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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만지시면 (암 9:5-6, 마 8:1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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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만지시면 (암 9:5-6, 마 8:14-17 )
 
한국인은 촉각이 유난히 발달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손, 만지심, 촉각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 사람은 사물을 눈으로 지각하고 한국 사람은 손바닥으로 지각한다고 합니다. 유전적으로 한국인은 촉각이 발달하여 뛰어난 손재간을 자랑합니다. 한

국 사람의 밥상에 무채를 썰어놓은 것을 보고 펄 벅여사는 “저건 요리가 아니라 예술이다”라고 경탄하였다고 합니다. 다섯 살 난 아이가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집어먹는 것을 본 게일목사님은 “식탁 위의 서커스”라고 하였습니다. 갓 깨어나 성별 구별이 돼 있지 않은 병아리의 암수를 감별할 수 있는 고감도의 손재간을 가진 사람은 한국사람뿐이라고 합니다.

최근의 어느 연구보고에 보면 암의 발생도 어린 시절의 피부접촉 결핍과 분명한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체접촉은 지능 발달에도 많은 유익을 준다고 합니다. 태어나서 2살 때까지의 지능발달이 그 다음 20세까지의 발달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기들을 전통적으로 기르는 게 좋습니다. 아기들을 많이 만지고 몸에 닿게 하는 것은 혈통이나 국가의 장래의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모체접촉이 강한 우리 나라는 이래저래 유익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아기들 젖도 잘 안 먹이니 모체접촉이 적어지지요. 업어주지 않고 물건처럼 웨곤에 끌고 다니니 모체접촉이 적어지지요. 같이 안고 자지도 않으니 모체접촉이 적어집니다. 좋은 전통을 회복하는 것도 좋은 것인데 이건 회복하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여러 번 가버나움에 가신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는 이 때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동생인 안드레는 결혼하지 않고 형과 함께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장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봐서 베드로는 굉장히 가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애처가였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장모를 모시고 살겠습니까? 우리말에도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내가 사랑스럽지 못하면 처가 식구들이 보기 싫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장모를 모실 만큼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고 있었습니다. 열병으로 앓고 누워있는 장모를 예수님은 손을 잡아 일으키셨고 장모는 일어나 예수님께 수종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장모를 낫게 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일어나 수종들게 한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만지신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도 주님이 만져주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주님은 만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여러 번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들어가신 것은 장모가 열병에 누워 있다는 말을 듣고 고쳐주시려고 들어가십니다. 성경은 “그의 손을 만지시니”라고 합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 집에 들어가셨고, 의도적으로 만지셨습니다. 주님은 장모를 만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만지신 것은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의 손은 사랑의 손입니다. 치유의 손입니다. 은총의 손입니다. 마태복음 9장과 예수님께서 두 소경을 만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들이 예수님께 보게 해달라고 할 때에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또 다른 소경들이 고쳐달라고 했을 때에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혹은 “손을 대시며” 낫게 하신 것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손을 잡으시고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에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건져주셨습니다. 변화산에 함께 올라갔던 제자들이 무서워 떨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간질병 걸린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만난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예수님은 그 혀에 손을 대시며 “에바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다음 잡으러 온 사람들 중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드로가 쳤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40에는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으로 만지시며 고치셨습니다.

그 당시에 병자들을 만진다는 것은 얼마나 더럽고 감염되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만지시는 것은 고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보시고 관에도 손을 대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지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를 누가 돌봅니까? 누가 대소변을 받아 냅니까? 많은 분들이 연로하신 어르신이 병이 들면 그래도 남편, 아내밖에 없다는 말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면 무거워도 일으킬 수 있고, 사랑하면 더러워도 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랑하시기에 온갖 병자들을 일일이 다 만져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만지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리지만 일일이 다 만져주셨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말려도 만져주십니다.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은 손자하고 있다가 제가 지나가면 “목사님, 우리 손자 머리 한번 만져 주세요” 그러십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부족한 제가 만져주기만 해도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예수님이 만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아이는 제가 감사해서라도 머리만 만져주는 것이 아니라 안아주고 싶지요.

