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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이 족속을 구원하소서 (단 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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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족속을 구원하소서 (단 9:1-19)
                                  -  박혁순 (대전 성연장로교회 담임 전도사)

저는 이 설교를 작성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오늘 설교가 신앙 성장과 영적 생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현실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실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척이래 저 나름대로, 설교에 대한 분명한 원칙을 정한 바 있었는데, 특히 주일 설교는 가급적 믿음을 키우고 삶의 실존적 희망을 북돋아 주는 주제로 하려고 노력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의 경우, 꿈많은 젊은 목회자로서, 장래에 깊이 있는 신학자가 되고자 하는 신학도로서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치우친 믿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고, 잘못된 신앙적 지식, 타계주의적이고 몰역사적이며 이기적인 신앙행태를 바로 잡고 싶었고, 하나님 앞에서, 민족과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교훈과 실천 방법을 늘 나누고싶었습니다. 수많은 예언자들과 우리 주님이 제시했던 하나님 나라는 과연 무엇인가, 주기도문에서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고,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등,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알아야할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올바른 현실 인식과, 취해야할 자세와 실천해야할 사항들에 대해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살이에 지치고, 돈문제에 시달리고,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가족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여러분의 얼굴을 이 강단 위에서 바라보노라면, 도무지 제 욕심대로, 저의 신학적인 주장들을 설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조차 일반적인 교회들, 다른 목회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주로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에 관한 설교를 해왔던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젊은 전도사가 아직 50명도 안되는 성인 예배를 인도하면서,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해 각성을 시키고 사회참여를 촉구한들, 세상이 얼마나 변하겠느냐 하는 자조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래에 저는 지금 우리 하나님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진일보한 믿음과 지식과 실천과 헌신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와 미군의 선제공격에 따른 한반도 전쟁의 위기, 남한의 경제침체위기,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 등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족속에게 지속적인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저는 느낍니다. 실제로 깨어있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죄인들이 재에 앉아 옷을 찢듯이, 우리민족이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생명 살림을 위해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부닥친 위기에 대해 건전한 의식과 깊은 소양이 있는 지식인들과 운동가들도 우리 한국인들이 이대로 있다가는 안된다는 경고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들이받아 침몰하기 직전의 상황처럼, 대다수 이 나라의 백성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국내외적인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간파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러한 현실을 성경에서 찾아보자면, 아시리아제국과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짓밟히고 멸망당하기 전의 남북 이스라엘의 상황과 거의 일치할 것입니다.

다윗의 왕조가 B.C. 928년에 남북으로 갈린 즈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서 떠나 우상숭배와 배금주의와 이기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거짓 예언자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외면한 채, 왕과 귀족들에게 태평성대를 예언하였고, 각 제사장 계급은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과 종교적 특권을 탐닉하며 하나님의 진리와 길을 왜곡했습니다. 기득권자의 권력과 재력은 더욱더 늘어가는 반면, 민중들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지고 도탄에 빠져갔습니다. 저 유명한 나봇의 포도원 사건처럼 쌀 999섬의 부자가 천석군이 되기 위해 가난한 소작인의 한 가마의 쌀을 빼앗는 식의 착취가 즐비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가운데서, 우거하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더 소외되고 비인간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답시고, 형식적인 금식과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치며 예배하는 것은 지속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님은, 제 동족을 돌보지 않고 이기적인 종교생활에만 몰두하는 그들의 위선적이고 가증한 금식과 예배를 거절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받으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장 3이하)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1)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아 등의 소수의 진정한 예언자만이 목이 터져라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했지만, 궁전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거짓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오히려 그들을 꾸짖고 핍박하였을 뿐 아니라, 돌로 치고, 칼로 찌르며 살해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급속하게 중근동 지역의 패권을 장악해가던 아시리아 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은 창칼을 갈아 수십만 대군에 기병과 전차를 이끌고 각각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을, B.C. 586년에 남 유다를 멸망시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들의 것이 아닌, 큰 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어 70년간 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절망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 민족의 현실과 한국 사회, 그리고 한국 교계의 현실과 비교할 때, 저의 진단이 무리가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이 시간을 빌어 교계가 혼동하고 있는 한 가지 문제를 분명히 짚고, 우리 성연교회 성도 여러분들께 바르고 분명한 현실인식과 메타노이아, 즉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북핵 문제나 한반도 전쟁 문제 등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내부적인 문제, 아니 우리 기독교 교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남한에서 나라의 운명과 전쟁의 위기에 대한 문제를 놓고 양극단의 심각한 분열과 반목과 투쟁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안 없이 확산되는 무모한 반미의 기류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앙적이고 극단적인 친미주의입니다.

