. 이는 가스가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냄새로만 판단하면서 굴에 들어가기 때문에 목숨을 건 작업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광부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 십자가에 파이어 맨으로서 매달리셨습니다. 가스에 덮인 탄광처럼 죄에 덮인 인간들의 죄악을 불태워 없애기 위하여 자신을 태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오직 감사의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편해집니다.‘주여, 당신만큼 참아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신만큼 빼앗겨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신만큼 멸시를 받아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신만큼 외로워해 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그분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할 수 있다면, 그분의 행복도 나의 행복으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당신은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여, 나는 약하여 한 순간도 당신 없이는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포옹은 부드럽고 당신의 오른손은 힘이 있어 나를 만족케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지 마소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이기적 동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라도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이라도 부모를 위해 죽는 자식은 거의 드물고, 자식을 위해 죽는 부모도 찾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모도 자식도 아닌 나와 같은 민족도 아닌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돌아가시다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정말 사건 중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지신 그 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이해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롬5:7이하에서 이 세상에서는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일도 쉽지 않은데 그리스도는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이것이 어인 일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유명한 롬5:8에서"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시집가기를 거절하고 평생을 희생한 어느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생 자신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고 주변 사람도 좀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오직 동생을 위해서만 살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 떠나 기전 그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사춘기 시절 수혈을 받을 필요가 있었는데 특이한 혈액형이어서 피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마침 어린 남동생이 같은 피형이어서 자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혈이 끝난 후 이 남동생이 입원실에서 의사선생님에게 뜻밖에 이렇게 물었더랍니다. "선생님, 저는 언제 죽게 되나요?" 이 소년은 수혈의 의미를 충분히 모른 채 죽기를 각오하고 누님을 위한 수혈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후에 전해 들었을 때 이 누이는 그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평생을 제 동생을 위해 살겠습니다"고. 그리고 그녀는 그 결심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하고 수혈한 동생을 위해 한 여인이 동생에게 빚진 마음으로 동생을 사랑하여 동생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다면 우리 위해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그분과의 사랑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지나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둘째 이유, 그가 나의 삶의 이유가 되셨기 때문입니다.(15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다시 사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사신 이유는 우리로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 - 그는 이제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이유요, 삶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주어진 까닭도 안디옥의 성도들이 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처럼 살고 그리스도를 칭송하고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요. 우리의 삶의 무기력과 무감동은 대부분 목적의식의 결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는 분명히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대상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다. 나는 너를 위해 다시 살았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 살고 있단다. 그러면 넌 나를 위해 살지 않겠니?" 이 음성을 들은 그 날부터 바울은 그를 사랑하는 일에 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미쳐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6:24에 보면 바울이 전도하다가 죄수로 잡혀 왔으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심문하는 로마의 네로에게서 유대 땅으로 파송된 총독 베스도에게 전도를 하자 그는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이유,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존재의 갈망은 변화의 갈망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존재 그대로를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불만은 자신에 대한 불만입니다. 이 불만이 크면 클수록 새로운 존재에로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더 증대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안에 있게 되면 새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와도 직분을 가져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치고 변화된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저에게 복음의 감격을 아는 사람들을 보여 주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복음을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무력과 과학, 철학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력도 과학도 철학도 한 영혼을 구원하거나 변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마다 변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이유,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류최대의 과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정립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하나님을 등진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척 스윈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보자요 화목자인 구세주를 보내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전도의 책임을 본문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라고 말합니다.(18절) 복음을 가르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19절) 20절에 의하면 전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전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 세상은 하나님이 축복할만한 세상, 하나님과 화목한 세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개인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일에 미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또한 미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톨릭 신학의 거장입니다. 아퀴나스는 훌륭한 학자이며 동시에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천사와 같은 박사’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수도원에서 기도하던 중 예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주님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과 의사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하워드 켈리는 그가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날 밤,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습니다. "주님, 내 자신과 나의 시간과 나의 능력과 나의 열정,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오니 나를 정결케 하시고, 제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의 어떠한 성공이라도 제게 허락하지 마옵소서"

