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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의 땅에 도전한 여호수아처럼 / 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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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에 도전한 여호수아처럼"
여호수아1:1-9

운전면허증을 얻어 처음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뒷면에 "초보운전"이라는 안내표지를 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초보운전"이란 안내대신 애교섞인 말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이 차에 어린 운전자가 타고 있어요." "실력은 초보, 건들면 람보" - 협박성 안내도 있습니다. "미치겠지요? 저는 환장하겠시다." "좌우 백미러 전혀 안 봄."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 노련한 운전자가 되는 겁니다. 초보운전이 두려운 사람은 운전을 배울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 한국교회 안에서 셀교회로 나아가는 교회들을 보면 우리교회를 비롯하여 초보운전자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셀교회가 주님의 가슴속에 있던 바로 그 교회라면 분명히 이들 교회들은 언젠간 노련한 운전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이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양동물원이 있습니다. 두 시간을 걸어 세계 각지에서 모아온 맹수들을 구경하고 나면 마지막 "우리"가 나타납니다. 입구엔 이런 글귀가 씌여 있습니다. The greatest animal in the world.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 사람들은 저마다 궁금해서 다가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 사람앞에 한 장의 대형 거울이 나타나게 되고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동물은 바로 너 자신 인간이다."라는 뜻이겠지요.

  과연 인간이 동물 가운데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동물일까요? 

  첫 아이를 낳고 이 아이들이 첫 걸음마를 할때 얼마나 기쁘고 대견하고 행복했습니까? 대게 1년쯤 되면 걸음마를 하는데 저희집 아이들은 10개월이 체 못되어서 걸음마를 하더라구요. 너무너무 자랑스러워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했습니다. 10달도 안됐는데 아이들이 걸음마를 한다구. 우리들끼리니까 1년만에 걸음마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신기했지 그 장면을 송아지가 보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웃긴다고 했을 겁니다. 송아지는 낳자마자 뛰거든요. 인간이 100m를 9초대에 뛸 수 있게 된 것이 몇 년 안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인간 탄환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동물이 모여 올림픽을 한다면 인간은 강아지 한 마리에게도 이기기가 힘들 겁니다. 높이뛰기, 멀리뛰기 뭐하나 이길게 없습니다. 이빨 썩고, 안경끼고 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이 땅을 정복하고 이 땅에 문명세계를 건설 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일까요? 인간에겐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비전이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위대한 동물 인간에게 주신 축복가운데 하나가 개척정신, 도전정신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한 꿈이 이루어졌을 때,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우리는 "험한 산지에 도전한 갈렙처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편한길만 찾아 다니지 말고 바른길에 도전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은 이제 "약속의 땅에 도전한 여호수아처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거룩한 비전을 품고 살아라.  그 비전의 세계, 약속의 땅을 성취하는 삶을 살자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나라가 태동된 이후 줄곧 한 가지 비전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전은 세상을 떠돌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족장시대에는 심지어 비참했던 포로생활속에서도, 430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에도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 비전이었습니다.

  드디어 해방! 광야길을 마치고 이제 저기 요단강만 건너면 그토록 오랜세월 기다리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겠는데 거기서 지도자 모세가 죽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겠지요. 지도자가 죽어도 이 비전만큼은 포기될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워 다시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비전이 선포되어집니다.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온갖 도전과 역경을 이겨내고 그 비전을 이루어 가는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를 비전서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서는 단지 수천년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룩한 비전 성취서가 아닙니다. 오늘 자신에게 주어진 비전을 이루길 원하는 모든 사람 사람들의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한소망 비전서요, 류영모 비전서요, 여러분 모두의 비전서입니다.