제가 오래 전 신학교를 다니며 교육전도사로 섬길 때에 영락교회 초등부의 전도사였습니다. 약 500명의 초등부 어린이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머리를 많이 만져주었어요. 여름에는 밖에서 뛰어 놀다 들어온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면 손이 끈적거릴 정도였지만 아이들의 머리 만져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저를 알아서 아예 저를 만나면 머리를 쑥 내 밀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교회에서 경영하는 고아원이 있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는 머리를 만져주려면 싹 빠져나가고 도망가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랑 받기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기를 어색해 하는 아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만지지 않아도 될 것도 만지십니다. 만지지 말아야 할 것도 다 만지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만지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만짐은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사랑은 손끝에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고 주님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만져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아픈 부분을 만져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저는 복음성가 가운데 이 찬양의 가사를 참 좋아합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 자비 강 같이 흐르고 그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둘째, 주님이 만지시면 병이 떠나고 일어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열병으로 누웠는지라”고 합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누웠다”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병이 오랜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앓았고 현재도 앓고 있음을 말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병의 심각성을 의미합니다. 오래 시달리고 있는 괴로운 상황을 적고 있습니다. 반면에 “떠나다”란 말은 부정과거형입니다. 병이 완전히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병에서 일어나고 다시 앓아 눕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완전한 치유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져서 낫게 했다는 말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야이로의 딸도, 소경들도, 간질병 들린 아이도, 어눌한 사람도 다 만지면 나았습니다. 모든 병자들을 만져서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만지시면 어떤 병이든, 어떤 형편이든 다 나았습니다. 여러분, 미다스 터치(Midas Touch)란 말을 아시지요? 미다스는 그리이스 신화의 인물로 소아시아의 프리기아(Phrygia) 국의 왕입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가 그에게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자, 그는 자기가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후회하게 됩니다. 먹을 음식과 물까지도 금으로 변했거든요. 디오니소스는 이 마법에서 풀려나려면 팍톨루스(Pactolus) 강에서 목욕해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그가 목욕하고 난 후에 그 강의 모래들은 금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금이 아무리 좋아도 모든 것이 금이 되면 쓸모 없습니다. 세상에는 흔하고 보잘 것 없지만 금보다 귀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이 그렇고 공기가 그렇고 음식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미다스의 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지시면 가장 좋은 상태로 돌아갑니다. 병들지 않고 불편하지 않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치시는 것은 원래 상태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손은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고쳐주시는 손입니다.

열왕기상 19:5에는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대결하여 승리한 다음 완전히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잃고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만 남았다고 자탄하면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청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천사가 엘리야를 만져주시며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엘리야가 먹고 다시 누웠을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왕상 19:7)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엘리야를 어루만지셨습니다. 힘이 빠져 죽기를 자청하고 생을 포기한 엘리야도 하나님이 만지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만지면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만지면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만지면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만지면 죽은 자도 삽니다. 하나님이 만지면 우리 영혼이 살고 육체가 강건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실 때를 보십시오. 예레미야 1:9에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나님의 만지심은 말씀을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모든 것을 능치 못하실 일이 없는 손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낫게 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보호하십니다. 예수님이 만져 낫지 않은 병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행여나 여러분 영혼이 죽어갑니까? 주님의 만지심을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육체가 병들고 피곤합니까? 주님의 만지심을 바라십시오. 만지시면 회복되고 건강해집니다. 찬송 217장의 가사를 묵상하시며 늘 찬송하십시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주옵소서”. 주님의 권능의 손을 내게 대시면 병들고 피곤한 몸이 새롭게 되고 강건하게 됩니다.


