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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하나임의 복된 사람들 / 삼하 17: 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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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나임의 복된 사람들
삼하 17: 27-29

  오늘은 사무엘하 17장 27절에서 29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마하나임의 복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무대는 마하나임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마하나임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곳인데 옛날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 보호를 받은 곳입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복지를 점령할 때 요단강을 건너기전 동편 땅을 두지파 반에게 기업으로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아홉지파 반이 기업을 받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쪽의 세 성읍, 서쪽의 세 성읍 모두 합해 여섯 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해 주십니다. 도피성이란 전혀 고의성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살길을 열어 주신 그곳이 바로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히면 꼼짝없이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도피성 안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살아있던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야 자유의 몸으로 가정에 돌아오게 됩니다.

  마하나임이라고 하는 곳은 요단 동쪽 도피성 중에 길르앗 라못에 속하였습니다. 즉 길르앗 라못에 속하여 도피성이 된 곳입니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당해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요단강을 건너가 마하나임에 임시수도를 정했던 곳입니다.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군대를 정비하고 반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했던 중요한 곳입니다. 이 때 다윗이 마하나임에 가보았더니 세 사람의 부자가 있는데 아주 복된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 복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본문에 의지하여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부모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복됩니다. (27-)

  갈릴리 가버나움에 세베대라고 하는 총각이 있었는데 결혼을 참 잘했습니다. 결혼상대가 된 아가씨의 이름이 살로메입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동생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두고는 이모가 됩니다. 세베대와 살로메 사이에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태어났습니다. 이 형제가 자라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어부가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되고 가르침과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이 형제 중에 맏아들인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순교자는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작은아들 요한은 간악한 로마정부에서도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와석종신하는 중에 모든 사도들이 죽고 전 세계 기독교의 최고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와 요한계시록 등, 총 5권의 성경을 써서 남겨주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업적과 좋은 일을 한 이 형제가 이래저래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평생동안 어부노릇을 한 세베대에게 이런 두 아들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었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밝히곤 합니다. 부모의 이름을 빛낸 기쁨이 되는 자녀들이었습니다. 복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7절을 보면,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주 훌륭하고 복 받을 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첫째는 소비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나하스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꼭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렇게 훌륭한 사람의 아버지가 나하스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소비는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마길이라고 하는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의 이름 암미엘이 역시 함께 나옵니다.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자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고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과 이유가 있습니다.

  마하나임에는 큰 복 받을 세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을 꼭 등장시키면서 아버지의 큰 기쁨이 되는 자녀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바실래에게서는 부모의 이름이 왜 빠졌습니까? 성경을 조금 더 읽어 내려가면 바실래에게는 아들의 이름과 사위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들은 김함이라고 하는데 다윗이 마하나임으로 쫓겨왔다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나라를 평정한 다음에 바실래의 아들 김함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다윗이 도와주며 키워주어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결국 바실래는 자녀 김함에게 기쁨이 되는 아버지였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덕분에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7장 63절을 보면 마하나임의 제사장 중에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실래의 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장인이 얼마나 훌륭한지 제사장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장인어른의 이름을 쓰고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것은 보통 얘기가 아닙니다. 얼마나 장인어른이 훌륭하고 또 존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 7장부터는 그 제사장 이름이 바실래로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실래는 사위에게 기쁨이 되는 장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부모들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자녀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리고 자녀들에게 기쁨이 되는 부모 또한 얼마나 복됩니까? 부모님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되고 자녀에게 기쁨이 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만에 일레인 차오(Elain Chao)라고 하는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 집안에는 여덟 살의 딸 하나가 있었고 형편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대만에서는 소망이 없는지라 희망의 땅 미국으로 이민을 하여 뉴욕 차이나타운에 정착을 합니다. 중국사람들만 주로 모여서 사는 곳인데 밑바닥부터 시작을 합니다. 미국이라는 곳은 몸만 건강하면 얼마든지 일해서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나라입니다. 아이들을 공부시키는데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두 내외가 벌고 여덟 살 난 일레인 차오는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미국은 고등학교 1학년만 되면 자신의 용돈은 스스로 벌어서 씁니다. 대학교 1학년만 되면 짐을 싸 갖고 기숙사로 들어갑니다.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자신의 등록금을 벌어서 공부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일레인 차오가 맨하탄에 있는 큰 법률사무소에 시간제로 일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그 정문 앞에까지 데려다 주면서 딸에게 간곡히 타이르기를 “첫째, 돈버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둘째로 너는 여기서 일을 하게 되고 사람들을 사귀게 될텐데 일하면서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배우고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워라. 그리고 셋째는 어른들의 악에 절대로 물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일레인 차오가 마음에 깊이 새겼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직장 생활할 때에도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주위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뽑히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미국전역에 있는 구호단체들이 함께 연합할 때 그 구호단체의 총재가 되었습니다. 동양사람으로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케네디가 만든 세계평화봉사단의 첫 번째 총재는 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총재가 됩니다. 또 미국 정부에서 동양사람에게 장관을 시켜 줍니까? 그래서 장관은 줄 수 없었기에 교통부차관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동양인으로서는 최고로서 올라갈 데까지 다 올라간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잘 되었을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믿는 부모에게는 기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레인 차오는 예수님을 믿고 봉사하는데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정도로 열심이어서 부모에게는 이래저래 큰 기쁨이 되었고 대만사람들의 자존심이 되었고 동양인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자랑거리, 부모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리고 여러분들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기쁨이요, 부모의 기쁨이 되는 복된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베풀어주는 부자가 복됩니다. (28-)