여중생 장갑차 사망 사건의 부당한 재판으로 인한 반미의 열기는 전국을 휩쓴 바 있습니다. 사람을 둘씩이나 죽여놓고 과실을 범한 사람이 없다는 미군재판정의 판결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습니다. MBC의 시사프로그램을 보니, 그 장갑차 사건은 이미 예고된 일일만큼 미군의 기강해이와 위법사항이 많았습니다. 사건의 당사자인 두 병사의 경우를 차치하고서라도, 좁은 길을 교행하지 못하도록 한 군법을 어기고 양쪽으로 교행하도록 지시한 지휘관도 분명히 잘못했고, 관측병과 운전병 사이에 교신이 불량했다니 통신기기의 정비를 맡은 정비관들의 책임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재판의 결과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한국측의 재판 참여 없이, 졸속으로 군사재판을 치루어 무죄 방면을 시키고 두 가해자를 본국으로 급히 빼돌린 일에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우리 시민단체들이 "그 장갑차래도 구속시켜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장갑차 사건으로 인한 촛불시위는 국내외적으로 큰 오해를 사고 있습니다. 실제로 소박한 정의감과 애국심으로 시작된 촛불시위에는 처음부터 강경한 반미감정과 미군철수에 대한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에는 아주 심각하고 과장되게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주한미군의 한 소령이 시내에 나갔다가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했을 때 출동한 한국 경찰이 뒷짐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워싱턴 정가에 널리 퍼져있답니다. "우리는 저희나라 지켜주려고, 돈쓰고 생고생하는데, 이거 한국사람들이 너무하는 것 아니냐" 하는 불만이 가득하답니다.

사실 주둔군에게도 명분과 논리는 있습니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다룬 "하얀 전쟁"이라는 국내 영화가 있습니다. 원작 안정효씨의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인데요,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한국 주둔군이 밤새 보초를 서다 철책 바깥의 인기척에 놀라 총을 난사합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 보니, 부대 바깥에는 인근 농가의 소떼들이 난사된 총을 맞고 죽어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베트남 농민들이 항의하고 시위하자, 한국군의 한 병사가 투덜거립니다. "저희나라 구해주려 왔는데, 너무하는 것 아냐?". 그렇습니다. 이렇듯 미군도 지금 장갑차 사건을, 불가피한 교통사고로만 여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이지만, 미국은 이 문제를 너무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반미시위나 미군철수주장을 겸허한 태도로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의 이중적인 태도와 감정적이고 편파적인 대응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작년 월드컵 당시 한국과 터키간의 3, 4위전이 열리던 바로 6월 29일, 서해상에서는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국군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진 바 있습니다. 이것은 훈련중의 교통사고가 아니라, 엄연히 적군에 의한 젊은이들의 전사였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의 축제 분위기에 들뜬 국민들은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에 거의 무관심했습니다. 20여명이나 사상자가 났는데, 무슨 집회나 촛불시위는커녕, 사회 지도층 인사의 빈소 방문도 거의 없었습니다. 전두환만이 그곳에 다녀갔다고 합니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주한미군의 훈련중의 교통사고에 대해 항의할 명분과 정당성을 남녀노소를 총괄한 국민적 공감대로부터 이끌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여하튼, 지금 미군 당국자들은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 혹은 후방 이전을 심각하게 고려중이랍니다. 그들은 심각하게 묻습니다. "한국인의 진정한 입장을 밝혀라. 그러면 언제든지 우리는 나가겠다"하면서 주둔군을 '오끼나와'나 '괌'으로 철군시킬 것을 다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주한미군 철수나 지상군 감축에 대한 논의의 시점이 매우 좋지가 않다는데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지금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전적으로 용인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무모한 핵개발을 시도하는 북한이 이대로 나간다면, 미국의 핵시설 폭격을 자초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미국의 현직 국방부 장관인 럼스펠드는 아직 살아있는 16명의 전직 국방부장관들을 초청하여,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의 전략 브리핑을 마친 바 있다고 합니다. 미국 정치인들의 조찬기도회에 초대되는 국내의 저명한 김진홍 목사님은 근래 미국 방문시 고위 정치인들로부터 미국의 북한 공격과 주한미군 감축/철수에 대한 경고를 직접 들은 바 있다고 합니다. 