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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과 함께 한 삶 / 사 44:3, 고전 3:16~17, 고후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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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과 함께 한 삶
                  이사야44:3, 고린도전서3:16~17, 고린도후서6:16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email protected])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급격한 양적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성령의 역사 하심이다. 또한 교회는 앞으로도 더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양적 성장과 발전에는 질적 성숙의 발전이 병행되어야 한다. 만일 그러하지 못할 때 양적 성장과 발전은 기독교 신앙의 참된 본질을 왜곡시키고 교회의 혼란을 야기 시킬 수 있다. 신앙이란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무지의 신앙이 아니라 알고 믿는 신앙이어야 한다. 물론 잘 안다고 하여 반드시 잘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지식만으로서의 신앙은 메마른 것이요, 죽은 것이다. 그 반면에 지식이 없는 신앙은 내용과 올바른 방향을 상실하고 맹목적이며 광신적인 신앙으로 흘러가기가 쉽다. 이러한 경우에 왜곡된 이단설을 가르쳐도 교인들은 아멘! 할렐루야! 하고 열광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음을 흔히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신앙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의 현실에 놓이게 된다. 오늘 주일은 성령 강림절 주일이며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 "욕망과 소망"에서 소유와 존재의 의미부여 설교를 한바 있다. 함께 곁들여 오늘의 설교를 이어 가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한다. 우리 인간은 자기의 사랑에 대하여 무언가 갚아 줄 수 있는 자를 사랑한다. 자기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자에게는 주고, 되돌려 줄 수 없는 자에게는 주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자기에게 아무 것도 되돌려줄 수 없는 자에게 그의 사랑을 준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 자기를 부인하고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는 곧 자기와 원수 된 자를 사랑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도 이기적이요 속되다. 갖가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한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 성(性)에 대한 소유욕, 권력과 지위에 대한 소유욕, 명예에 대한 소유욕 등 갖가지 욕심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대개의 경우 우리 인간은 이 욕심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더럽고 속된 존재 일상적인 존재가 된다. 희망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자기를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죄인의 자리에 선다.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의 자리에 선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보잘것없이 작은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는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며 예언자를 보내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냈었다. 흔히 생각하기를 우리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감정을 가지고 있으므로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하여 반응한다. 그리하여 희노애락의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마음이 움직여지고 반응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고통이고 또 고통을 유발한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된다. 이것이 불완전한 인간, 세계의 모습이다. 이러한 인간에 비하여 신은 완전하다. 그는 완전하므로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이 오든지 그의 마음은 동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온하며 어떠한 상처도 받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탈(超脫) 내지 해탈한 상태에 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일반 종교적 관념에 의하면 "신의 완전성"은 해탈과 무감각과 고통을 받을 수 없는 데에 있다. 우리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길은 이러한 신을 닮는 데에 있다. 이 신과 같이 속세의 모든 것을 해탈하여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에 자극을 받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자극을 받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인간은 완전한 신의 모습을 닮을 수 있다. 신의 완전성이 해탈과 무감각과 고통을 받을 수 없음에 있는 것 같이 인간의 완전성도 해탈과 무감각과 고통을 받지 않음에 있다.

이러한 일반 종교적 표상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사랑의 감정을 가진 분으로 나타난다. 그는 무감정의 하나님(Deus Apatheticus)이 아니라 동정과 연민의 하나님(Deus Sympatheticus)이다. 그는 동정과 연민을 느끼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는 성령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피조물들 속에 함께 계시면서 그들과 함께 신음한다(롬 8;26). 우리의 죄인과 철저히 다른 하나님은 우리의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당하는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반적 종교적 관념이 생각하는 신의 완전성과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의 완전성이 어떻게 다른 가를 알 수 있다. 일반적 종교적 관념이 생각하는 신의 완전성은 소위 속된 세상으로부터의 해탈과 무감각과 고통을 받을 수 없음에 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종교들이 믿는 신은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는 초연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나님의 완전성은 죽음의 고통까지 당할 수 있는 사랑에 있다. 그의 완전성은 해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육신과 성령을 통하여 어두운 세계 속으로 오시는 데에 있다. 그의 완전성은 무감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은 고뇌와 고통에 있다. 그것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으며 고통을 당할 수 없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고 고통을 당할 수 있음에 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 내지 성격이 있다. 예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내주는 생명의 신적 에너지를 예수에게 가져왔다. 요한복음 3;34는 "하나님이 그의 영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만유의 새 창조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영은 예수 그 자신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신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 안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이 영의 능력 안에서 죄인들을 용납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가 계신 그곳에 계신다. 예수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 돌로 지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요2;19-20). 그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새 성전"이다(막 14;58).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다. 그 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요 1;14). 그리스도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런데 신약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전이다(고전3;16-17).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공동체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는 공동체로서 계신다고 본훼퍼는 말했다. 그는 자기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 곧 그의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 안에 계신다. 역사의 예수가 소외당하였고 억눌리며 비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에 계셨다면 지금도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에 계실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가 계신 그곳에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의 뒤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계시는 동시에 소외당하였고 가난하고 비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은 소외당하였고 가난한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면서 살아가는 강도는 폭력배들 안에도 계신가? 그렇다면 이것은 강도나 폭력배를 두둔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이 사회의 무질서를 조장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부모는 그를 사랑한다. 자식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도나 폭력배라 할지라도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한다. 그렇다 하여 자식의 죄된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는 자식의 죄된 행위를 괴롭게 생각하고 정신적으로 자식과 함께 있으면서 고통을 당한다. 이것이 자식에게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 4;8  16 ). 따라서 하나님은 죄인들 가운데 계신다. 그는 죄인들의 죄를 괴로워하면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버지가 자기를 떠난 탕자를 기다리듯 그들을 기다린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교회 안에만 계신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 안에만 계신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공동체 안에도 계시고 가난한 사람들 안에도 계신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이며 그들의 고난에 어떤 형태로든지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과연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과 공동체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과 고통의 영이 없는 그곳에 하나님이 과연 계실까? 이 시대의 고난에 대해서 눈을 돌리고 자신의 부와 팽창을 꾀하는 그곳에 어찌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교회는 하나님의 무덤들(Graeber Gottes)이다"고 한 말이 조심스럽게 들린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자연 속에 계시듯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있고 또한 몸 속에 있다고 한 말은 "정신이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고, 이 정신의 에너지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살아 있는 에너지다"라고 한 말에 대한 유의를 갖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한 삶"의 의미를 가져본다.

성령 강림절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깊은 절망감과 외로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한 다락방에 모였다.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깨우쳐 주시던 주님을 잃은 슬픔에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위로가 없었던 것이다. 유대 절기의 하나인 오순절 날 이들에게는 예정되었던 성령의 강림이 임하게 되었다. 진리를 온전하게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었다. 그들은 진리의 영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보고 진리를 말하며 진리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거듭나게 되었다. 성금요일에 한 알의 씨앗으로 예수가 심어졌고 부활의 아침에 그 씨앗은 생명의 꽃을 피워 내었다. 그리고 이제 오순절 날 한 다락방에 모여있던 사람들 위에 그 생명이 꽃이 향기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 향기를 맛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니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는 일이 일어났다.

성령 강림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성령의 역사는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고 잊어버린 진실을 증언하게 한다. 그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우리들이 변화된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좁은 생각의 반경이 넓어지고 우리의 닫혔던 마음이 열려 갈등과 분열 폭력과 미움 그리고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긍휼로서 감싸 안았던 사마리아인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의 힘은 내 안에 새 생명을 소생시키고 나로 하여금 공동체의 삶을 살도록 성령이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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