  돈이 많은 부자들이 돈이 들어오는 대로 움켜쥐고 그 손을 펴지 않거나 또 장롱 속에 쌓아두고 썩힌다면 나라의 경제는 위태로워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 죽게 됩니다. 지금 380조원의 돈이 갈 곳이 없어 공중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돈이 강남에 뚝 떨어지면 강남의 아파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릅니다. 김포나 파주에 뚝 떨어지면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릅니다. 그것은 퍼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쓰는 것도 아닙니다. 투기입니다. 쓰는 것과 투기는 다릅니다. 부자들은 돈이 들어오면 장롱을 열어놓고 손을 펴고 주머니를 열고 써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장사하는 물건을 자꾸 사주고 팔아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난한 사람도 벌어먹지 않습니까? 내 돈만 내 돈이라고 하면서 움켜쥐고 자기의 돈만 불리려고 투기하면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죽지 않습니까? 그쯤 되면 자기는 온전합니까? 혼자서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부자는 자꾸 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허튼 곳에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벌어먹기 힘든 백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에는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어주는 부자가 참 복된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부터 29절 상반절을 보면,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27절에 베풀어주는 부자 세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소비와 마길과 바실래입니다. 이 사람들은 부모에게 큰 기쁨도 되었지만 자녀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람들은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는 부자였습니다. 복 받은 사람들이요, 또 복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던 다윗 왕과 쫓겨온 군사들이 마하나임에 밀려왔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고 예루살렘에서 정권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하나임의 세 사람이 쫓겨온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가 쿠데타군이 요단강을 건너 쫓아와서 소탕하는 날에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세 부자는 첫째로, 위험 속에서도 베풀었습니다. 둘째로, 자신들의 가진 것으로 베풀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얻어다가 베푼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부자 셋은 각자가 제 멋대로 베푼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힘을 합해서 크게 베풀었습니다. 넷째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베풀었습니다. 필요 없는 것을 아무리 베풀면 무엇합니까? 필요로 하는 것으로 베풀었습니다.

  이 베풂이 얼마나 복됩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람은 복 받을 사람이요, 또 복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베푼 것은 하나님께서 또 채워주십니다. 베풀 줄 모르고 썩히는 부자도 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베푸는 부자만이 복을 받습니다.

  “남태평양”이라고 하는 뮤지컬이 있었습니다. 그 때 주연가수로 나왔던 메리 마틴이라는 여자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사가 아주 유명했습니다. 그 가사는 오스카 헤머스타인이라고 하는 시인이 지었는데 이 시를 짓고는 죽었습니다. 이 시인이 메리 마틴이라는 가수를 좋아하는지라 그 가수에게 그 시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시에 곡을 붙이고 부른 노래가 바로 그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사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종은 그대가 울릴 때 종이 된다. 노래는 그대가 부를 때 노래가 된다. 사랑은 베풀어 줄 때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베풀지 않고 마음으로만 그치고 말로만 끝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지지 못해도 좋습니다. 받으며 사는 것보다 베풀며 사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셋째, 무조건 봉사자가 복됩니다. (29-)

