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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사의 가치와 서열 (고전 1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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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사의 가치와 서열
본문 : 고린도전서14:1-25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5)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6-11)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0-25)"


14장의 개요

  12장에서 은사에 대한 일반적 논의를 한 바 있습니다.  13장에서는 최고의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찬미했습니다.  이제 14장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이슈였던 방언과 예언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상당수가 방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방언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방언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일부 교인들은 예언(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헬라인으로써 어떤 지식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방언을 받은 자들과 말씀(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서로 우월감을 가질 때 교회의 질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따로 떼어내서 특별한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5절까지는 방언에 대한 예언의 우월성을 교훈합니다.  즉, ① 방언에 대한 예언의 우월성(1-5절), ② 방언은 타인에게 의미 없는 사운드에 불과함(6-11절), ③ 공적 예배나 기도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12-19절), ④ 초신자나 불신자에게 도움을 주는 문제(20-25절) 등입니다.  26~40절까지는 주로 교회의 질서와 관련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즉, ⑤ 예배에서 은사의 질서 문제(26-33절), ⑥ 교회에서 여자의 지위 문제(34-36절), ⑦ 결론적인 교훈으로써 은사 사용에 대한 일반적 원칙(37-40절) 등입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절)  첫 부분은 은사를 구하고 사모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그 자체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용상의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은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급니까?  강도 사기꾼 무서워서 돈 안 법니까? 

신자로써 신자답게 살아가려면 성령의 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목회자가 말씀 은사 없이 어떻게 목회 합니까?  주일학교 교사가 사랑의 은사 없이 어떻게 가르치겠어요?  장로, 권사가 영 분별 능력 없이 어떻게 교회 공동체를 섬기겠습니까?  성가대원이 노래에 대한 열정 없이 어떻게 찬미하겠습니까?  하나님 교회에서 직분을 수행하려면 은사 없이는 안 됩니다.  방언이든, 예언이든, 신유든, 지혜의 말씀이든, 지식의 말씀이든 열심히 구하십시오!  "구하라...사모하라!" 했습니다.  "구하라"(διωκετε)는 말은 "추적하다"(pursue)는 뜻입니다.  사냥꾼이 짐승을 추적하듯이 쫓는다는 말입니다.  "사모하라"(ζηλουτε)는 말은 "열심"이란 단어입니다.  우리는 은사를 구하되, 사냥꾼이 짐승을 추적하듯이 구해야 됩니다.  열성적이고 뜨거운 마음으로 은사를 받으려고 애써야 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하면 "사랑을 추적하라!"(you pursue love!)는 뜻입니다.  "사랑을 따르라"(follow after charity, AV), "사랑의 길을 따르라"(follow the way of love, NIV)고 번역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랑을 구하라"(you must want love more than anything else, JB)는 의미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모든 은사는 사랑의 길을 따라서 구해야 됩니다.  사랑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뭡니까?  한 마디로 利他的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나를 위해 구하지 말고 타인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구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목소리를 구한다고 합시다.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아름다운 말을 하기 위해서 구한다면 좋습니다.  단지 목청을 자랑하기 위해서 구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식의 은사를 구한다고 합시다.  단지 남에게 인정받고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구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다 잘 섬기기 위해서 구할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은사든지 사랑의 정신으로 구할 때에 응답을 받습니다.  "너희가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 
 

방언의 약점

  2절 이하의 말씀은 주로 예언의 우월성에 대한 교훈입니다.  교회에서 방언보다는 예언이 훨씬 좋습니다.  여기서 예언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예언은 장래 일을 미리 말하는 예언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설교, 혹은 전도를 말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예언"이란 말을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은혜"라고 풀어 썼습니다.  방언보다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은사가 교회 안에서 훨씬 우월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임의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교회에서 질서상의 서열을 매길 필요성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과 예언이 그렇습니다.  적어도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방언보다 예언이 먼저입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25절까지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은사를 사용하는 相對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고, 예언은 사람을 상대로 합니다.  방언의 목적은 본래부터 사람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2절)  그러나 예언은 본래부터 사람들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합니다.  어떤 것이 바른 삶인지 알려줍니다.  잘못을 깨우쳐 주고 바로잡습니다.  교회 공동체 입장에서 본다면 방언보다는 예언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방언은 본래부터 대인 관계를 위한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방언은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예언은 알아듣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2절)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일 어떤 한국 사람들을 만났는데 자기들끼리 외국어로 수군대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경상도 사람들은 액센트가 강합니다.  호텔 로비에서 몇 명만 모여서 얘기하면 외국인들이 싸우는 줄 알아요.  중국 사람들도 그래요.  전후좌우 없이 쏼라쏼라 크게 얘기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경상도 출신의 소대장이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폭탄이 날아오자 "마카 수구리!"(모두 숙여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절반이 죽었습니다.  또 폭탄이 날아왔습니다.  "아까맹키로!"(아까처럼 해라!)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하고 나머지가 다 죽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세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8절)  전쟁 때는 나팔로 신호를 하는데, 전진 나팔인지 후퇴 나팔인지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면 전쟁 끝장납니다. 