가장 유력한 정보는, 노대통령 취임전 윤영관 장관이 인수위원으로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관리들이 김대중 전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북한의 핵개발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겠다, 즉 선제 공격을 해서라도 막겠다는 언질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미국이 주한미군을 남한의 후방으로 옮긴다거나, 지상군을 감축한다거나, 철수시킨다는 의미는 전쟁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현대전은 공중전이고, 폭격전입니다. 미국은 지금 '오끼나와'나 '괌'에 군사력을 재배치하여 폭격기로 승부를 걸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의 고려는 북한과의 대결을 끝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반대로 진짜로 한번 붙어 보려는 것입니다. 이제 미국은 자국 군대의 손실을 최소한 하면서, 핵개발을 감행하는 북한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습니다. GBU-28/37 폭탄처럼 지하 30m까지 관통하는 고성능 폭탄과 특수 미사일을 통해 간단히 핵시설을 파괴하고, 다량의 폭격기로 북한 주요 군사시설을 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후 한반도의 전쟁 시나리오가 어떻게 진행될지 아십니까? 바로 여기부터가 문제입니다. 휴전선 155마일에 걸쳐 북한군은 11,700기 이상의 장거리포를 배치해두고 있는데, 북한이 공격을 당한 직후에는, 바로 이 대포들이 남한을 향해 불을 뿜게 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대포들의 사정거리는 서울 및 수도권뿐 아니라 대전까지 닿습니다. 1994년즈음에 북한이 남북회담장에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운운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결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서울 시내의 땅 한 평당 폭탄이 한 두발 떨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일본 주요 도시나 미국 서부를 향하고 있는 북한의 로동 미사일이나 대포동 미사일이 태평양 상공위로 발사되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한반도,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어찌될 것일까요. 그러므로 성급하고 근시안적인 미군철수의 주장은 재고되어야 마땅합니다. 특히 일부 친북 운동권의 목소리는 더더욱 국민적 합의와 공감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남북 관계나 주한 미군에 대한 일부 보수세력의 인식과 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지난날 정당성나 명분 없던 군부독재세력이 체제 유지용으로 잘 써먹었던 극렬한 냉전논리와 반공교육교범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바지자락만 붙들고 남북화해보다는 남북대결로, 평화정착과 긴장완화보다는 무력응징으로 승부수를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무모한 냉전 잔존세력들이 남북관계의 해빙과 신뢰조성, 평화통일을 위한 효과적인 정책 추진과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남북 화해와 협력 그리고 건설적인 미래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꽉 막혀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의 소망교회의 해프닝은 이에 대한 단적인 예입니다. 지난 3월 2일에는, 올해 첫 남북한 민간교류 행사인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민족대회"의 공식일정 가운데 하나로,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 측 기독교 신자들이 소망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에서 북측 대표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신원이 불분명한 몇몇 사람들이 예배 도중에 소란을 피운 것입니다. 북한 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오경우 목사가 최근 남북정세와 북미간의 긴장관계를 언급하며 미국을 '외세'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자, 예배당 뒤편 있던 그 사람들이 "그만해라", "빨갱이들", "곽선희 목사도 빨갱이야!"라며 소리를 치고 예배 중에 난동을 피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다가가서 소속과 소망교회 신자 여부를 묻자 이들은 "그런 건 알 필요가 없다"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답니다. 소망교회 당회장인 곽선희 목사님을 수천명의 교인이 보는 데서 빨갱이로 몰아 부치는 유형의 사람들이 바로 지금 제가 언급하는 남북한 미래에 대해 인식의 수준이 형편없는 냉전주의자들입니다. 여러분, 곽선희 목사님이 누구입니까? 그분의 부친이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북한군에 의해 처형당한 순교자 아닙니까? 그분이 빨갱이, 공산당을 미워하려면 그 사람들보다 몇 천 배 더 미워해야 할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왜 북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까? 바람직한 남북 관계를 위해, 화해와 통일을 위해 미래의 초석을 놓고자 그리 한 것 아니겠습니까?