성경말씀 중 첫째가는 계명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계명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마22:36-40, 신6:5)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정열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하나님, 재물과 하나님, 가족과 하나님, 둘 다 섬기려 하면 맛 잃은 소금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계명의 말씀보다도 첫째 되는 계명(신6:5)을 알고 실행하기를 힘쓰는 참신자를 요구하십니다. 이제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향하고자 하는 자는 곧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자기 볼장을 다 보고는 전심으로 주께 향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은 길 같으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잠14:12) 쳐다만 볼 수 있는 떡은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아닙니다. 쫓기만 하고 생활화 할 수 없는 종교와 교리는 무의미합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의 지도자들은 생활화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노래하고 가르칩니다. 즉 사랑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노래하고 설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 전체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현실에서 쉽게 부합되거나, 사회윤리에 맞는 것만을 주로 강조하고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현실에 맞게 변조하거나 뜯어 맞추어 절대적인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자가 멋대로 설명하고, 해석하여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생활의 종교입니다. 생활하는 가운데서 나온 진리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두 종류의 태도가 있는데,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하면서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하고 무릎을 꿇는다든가, 아니면 아주 안 믿고 박해를 하며 발로 차고 침을 뱉고 하든가 하는 것입니다. 웨스턴 대학에 다니던 학생 한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가지고 자기 애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나를 미치게 할 만한 사상을 발견했노라. 지금까지는 너를 나의 신처럼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신이고, 나의 생명이고, 나의 조국이고, 나의 모든 것이며, 밤에는 그것에 대하여 꿈을 꾸고, 낮에는 그것을 위해서 일을 한다. 어느 시간이고 어느 장소에서든지 이 일을 위해서는 내 생명을 기쁘게 내어 드릴 용의가 있다. 나는 그것을 떠나서는 애정도 생각할 수가 없노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가 아닌 너를 버리고 공산주의 운동을 하기 위하여 멕시코로 떠난다. " 이런 편지를 써 놓고 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적어도 자기 애인도, 자기의 조국도, 자기의 부모도 상대화시키고, 자기 자신도 상대화시킵니다. 공산주의자가 되는 사람의 최소한도의 헌신은 사유 재산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최대한의 헌신은 겨우 십일조를 바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주창자인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다르게 한 말씀도 피상적이거나 공상적인 이론과 지식의 말씀이 아니고,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목숨까지 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10:37)고 하셨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나님은 최고의 정성을 기울여 섬기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고 선민의 조상이 된 것도, 세상에 둘도 없는 독자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쳤기 때문입니다. 제일 귀한 것 하나밖에 없는 것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만큼 큰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끼니인 생명과 같은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 무서운 흉년도 거뜬히 평안하게 지날 수가 있었고, 과부가 생활비 전부라도 정성으로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자기의 결혼 밑천을 아낌없이 깨뜨려 드렸기 때문에 칭찬과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드리고 바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이 우상숭배의 죄를 짓겠습니까? 살인죄, 간음죄, 도적질하는 죄를 짓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연히 죄에서 떠나 거룩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 종교 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정과 욕을 버리는 길입니다. 에로스 사랑과 아가페 사랑의 대결에서 아가페 사랑이 이겨야 합니다.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이 진실되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땅의 것에서 멀리 몸을 떼면 땔수록 성도는 하늘의 것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더욱 더 신령한 것을 사모합시다. 사람은 종교 열정이 식어질 때 그때부터 생명은 시들고, 신앙은 껍질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참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사모, 앙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요, 관념과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온종일 주님을 바라는 생활을 합시다.

영국의 한 시골 노인이 난생 처음 런던 관광을 왔습니다. 그는 그림에 조예가 있어서 유명한 화실에 들러 이 그림 저 그림을 구경하다가 신앙이 독실한 대 화백이 필생의 걸작으로 그린 예수님의 상을 보고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경건되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한참 그림을 쳐다보다가 노인의 두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 !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관람객 중의 한 부인이 그 노인에게 가서 손목을 좌 잡으며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또 한 학생이 이 장면을 보고 "할아버지,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 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이름 아래서 그들은 서로 통했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삽시간에 칠팔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주님을 향하는 뜨거움이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항상 있어야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오꼬"(시42:1-)

감옥에 갇힌 죄수가 석방의 날을 기다리듯이 사병이 제대하기를 고대하듯이 굶주린 사람이 먹기를 기다리듯이 구차한 살림이 풍요하게 되기를 바라듯이 파수꾼이 새벽 날새기를 고대하듯이 어린아이가 그 어머니의 젖을 사모함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진리를 갈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잠시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음부에 가서 숨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이 거기 계십니다.

사도 행전의 크리스천들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미쳐야 합니다. 크게 미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미치도록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미치도록 예수님을 사모하는 생활을 합시다.

* 기도: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증거하신 주님, 세상은 주님을 대적하고 무시하는 문화를 더욱 강하게 굳히고 있지만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힘이시고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평생 주님만을 사랑하며 고난을 당할 때에도 주님과 함께 있음을 감사하게 하소서. 미치도록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c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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