  모든 언어는 일종의 의사 소통을 위해서 사운드로 전하는 記號입니다.  음악도 일종의 사운드로 된 기호입니다.  악보대로 연주하면 일정한 음이 나오고, 우리는 그 곡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악보 없는 음악은 잡음에 불과합니다.  음악과 비음악의 차이는 객관성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들으면 음악이고 못 알아들으면 소음입니다.  오페라 구경 가서 자는 사람들 많찮아요?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6-9절) 

  누가 공중 앞에서 방언을 유창하게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전혀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피차 곤란해집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서로 야만이 된다고 했습니다.  "야만"이란 말은 헬라어로 "βαρβαροσ"(바르바로스)입니다.  유명한 호머는 사리아 사람을 가리켜 "βαρβαροφωοι"(바르바로 소리를 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영어 단어에 "barbarian"이란 말이 바로 여기서 온 말입니다.  우리가 중국 사람 보면 "쏼라쏼라" 한다고 하잖아요?  호머가 듣기에 사리아 사람들의 언어가 그저 "바르바르" 하는 소리로만 들린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야만인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도 야만인 취급 당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야만인이 됩니다.  괜히 아무데서나 방언하면 졸지에 야만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고 방언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공예배 자리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서 삼가라는 뜻입니다. 
 

예언(하나님 말씀)의 역할

  방언에 비하면 예언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달할 때에 여러 가지 효과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3절)  3절에 보면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덕을 세웁니다.  "덕을 세운다"(οικοδομην)는 말은 집을 세운다는 말로써 인격을 세워준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권면합니다.  권면(παρακλησιν)이란 "위로" 또는 "격려"(encouragement)를 뜻합니다.  셋째로, 안위합니다.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인격을 세워줍니다.  용기를 줍니다.  위로를 줍니다.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말씀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을 회개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24-25절)  불신자들이나 신앙의 초보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4단계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첫 단계는 책망을 받는 일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판단을 받습니다.  삶을 평가받는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단계 즉, 책망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책망은 없고 칭찬만 있습니다.  칭찬만 있습니다.  교육학자들은 한결같이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그저 칭찬만 하라고 합니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아도 칭찬, 거짓말을 해도 칭찬, 남을 때려도 칭찬, 생떼를 써도 칭찬...처벌은 최소로 하고 그냥 칭찬만 하래요.  성경의 인간관은 본성적 죄인입니다.  인간은 악한 본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기적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혼자 잘나서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존재하고, 인간은 공짜로 세상을 사는 줄 알아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께 신세지고 산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한 본성을 일깨워주고 칭찬만 하면 다 좋아진다는 겁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개판 인생들이 널려 있는 겁니까?  교회도 그래요.  죄를 지적하지 말고 좋은 말만 하라는 겁니다.  그저 예배당에 나와서 푸근히 앉아 있다가 가도록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본래가 죄를 깨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전하면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하나님 말씀의 중요한 역할은 죄를 책망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내 죄를 지적해 주는 곳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죄를 합리화시켜 줄뿐입니다.  의학, 심리학, 생물학, 문학, 예술, 모든 것이 인간 행위를 정당화시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프로이드입니다.  프로이드는 현대 심리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프로이드의 중심 주제는 항상 性입니다.  성적 욕구가 인간의 정신 상태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性은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성적 욕구를 억압하면 심리적 불행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든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 승화시켜주라고 합니다.  프로이드에게 성에 대한 도덕성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덕은 성에 대한 탄압이요 억압일 뿐입니다.  프로이드의 이론대로 하면 성적 타락은 모두가 자연스러운 것일 뿐 어떤 죄악도 아닙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프로이드주의자들로 가득합니다.  어떤 성적인 타락도 그저 "부적절한 관계" 정도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14,제7계명)  간음은 死刑 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간음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당 왕국이 간음과 우상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이 세상도 언제든지 간음 죄 때문에 멸망당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장관이 되지 않는 한 거짓말 정도는 죄로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위반하면 사형입니다.  사기나 도적질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돈 떼어먹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 신용 불량자들이 수 백 만 명이나 됩니다.  친구 돈이든, 은행 돈이든 갖다 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출20:15,제8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제10계명)  모두가 사형 죄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여론은 다릅니다.  왜 돈을 막 빌려주느냐고 야단입니다.  빌려준 분이 잘못입니까?  안 갚는 놈이 나쁜 놈이지요.  지하철에 불지른 사람을 놓고 왜 장애인을 푸대접했느냐고 반성하라고 합니다.  세상에 장애인 되면 다 지하철에 불질러야 됩니까?  그런 논리는 어디서 온 겁니까?  세상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만 시킵니다.  이런 세상에서 유일한 해답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무엇이 죄인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인류가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될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 말씀 뿐입니다. 

  죄를 지적당한다고 불쾌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그것은 곧 환자가 의사 앞에서 감춰진 병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병은 드러내야 치료를 받습니다.  덮어두면 죽어요.  하나님 말씀은 죄를 책망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평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마침내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바른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러니 얼마나 유익합니까?  여러분 매주 예배드리면서 자신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병, 죄악의 병을 먼저 고치세요.  영혼을 깨끗하게 치료하세요.  그래야 모든 것이 잘 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신약 시대에 모든 성도들은 다 선지자(예언자)요 제사장들입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방언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예언의 은사는 누구든지 받은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말씀을 기꺼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전하세요.  그래서 신앙 인격을 세워주세요.  말씀으로 격려하십시오.  말씀으로 위로하세요.  무엇보다도 말씀을 전함으로 피차 죄를 깨우쳐 주세요.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시고, 말씀으로 마음의 숨은 것들을 드러내십시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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