요 몇주전부터 주말이면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일부 보수교단과 교회가 대규모 기도회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계의 전체적 합의나 우리 교단의 공식적 입장과는 무관한 시위입니다. 교인이 수만, 수십만이 모이는 몇몇 대형 교회가 수많은 인력을 과시하며 기도회를 주관하므로,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국 전체 개신교의 입장으로 착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름도 생소한 각종 극우 단체와 연합해서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궐기대회인지 성서적인 기도회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장터나 거리에서 자기의 의를 과시하며 위선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책망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다만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아실만한 목사님들이, 무슨 기도회를 정치적 궐기대회 비슷하게 주관하고 계시니, 목사 후보로서 저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5-6)

저는 인터넷 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많은 국민들이 이로 인해 또다시 한국의 기독교를 욕하고, 비아냥거리고, 헐뜯고, 분개하는 현실을 목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회를 주관하는 목사님들과 주최측은 여전히 냉전시대의 경직된 논리로 남북화해의 무드에 찬물을 끼얹고,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건의 억울함이 가시지도 않은 지금,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를 휘날리며 국민 정서에 반하는 행동을 연출하고 있으며, 여전히 북한당국을 대화와 설득의 대상이 아닌 반목과 전쟁의 대적으로만 규정하려는 의도가 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전 한 신문의 만화만평에는 이 시청앞 기도회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전투기 조종석에 앉아있는 부시 대통령이, 성조기를 손에 들고 휘날려 주는 한국인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흡족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 때문에 산다". 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각종 대형 사건 사고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것이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많이 듣습니다마는, 세상에 어떤 나라의 우익단체나 보수세력이 타국의 군대가 주둔해줄 것을 애원하며, 남의 나라 국기를 대형으로 제작하여 국가의 중심부인, 수도 서울의 시청 광장에서 나부끼게 하는 경우가 있단 말입니까? 원래 우익이나 보수세력이란 민족, 국가의 공동체적 가치를 내세워야 합니다. 대개는 민족주의, 애국주의, 전통적 이념과 사상, 문화의 존중, 친족주의와 같은 가치들이지요. 그러므로 타국의 군대가 주둔하여, 이질적인 문화나 문제를 양산해 내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우익의 모습, 보수세력의 이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요즘 정치 협객 '김두환'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 {야인시대}를 보십시오. 어디 4,50년대의 국내 우익단체가 미군정에 빌붙어 민족의 운명을 구걸하고 있는지. 저는 최소한 박정희 대통령도 민족의 자주권에 대해 고민했던 흔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과거에 조선왕조가 왜 망했습니까? 동학항쟁을 비롯한 나라 안의 문제와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이고, 일본의 군사를 불러들이는 판에 망한 것 아닙니까? 왜 김춘추와 김유신이 이룬 삼국통일이 불완전한 것으로 사학자들이 비판합니까? 그들이 당나라의 군대에 의지하여 민족적인 단결과 통일을 이끌지 못했기 때문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으로부터 이 기도회를 살펴보자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지금 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광장에 나온 것인지, 미국에 환심을 사려고 '쌩쑈'를 하는 것인지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이 그 기도회를 보고, 다음 이사야 31장의 성경구절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저는 과연 이 성경 구절이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과거 이스라엘 족속도 우리나라처럼 죄악과 강포에 휩쓸려 있을 때, 아시리아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으로부터 침략과 전쟁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당시의 동맹국인 이집트의 군사력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목소리는 단호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1-3)

여러분, 미국은 그냥 미국일 뿐입니다. 미국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미국은 한국에 임마누엘로 있을 존재가 아닙니다. 격변하는 세계 정세에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습니다. 한국은 혈맹이었던 대만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93년 당시, 한국정부는 대만정부에게 단교하는 일이 없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거짓말쳐놓고, 다음달 중국과 수료를 맺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만 대사관을 빼앗아서 고스란히 중국당국에 바치는 바람에, 지금 대만 대표부는 세종로의 한 빌딩의 사무실을 임대해 셋방살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만에서는 한끼의 양식을 거두어 한국 피난민에 보내는 캠페인이 있었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대만의 기성세대는 한국의 배신에 분개하며 울었습니다. 한국이 왜 대만을 포기했습니까? 간단합니다. 국익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미국도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떠납니다. 지금껏 미국은 중국과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 필리핀과 오끼나와에 주둔해 왔습니다. 북한과 러시아와 일본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을 뿐입니다. 미국이란 나라에게 한국은 미미할 뿐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있을 필요가 있으니까 막대한 군비를 써가며 한국에 주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미국을 더 의지하자고 소리를 높일 때입니까? 그들의 군사력에 의탁해서 안보와 통일을 꾀해야 할 때입니까?