  털털거리는 비포장 난지도 길을 지나 이곳 신도시에 교회하나를 세우고 싶어 논두렁에 엎드려 기도하고, 한소망교회를 세운지 12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준비하고 앞장서서 인도해 오셨건만 우리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잊어버리고 때로는 절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을 하기도 했습니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을때도 있었고 이미 시작된 개척교회 사역을 두고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몇몇 교인들은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쉬운일은 아닌지라 작은 어깨에 감당키가 어려웠던지 한 두 가지 구실을 붙혀 교회와 제곁을 떠나가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내 곁을 떠날 때마다 얼마나 상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했던 것만큼 그들이 미워지기고 했습니다. 미워지다가 문득문득 그들이 보고 싶어지고 그들이 보고 싶을때마다 남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못내 그들을 끌어안지 못한 좁은 내 가슴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한길을 막으신 하나님은 또 다른 새로운 길을 보여 주셨고, 한사람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은 새로운 사람들을 보내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교회 창립주일을 보내며 우리교회가 걸어왔던 정신과 하나님이 주신 비전 그리고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왜요? 오랜 교인이든 새 교인이든 한 마음 한 뜻, 같은 비전 같은 가치, 동일한 목표 동일한 꿈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한소망 모든 가족이 함께 손을 붙들고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비전과 가치를 가진 1만명 보다는 같은 비전, 같은 가치를 가지고 같은 말을 하며, 같은 생각을 품은 1천명을 원하십니다.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냅니다.

II.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비전을 주시고, 한 땅을 정복한 다음엔 또 다른 땅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비전과 꿈을 이루어갈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꿈을 꾸기로 유명한 로버트 슐러 목사님에게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했답니다. "목사님의 그 엄청난 꿈들이 이 땅에서 반드시 이루어 지길 원합니다." 그때, 로버트 슐러 목사는 "아니요, 제 꿈은 이루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 꾸었던 모든 꿈들이 이루어지고 나면 또 다른 꿈을 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주인공 - 여호수아란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야훼는 구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비전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우리를 주목시키는 새단어가 있습니다.

① 가라!  ② 축복의 땅을 얻게 하겠다.  ③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이제 이 싸움은 이미 승리한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이겨 놓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요. 여호수아는 불안에 떨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읽을 때에 "강하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들을때에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아,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구나" 감탄이 되십니까? 아닙니다. "강하라"는 얘기는 지금 여호수아의 마음이 약해질때로 약해져 있다는 얘기입니다. "담대하라"는 얘기는 지금 여호수아가 잔뜩 겁을 먹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는 얘기는 지금 여호수아가 두려움에 떨고 있고 산들바람만 불어도 쉽게 일을 포기할 만큼 웅크리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로버트 모건이 쓴 「홍해의 법칙」이란 책에 보면 성경 도처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수 없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하는 성경의 모든 상황은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러한 여호수아를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약한자를 찾아 오십니다. 낙심한자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여, 일어나라 !

  신구약 성경에 '일어나라'는 단어가 618번 나옵니다. 영적 전쟁에서 실패한 너의 모습이 진정한 너의 모습이 아니다. 일어나라! 낙심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너의 모습이 진정한 너의 모습이 아니다. 일어나라! 게으름과 나태한 모습이 진정한 너의 모습이 아니다. 일어나라! 이 시간 사업에 문제를 안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비전의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구경꾼처럼 앉아 있지 않습니다. 작은일에 넘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저희 교회는 정면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당을 들어올 때 이미 십자가를 통과하여 여기에 들어와 앉아 계십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의 등뒤에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하고 승리를 향하여 영원한 세계 또 다른 축복의 세계를 위하여 달려가는 종말의 공동체, 승리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는 여느 곳에서 볼 수 있는 벽돌이 아니고 예배당의 벽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전을 찾아 나올때마다 새로운 꿈을 향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절망과 좌절과 낙담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헬라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우스왕이 적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웃나라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나라의 사신이 찾아와 "우리 임금님이 생각해 보겠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때, 아게실라우스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의 왕에게 전하라.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일어나 행군하고 정복할 것이다!"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분이 계십니까? 의지할 곳이 없어 무엇인가를 붙들어야 살아 갈 수 있을만큼 약해진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 순간은 여러분이 상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해야할 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찬스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일어나십시오. 