  조건이 있고 까닭이 있으면 참 피곤합니다. 시골 동네 앞뒷집에 살면서 수십 년을 살아온 소꿉친구들은 얼마나 사이가 좋습니까? 어렸을 때 벌거벗고 시냇물에 목욕하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 때에는 이해 관계가 없습니다. 저 앞집의 아들을 사귀어 두어야 어른이 되면 덕을 볼텐데...라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그 친구가 좋으니까 사귀는 것입니다. 계산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오래 가는 것입니다. 정이 깊어집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가만히 보니까 저 사람을 사귀어두면 내가 수지 맞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조건을 들고 사귀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 조건이 이루어지면 재수 좋았다 하고 안 이루어지면 난리가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건이 있는 것은 참 피곤하고 불행합니다. 타인을 섬기고 베풀 때에도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구쟁이 친구들과 점심을 먹어도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을 가지고 사귄 사람과는 점심을 먹고 나면 엉뚱한 조건이 있음을 보면서 얼마나 불편하고 피곤하고 불행합니까? 이처럼 봉사에도 섬김에도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9절 하반절을 보면,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고 하였습니다.

  부자 셋이서 너를 돕고 섬길 때에 그 까닭이 무엇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저 백성들이 쫓겨오느라 어느 집에 들어가 쉴 수도 없고 들판에서 참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라고 하는 그 이유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것은 조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 사람이 다윗 일행을 돕고 섬길 때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좋은 것으로 당신들을 도왔으니 반군을 진압하고 나라를 평정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후에 무엇을 주겠냐는 조건이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지 않았습니까? 주는 것은 주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이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이런 복된 사람이 마하나임에 있었다는 것이 다윗에게는 얼마나 큰복이었는지 모릅니다.

  존 울드릭이라고 하는 열 살쯤 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하게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요, 어머니는 사회복지사였습니다. 복지기관에서 근무하면서 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해서 복지혜택을 받도록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울드릭의 어머니가 관내를 돌아보니 그 당시만 해도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 울드릭에게는 장난감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너무 가난한 집이 있는데 그 아이들은 장난감을 살 여유가 없으니 돌멩이를 갖고 놀고 망가져서 버려진 장난감을 주어다가 가지고 놀며 겨우 밥 세끼를 먹을까 말까 하는 형편에 있다고 얘기하면서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니 너의 장난감 중에 가장 큰 것을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놀다가 정신 없이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장 큰 장난감이 비행기인데 비행기 날개가 4피트나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이 타고 놀 정도입니다. 보물처럼 닦고 아끼며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는데 준다고 약속했으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미국에서는 아이들에게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따라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 집 아버지는 술주정꾼으로 살다가 집을 나가 버렸고 어머니는 병들고 제대로 벌지 못했습니다. 울드릭의 어머니가 그 아이들에게 울드릭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비행기 장난감을 줬습니다. 그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기뻐 뜁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울드릭도 그들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울드릭은 참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는 18년이 지났습니다. 울드릭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 어느 교회에서 자꾸 청빙을 함으로 부임해 갔는데 예전에 비행기를 줬던 집의 어머니가 그 교회의 열심 있는 교인이었고 딸은 여전도회 회장이었습니다. 아들 형제는 장난감 비행기를 보면서 꿈을 키워서 큰아들은 보잉 747의 기장이 되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공군소령이 되어 있었는데 최신식 전투 폭격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형제 중에 형은 그 교회의 장로였고 동생은 집사였습니다. 조건 없이 주었더니 일이 참 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를 섬기되 조건 없이, 봉사하되 조건 없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난감을 통해서 그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시리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마하나임의 복된 사람들과 같은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부모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복됩니다. 부모에게 수치가 되고 근심거리가 되는 자녀가 복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쁨이요, 자랑이 되는 자녀가 복된 사람입니다.

둘째로 베풀어주는 부자가 복됩니다. 부자가 움켜쥐기만 하고 썩히면서 베풀 줄 모른다면 백해무익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중의 어리석은 부자 농부와 같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소비와 마길과 바실래처럼 베풀어주는 복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조건 없이 봉사하는 자가 복됩니다. 마하나임의 복된 세 사람은 절대로 조건이 없었습니다. 돕고 섬기는 그 자체로 만족했습니다. 실로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도 거울을 삼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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