촛불시위를 주관하는 한국의 젊은 세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사실 촛불시위라도 하는 젊은이들은 아주 건전한 편에 속합니다. 며칠 전 코리아리서치센터가 전국의 성인 1,543명을 대상으로 전화조사로, '국민체감지표'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조사에서 경악할 만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국민의 10명 중 네 사람이 가능하다면 이민 가고 싶다고 응답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민 가고 싶은 사람의 절반 이상이 20, 30대 젊은이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특히, 20대 여성의 경우 3명 중 2명꼴(66.6%)로 이민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이 이 지경입니다. 온 국민들은 로또광풍에 휩쓸려 다니고, 지도층과 기득권층은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며, 계층간 삶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지고, 실업율과 일용직은 점점더 늘어가고, 젊은이들은 이 나라를 정을 붙이기는커녕 우습게 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자가 이 나라를 이대로 두고 보면 되겠습니까?

본문에 보니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시기에 금식을 하면서 베옷을 걸치고, 재를 깔고 앉아서, 홀로 나라와 민족을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70년만에 포로생활을 끝내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에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그리운 고토에서 갱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연교회가 전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가 다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세계 거민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 바다 건너 이라크에는 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당신의 잃어버린 자녀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곳 이라크에도 박혁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곳 이라크에도 박혁순으로부터 사랑 받는 김선경이 있습니다. 박혁순이 전쟁나가 죽는다면 통곡하며 절망에 빠질 부모가 있습니다. 폭탄이 터져 매몰된 건물의 잔해 더미 아래에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은목이가 있고, 은성이가 있고, 지훈이가 있고 예인이가 있고, 다혜가 있게됩니다. 파편이 튀고, 불길이 솟는 가운데, 사지가 절단되어 고통중에 울부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곧 식량공급이 중단되고 전력이 끊기고 의약품이 고갈된 처참한 어둠 가운데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야 합니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라지만 부시 대통령은, 단언하건데 분명히 잘못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바른 믿음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듯이, 그의 믿음 또한 올바르지 못합니다. 생명은 그 어떤 정치 논리로서 흥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 누구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해하며 정치적 승리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 아래, 그 어떤 명분으로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께 커다란 죄악입니다. 이제 이 땅에는 거룩한 전쟁, 즉 성전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많은 미국인들과 한국의 친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인들조차 헷갈리고 있습니다. 헷갈리지 마십시오. 이것은 아닙니다. 이라크에서나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부시가 성전이라는 명분으로 이라크나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진행한다면 분명히 11세기의 십자군 전쟁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고 기독교 세계를 퇴보시키게 될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소수 예언자들처럼, 지금도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전쟁의 부당함을 압니다. 20세기 초반에 모든 독일 교회와 대다수 독일 기독교인들이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적 정책과 유태인 박해와 전쟁에 적극 지지하며 찬동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선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하나님이 선사한 영도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칼 바르트나 본 회퍼 등의 소수의 신학자와 고백교회의 목사들만이 참된 예언자적 시각을 지니고, 바르멘 선언을 선포하여 히틀러와 나찌당의 시책과 전쟁을 반대하며 항거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박해당하고 추방당하고 순교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게르만민족이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과거 이스라엘에서 소리 높여 목이 터져라 회개를 촉구했던 예언자들을 무시하고 박해했던 우매한 이스라엘 족속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흘러 공의의 하나님과 인류의 역사를 통해 어떻게 판단하셨습니까? 