  세상은 적자생존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힘없는 자에게 힘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쓰시기에는 너무 잘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름대로의 계획과 방법이 너무 철저히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틈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용기 백배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작아지고 빈 그릇 되어 두 손들고 항복할때에 하나님은 내게 다가 오십니다. 그리고 땅의 용기가 아니라 하늘의 용기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 목표를 주셨으면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기드온이 용사를 모집했을 때 3만 2천명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길르앗 산에서 만용으로 몰려온 사람 2만 2천명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도 미련한 병사들을 다 돌려보냅니다. 겨우 300명의 군사만 남았습니다. 이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십만 미디안 군사를 무찌릅니다. 이 전쟁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자는 하나님이다."  이 말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대성을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지난주 임직예배 설교에서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의 위인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기독교의 위인들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들어낸다」고요. 믿음이란 인간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크게 믿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일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사람은 참 위대한 사람입니다.

III.

  오늘 본문 1-6절은 세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문장은 2절에서 마쳐지는데 "내가 ... 주는 땅으로 가라"

  둘째 문장은 4절에서 맺어지는데 "너희 지경이 되리라"

  셋째 문장은 6절로 마쳐집니다.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여기 세 문장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주셨다"는 겁니다. 이미 주신 비전을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축복의 땅을 얻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그것은 미래의 천국보장과 현실의 승리보장입니다.

  누가 이 비전을 이룹니까? 출애굽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긍정적 보고를 했던 사람입니다. 적극적인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능력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승리한다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제외해 놓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능히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발바닥입니까?  여호수아는 맨발입니까?  신발을 신었습니까? 

  여호수아 5장 13절을 봅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발바닥 사건'입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것을 주겠다고 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합니다. 여리고성 싸움을 앞두고 떨어지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5장의 여리고성 사건도 발바닥 사건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호수아 1장 사건은 그 다음 일어나는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의 전초전입니다. 그것도 발바닥입니다.

  3장 15절을 봅시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영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요단을 건너기 위하여 앞장을 서서 언약궤를 메고 요단에 들어가 서 있는데 그들의 발이 4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넘쳐 흘렀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발바닥으로 요단강에 들어서자 요단강이 갈라졌고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육지를 다시 밟자 요단강이 합쳐 흐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맨발바닥으로 지내는 사람은 종 밖에 없습니다. 모든 자유인들은 신발을 신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 1장, 3장, 4장, 5장에 걸쳐서 계속 발바닥 사건이 나옵니다. 발바닥 사건에서 대표가 되는 고전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모세야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신발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이 메시지 때문입니다. 너는 내 종이니라!  네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말은 땅이 거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휘권을 쥔 통치권자는 나다. 너는 내 명령에 그냥 순종하는 졸병이다." 이런 뜻입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민감하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에 민감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에게 민감한 사람입니다. 셀교회가 무엇입니까? 셀모임을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찬송하며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기도할 때마다 응답받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셀모임의 자리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셀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앞에 맨발로 선 종들에게 하나님앞에 항복한 졸병들에게 축복의 땅,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한소망교회 지난 12년을 돌이켜 보며 고백할 수 있는 분명한 한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IV.

  지난 주간에 아내와 함께 산에 올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도하는 첫 번째 주제가 목회를 내 힘, 내 열정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제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크고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우리교회 비전을 위해 죽겠다는 결단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한 저와 함께 이 비전을 위해 함께 죽고 함께 헌신하고 함께 살아갈 사람들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 저곳에서 뭉개구름처럼 뭉실뭉실 일어나는 헌신된 무리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전도에 헌신된 무리들, 셀 목장에 헌신된 사람들, 어린이와 젊은이 사역에 헌신된 사람들, 꿈땅비전과 천수림에 헌신하는 무리들 말입니다.

  꿈땅비전에 온교회가 힘을 모으고 헌신해야 이 비전도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정부가 땅을 사주고 다른 교회 교인들이 우리교회 위해 건축헌금을 해 주겠습니까? 우리교회에서 이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비전도 우리 것이요 축복도 우리 것입니다. 기쁨과 보람도 우리 몫이요 헌신도 희생도 우리 몫입니다.

  고려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충절은 어려울 때 나타났습니다. 고려시대의 많은 군신들이 충절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성계에게 기울어졌을 때 이방원은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하여가' 시 한구절을 읊어보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산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자." 그때에 이방원에게 정몽주가 답하여 보낸 '단심가'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였습니다.

