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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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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마가복음 10:13-16)

오늘 우리 교회는 "이 땅의 모든 어린이를 예수님께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어린이 초청 잔치를 열었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하고 놀라운 것들을 만나고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적인 유산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녀들에게 영적인 유산을 남겨주기 위해 어린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와서 그저 그렇게 살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정해진 운명에 구속되어 절망과 불행마저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한숨짓다 끝나는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보다 더 소중하고 더 중요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재단할 수 없는 영적인 능력과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특별히 이제 막 꿈을 키우며 자라나는 자녀들의 존재 가치는 무한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영적인 교훈으로 바르게 길러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물질적인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부모들이 영적인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주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한 시대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믿음은 이삭과 야곱을 통해 온 세계 열방의 사람들에게 미쳤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나 한 사람에게서 머물지 않고 다음세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커지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축복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가라!

13절을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예수님께 내놓고 그 문제들을 해결 받고 필요를 채움 받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모여드는 많은 사람들을 질서 있게 잘 정돈을 시키고 예수님이 일하시기 어려움이 없도록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축복기도를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어른들 상대하기도 힘든 판에 어린아이들 까지 상대하려니 마음도 분주하고 짜증이 났습니다. 급기야 제자들은 그 아이들을 꾸짖어서 보냈습니다. 아마도 이랬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가라'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비단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만의 모습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을 어른들의 방해거리정도로 취급하는 일들이 우리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근한 예가 목사가 심방을 갔을 때, 아이들이 예배에 방해가 된다고 아이들의 방에서 마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아이를 영적으로 방치하는 죄악입니다. '이 아이는 예배를 방해할 자'라고 단정해버리고 방치하는 것은 이 아이를 영적인 아이로 커가지 못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오셔서 심방할 때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미리 가르쳐주고 그 예배에 참석하게 만들어야 올바른 것입니다. 저녁예배에 오는 아이들도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부모 곁에서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또한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하나는 아이들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고 소비적이기 때문에 교회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교회는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른 가치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세상은 경쟁을 통해서 이겨서 이득을 얻어야 가치를 인정해줍니다. 성적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백 마리의 양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집을 뛰쳐나가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은 분명히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그냥 무시해도 될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무가치한 것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그것을 찾기 위해 방바닥을 쓸고, 산울로 다니며 찾고, 한없는 사랑으로 기다리는 분으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적 가치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서 주인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쏟아 붓고 투자해야 하는 어린이 사역에 많은 관심을 쓰지 않습니다. 관심을 쓰면 쓸수록 교회 재정이 들어가고 그러면 어른들이 더 많이 헌금해야 하고....., 이러한 세상적 잣대를 교회에서 그대로 적용하여 아이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이들을 쫓아내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싶습니다. 교회가 아이들의 영혼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선교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행위입니다. 바로 이러는 동안 아이들의 영혼은 사탄이 던져 놓은 세상의 즐거움에 빼앗기고, 걷잡을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빠지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향해 분노하셨습니다. 매우 강한 감정적 반응으로 제자들을 책망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로서 천국에서 가장 소중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들을 친히 안고 머리에 안수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를 15절에서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이르는 참된 믿음의 자세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수용성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받든다는 말은 희랍어 원어로 '데코마이'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receive입니다. 즉, 받아들인다, 취한다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가르침을 그대로 받습니다. 보는 대로 수용합니다. 어린아이의 심령은 빈 그릇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순수하다고 말합니다. 순수하다는 것을 아이들의 영혼이 착하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더욱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산할 줄 모르고 있는 본 그대로 느끼고, 느끼는 그대로 말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계산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천국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의존성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부모를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의지할 대상이 곁에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도움을 청합니다. 말을 못하는 아이가 울 때, 그것은 자신이 의지해야 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인이고 도움을 청하는 신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한 주간을 살아도 하나님의 돕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세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으로 자신의 범죄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사실을 알았을 때, "나를 주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시51:11)."라고 간청했습니다. 왕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은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하나님만 떠나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다 잃어도 하나님만 계시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셋째로 가능성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는 아주 작고 초라하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자랍니다.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며 꿈이 자랍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무한한 꿈이 있습니다. D. L '무디'가 전도자가 되기 전에 주일학교 선생님이었었습니다. 한 번은 전도 훈련을 받고 나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회를 하는데 '무디'가 이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저는 오늘 두 사람 반을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자가 "어째서 두 사람 반입니까? 혹시 어른 두 사람 하고 어린이 한 사람을 전도 했는가 봅니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사회자에게 거꾸로 말했습니다. "저는 어린이 두 사람을 전도했고 어른 한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어른들은 인생을 벌써 절반 이상 산 사람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면 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야 아직 인생을 많이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에 무한한 한 일생이 그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어린이를 구원한다는 것은 그의 일생을 구원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어린이의 영혼은 중요하고 어른의 영혼은 덜 중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어린이들에게는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린이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환상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안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로