그당시 대다수 독일 교회와 교인들이 잘못된 길을 택했었고, 소수의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실제로 우리 주님도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려 압제하는 제국주의자 빌라도나, 독재권력자 헤롯왕이나, 종교적 권력자인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등에 대해 일절 동조하거나 긍정하는 말씀을 하신 예가 없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언급할 일이 있으시면, "여우 녀석",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 등등의 욕설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그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권력자들에 의해 어떤 처우를 당하셨습니까? 정치적 형벌인 십자가형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팻말 아래서 로마에 대한 반제국주의 혁명가와 반란자나 맛보는 모진 고통과 가혹한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현실 세계에 폭압적인 권세와 불의한 권력에 분명한 비판 의식이 있으셨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에도 분명 대립된 두 견해와 태도가 있을진대,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시비가 나뉘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살림을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용서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짜배기 그리스도인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역사 가운데, 혹은 마지막 심판날에 밝혀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성연 교회도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생명 살림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전세계를 덮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지금 교인들이 미국사람들에게 잘 보이고자 시청 앞에서 수천장의 성조기를 흔들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을 의지할 때가 아닙니다. 미국에 의해 보호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내 자식과 내 가정만을 향한 이기심을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계 혹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방주 속에 있는 개인들일 뿐입니다. 방주가 가라앉으면 우리도 가라앉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 즉 교회일치 운동을 위한 교회 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심벌은 그런 의미에서 새겨 볼만합니다. 작은 배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십자가 위에 '오이쿠메네(oicumene)' 즉, '한 집', '한 세계'를 뜻하는 단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한 집이요, 한 세계요 한 척의 배인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능력으로서 이 세계가 진정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성연교회의 청장년은 아직 5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청앞 광장의 기도회를 나가봐야 표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수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의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똑바로 믿는 자입니다. 우리가 세계와 민족과 나라의 현실을 직시하고,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릴 때, 하나님은 이 위기와 난국을 소멸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남북한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화해하고 통일할 그 날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우리 성연교회 성도님들이 40일 특별기도회를 하실 것을 이 시간 제안합니다. 마침 오늘이 사순절을 시각하는 첫주일입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참회와 절제와 깊은 묵상으로 고난의 길을 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활절까지 40일간 오전금식을 할까 합니다.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을 주님의 심장을 품고 세계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기간으로 보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성연교회가 지금은 비록 소수이지만, 기드온의 300 용사처럼 영적 소수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리가 기도로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니엘처럼 기도하십시오. 야곱처럼 기도하십시오. 밤을 새워 새벽까지 천사를 붙들고 죽기 살기로 기도한 얍복 나루터의 야곱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언약과 응답을 받을 때까지 죽기 살기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자다가도 깰 때입니다. 지금 큰 나라의 손에서 민족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국가 경제와 가정 경제가 피폐되고 있습니다.

오늘 다니엘처럼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은밀히 간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족속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방 가운데 제사장의 나라로, 세계의 모든 거민를 섬기는 선교 중심국으로 세워주시사,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 존귀와 영광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기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도움을 넉넉히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만유의 주시며, 평화의 왕이신 주님, 이 족속을 구원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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