  국가가 위급할 때 애국자를 알 수 있으며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의인을 선별할 수 있고 가난한 살림 속에서 현모양처가 드러나고 성도의 신앙은 환난 중에서 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집안에 들어가서 어려움이 없고 낙이 있을때에 누가 감사를 못하겠습니까? 밖에 나와서 대접받고 높임 받을 때 누가 인격자 노릇을 못하겠습니까? 어렵고 힘든 환경속에서 신앙의 향기를 토할 때 그가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어려운 처지에서 충성할 때 그가 진정한 일꾼이 아니겠습니까? 큰 일을 치루고 나면 인물이 들어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부탁하신 말씀은 편안할 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앞에는 요단강, 건너편엔 두려운 대적이 놓여 있었고 안에는 무지하고 우매한 백성들이 지도자를 잘 따라주지 아니하는 때에 주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소망교회에 셀교회의 비전을 주신 것은 한국교회가 평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부흥되는 그런 상황에서 주신 꿈이 아니었습니다. 한국교회 이미지가 실추되고 전도의 문이 막히고 교회들마다 행복과 기쁨, 능력과 열정이 사라져 가고 있을 때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① 셀교회 모델교회 하나를 세우기까지 누군가 이 비전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② 주님이 보시고자 하는 성경의 원형교회를 이루기까지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③ 그러나 반드시 그 교회는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 교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나는 그 영광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강하라, 담대하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하십니다. 그 영광의 순간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만큼이나 가치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V.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나라의 신앙의 부흥은 그 나라의 부흥을 의미합니다.  한 교회를 쓰실 때 하나님은 그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 쓰십니다.  반드시 여러분 앞에 축복의 땅이 펼쳐 질 것입니다.  꿈땅비전은 단순한 교회건축의 꿈이 아닙니다. 우리가 넓은 땅에 가서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자는 꿈이 아닙니다. 한국땅에 셀교회 성지, 센타를 보는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땅에 셀교회 센터가 필요하셨던 모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축복의 땅을 얻게 하리라!  너의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땅을 정복하게 하십니다. 신약성경에서나 보던 그 교회의 영광을 한국교회가 보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은 분명 하나님이 보증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준비되어 포장된 선물은 아니었습니다. 온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수고하며 애써서 얻어야 할 땅이었습니다. 축복의 땅은 완성제품이 아니라 도전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이었습니다. 싸워서 얻어야 할 땅이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싸우도록 버려 두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신임장이 들려있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으며 우리를 넘어뜨릴 사람도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번 하신 말씀 중 '믿는 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받고 적게 믿으면 적게, 안 믿으면 못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기만하면 또 말씀대로 순종만하면 아낌없이 다 주시는 것입니다. 주신 분은 아끼지 않으시는데 어찌하여 마음껏 밟지 못하는가? 큰 은혜를 받아 큰 힘을 얻어 크게 일해야 할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은 누가 축복의 땅을 얻을 수 있는가?

1. 실패 할 것 생각하면 실패자 된다.

2. 자신의 미래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3. 크게 믿으라

4. 크게 기도하라.

5. 크게 행동하라.

6. 하나님의 도우심을 크게 얻으라.

  실업자와 실업가와의 차이를 아십니까? 낮에 노느냐 밤에 노느냐의 차이입니다. 일 할때 일 할 줄 알아야 큰 사람입니다. 약속의 땅은 발바닥으로 밟아야 얻는 땅입니다. 발 벗고 나서는 자가 얻는 땅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리스에 한 유대인 노파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 노파가 하는 일은 일정한 거리를 정해 놓고 매일 그 거리를 돌면서 중얼중얼 거리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할머니, 무엇을 하십니까?" 물었습니다. 할머니의 대답,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겠는데 나이 많고 가진 것이 없어서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니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했는데 이 땅을 밟으면서 이 땅을 우리민족에게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몇 년 기도하고 세월이 흐르면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유대인 할머니가 밟으며 기도하는 거리에 유대인 상점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유대인 학교가 세워집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거리가 됩니다. 유대인들이 상권을 잡습니다. 유대인 구의원, 시의원이 뽑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에게만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지금 우리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교회의 비전을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유대인 노파처럼 꿈땅을 돌고 도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도전한 여호수아처럼 그 땅에 도전 할 것입니다. 교회 비전을 가슴에 품고 신발을 벗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발벗고 나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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