그런데 어린아이들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에게는 득도 있지만 실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들이 어떤 사상과 가치관을 수용성과 의존성과 가능성은 그들을 천국의 주인공이 되게도 할 수 있지만, 그들을 우리가 품지 않으면 그들은 사탄의 자식, 진노의 자식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사탄도 역시 아이들의 수용성과 의존성과 가능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사상이 침투하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미래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자명해지는 것입니다. 더욱 긴장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섬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영적으로 가르치는 일에 무관심합니다. 오직 지적인 능력을 키우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저 경쟁사회에서 이길 능력만을 기르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한 인간으로 인격체로 존중해서 다른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는데 힘쓰는 것보다는 세상적인 관심과 관점을 가지고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이 경쟁사회에서 이길 수 있는가 만을 생각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교육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혼란합니까? 우리 사회에 능력과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좋은 인격과 성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영적 가치관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배운 지식은 머리에 머물고, 그들의 능력은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이런 내용을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큰 재산을 모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여덟 살 된 아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그 재산을 지키지 못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결코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 "너를 가까이 하고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은 전부 네 재산을 노리는 도둑놈이라고 생각하고 절대로 믿지 말라"고 거듭해서 당부한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행히도 그 아들은 그 유언을 충실히 마음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재산을 지켜 냈지만, 그는 재산보다 더 소중한 '삶'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친척도 이웃도 다 도둑놈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자연히 그에게는 친구도 이웃도 없었으며, 결혼을 했지만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병은 아내와 자식까지도 믿지 못하게 만들어 온 가족이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불신을 유언으로 남긴 아버지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무엇을 심어 주어야 할까? 어떤 가치관과 어떤 성품의 사람이 되게 해야 할까? 이것을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에 지쳐가는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아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다음세대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위대한 존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과 하나님 말씀 중심의 가치관을 소유한 영적 리더로 다음 세대를 책임지도록 해 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코리아 갤럽에 의뢰해서 조사한 한국인들의 신앙 의식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시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우선 9세 미만에 예수님을 받아들인 경우가 5.3%입니다. 미국은 이보다 훨씬 높습니다.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복음을 심어 줄려는 의지가 조금 부족하다 싶습니다. 그 다음 10살부터 14살까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12%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5세부터 19세 사이에 예수님을 영접한 경우는 무려 26%나 되었습니다. 그 다음 20세부터 24세 사이는 13%, 25세부터 29세까지가 10.7%, 그 다음 30세부터 39세 사이가 18.3%예요. 그리고 40세 이상 돌아가실 때까지 믿은 사람들이 14.6%에 불과합니다. 이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우리나라 성도의 절반가량이 19살 되기 전에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좀더 어릴 때에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린이들도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성령을 받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방언도 합니다. 그들도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오는 아이들 중 많은 숫자가 우리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전도한 친구들입니다. 어린아이들도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하나의 인격입니다. 성령의 그릇입니다.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치기만 하면 아이들도 변합니다. 거듭납니다. 성격이 변하고 상처가 치유되고 위대한 꿈과 환상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합니다. 이 지역의 어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교회의 모든 역량을 쏟고 있습니다. 이것은 낭비가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린이들을 섬기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차량 운행도 해 주시고, 간식도 챙겨주시고, 아이들이 즐겁게 한 때를 보낼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주님께 들려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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