셋째, 주님이 만지시면 일어나 섬깁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인이 일어나 예수께 수종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지시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목적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섬기게 하시려고 낫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일어나야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병이 낫고 건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아야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건강해야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 잘 해야 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적을 보시고 만지십니다. 만지시면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울 만났습니다. 그는 밝은 빛을 보고 눈이 어두워졌고 눈을 감은 채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은 제자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가서 눈을 만져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눈을 만졌을 때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냥 그의 눈이 떠져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 떠져 예수님을 보게 되었고 복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전 세계를 향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될 것을 봐서 만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한 장애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구걸하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하고 그를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찬미하며 기뻐하면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일어날 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지요? 예수님은 일어나는 목적을 보고 낫게 하십니다. 나중을 보고 현재를 낫게 하십니다. 일어나면 섬길 수 있습니다. 일어나면 섬겨야 합니다. 섬기기 위해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목적입니다.

욥바에 도르가라고 불리는 다비다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선행과 구제에 앞장 선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당시의 장례법은 죽으면 금방 장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 보면 아나니아가 죽었을 때에 그의 아내 삽비라도 모르는 사이에 장사를 다 지냅니다. 이건 너무 심했다 싶어요. 그러나 그 당시의 법이 그랬습니다. 더운 지방이기 때문에 시체를 오래 두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비다는 죽었지만 장사지내지 않고 시체를 씻어 다락에 두고 욥바에서 가까운 룻다에 있던 베드로에게 와서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하며 손을 내밀어 일으켰습니다. 베드로가 만졌을 때에 다비다가 일어났습니다. 이 광경을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다비다의 선행과 섬김이 사람들을 감동하였습니다. 장사하기를 거부하고 다시 살기를 원할 만큼 그 여인의 섬김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베드로도 그의 섬김에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그녀의 섬김이 그녀를 다시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다비다가 일어난 것은 구제 때문이었습니다. 섬김은 죽은 자를 일으키게 합니다. 섬기는 자는 일어나고, 일어난 자는 섬기게 됩니다. 스코트랜드 가정의 표어 가운데는 “봉사하기 위하여 구원받았다”(Saved to serve)란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고침 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어난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이는 말했습니다.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다. 당신은 서브를(섬김을) 잘 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정말 그렇습니다. 인생은 서브를 잘 해야 합니다. 잘 섬기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잘 섬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프랑수아 드 살르는 말하기를 “큰 덕행은 설탕과 같고 작은 성실은 소금과 같다. 설탕은 탁월한 맛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사용 빈도는 적다. 그러나 소금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큰 덕행은 드물게 발생하는 것이지만 작은 섬김은 날마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일 작은 섬김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금 같이 많이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살아야 하고, 일어나야 하고, 섬겨야 합니다.

결론

고든 맥도날드의 ‘친밀함을 향한 마음’이란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거대한 나라지만 동부의 아팔라치아 산맥과 서부의 록키 산맥을 제외하고는 중부에는 거의 산이 없습니다. 아팔라치아 산맥을 여행하는 한 여행자가 나무로 작은 개들을 멋지게 조각하는 한 장인을 지켜보기 위해 멈춰 섰습니다. 그 여행자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개들을 잘 조각할 수 있소?”하며 그 작품에 굉장히 감탄한 모습으로 물었습니다. 그때 그 장인은 “개가 아닌 부분은 다 깎아 줍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깎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깎아 주님의 형상을 만드는 분입니다. 진흙과 같은 날 빚어 주님의 형상으로 만드십니다. 주님이 만지시면 우리의 아픈 부분들이 깎여나갑니다. 쓸모 없는 마음들이 깎여나갑니다. 진정한 내 모습, 건강한 내 모습을 남기고 아닌 부분들이 깎여나갑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내 본래의 모습이 아닌 모습들이 깎여지면 쓰임 받고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이 나를 만져주시면 나를 낫게 하시고, 나를 일어나게 하시고, 섬기는 자가 됩니다. 주님이 매일 나를 만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만지시는 그 손을 느끼며 살기를 바랍니다. 나를 빚으시고 고치시는 주님의 만지시는 치유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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