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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닻 그리스도 (히 6: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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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닻 그리스도 (히브리서 6장 16-20)

몇 년 전에 미국 시카고에 있는 빌리 그래함 센터에서 한국 세계 선교대회가 있었습니다. 그 집회에 한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시카고에 갔습니다. 시카고에서 강의를 마치고 이곳에서 비행기로 약 3시간 떨어져 있는 필라델피아 한인 교회에 집회가 있어서 공항에 갔습니다. 약속 된 시간에 비행기에 탑승하였는데 비행기는 이륙을 하지 않았습니다. 좁은 비행기 안에는 모든 게 불편하였습니다. 무려 3시간 동안 좁은 비행기 안에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비행기가 활주로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창문 옆으로 보니 기름 넣는 곳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도 비행기는 이륙하지 않고 또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처음 미국에 가본 저로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전혀 요동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기기 이륙하자 모두 박수로 환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인내를 가지고 비행기 안에서 이륙하기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 믿는 것이 있었는데 제가 비행기 표를 들고 있었고 지금 같은 목적지로 가는 승객들이 제 주변에 같이 있다는 것이 나를 인내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인내함으로 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 묵상하였습니다. 저같이 불과 몇 시간 비행기가 이륙하기만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25년 동안 기다린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주변이 같이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던 아니라 아브라함은 혼자 그 약속을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험난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같은 목적지를 가기 위하여 티켓을 들고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혼자 기다리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혼자 기다리는 것은 더 큰 믿음을 요구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마음으로 같은 목적지를 향하여 같이 기다리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인내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혼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는 여러분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앉아 계십니다. 힘이 없는 자가 보이면 그 분을 도우면서 같이 같은 목적지를 향하여 가려고 앉아 있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혼자 인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성도와 함께 인내하는 기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이 약속이 축복인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가운데에는 믿는 분들이 계시고 그렇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읽어야 할 독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들이 행하는 약속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16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약속을 할 때 상대방이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것 같으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의 이름으로 약속하고 맹세합니다. 때로는 부모의 이름을 걸로 맹세합니다. 내가 이 돈을 기일 내에 갚지 않으면 내 부모가 사람이 아니다 라고 약속합니다. 내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하늘에서 벼락을 맞을 것이다 라고 맹세합니다. 왜 이처럼 사람들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끌어들이면서 맹세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말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말을 상대방이 믿어 주지 않을 거 같으니까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을 빌려서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불안하기 때문에 온갖 형태의 과장된 표현이나 힘 있는 사람을 빙자로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끌어 들이지 않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신뢰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믿도록 하고 자신에게 약속합니다. 이런 사람의 말은 단순하고 정직합니다. 갈등도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의심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사람들과 교인들과 약속 할 때 의심을 주는 약속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뢰를 주는 약속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을 하셨으면 약속을 바꾸지 말고 지키십시요.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우물 쭈물 하지 마시고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씀하십시요. 겸손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하십시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17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힘 있는 존재를 끌어들여서 약속하실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직접 약속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와 직접 약속하신 하나님은 어려운 말씀으로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애매모호하게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주 단순하십니다. 정직하십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행함이 있었고 언제나 말씀에 대한 책임을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에 죽은 지 3일신 후에 부활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말씀대로 부활하셔서 자신의 말씀에 책임을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격려가 있습니다. 용서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위로와 회복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보혜사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권능으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에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권능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마다 다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피해서 산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이 완전하지도 않고 편한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온갖 유혹과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바라보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승리입니다.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곧 망할 것 같은데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과 성경 공부를 하다보면 자신이 겪고 있는 갈등들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실과 믿음의 괴리들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이렇게 표현해 보면 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로 접근하지 마시고 나의 삶에 실세가 누구냐? 로 접근해 보십시요. 나의 삶에 실체가 하나님이냐 직장 상사냐? 돈이냐? 이것이 분명하면 이 갈등들이 해결 될 것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실세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릴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의 실세라면 예배시간이 낭비로만 느껴질 것이고 실세를 가진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어제 신문에 고졸 출신으로 시골 면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출발한 사람이 1급 공무원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이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행시 몇 기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라는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아주 힘들었다고 고백하면서 그러나 그런 소리를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 말이 자기에게 도전이 되어 더욱 더 자기의 일에 충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자기는 지금까지 자기가 섬기는 바로 윗사람이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백이라고 생각하고 섬겨 왔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만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온갖 밀물 같은 세력들이 밀려온다 할지라도 자신을 작은 바위 하나 위에 붙들어 놓고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온 세상이 다 물로 덮인다 할지라도 바위에 자신의 인생을 붙들어 매어 놓은 이 사람은 바위가 무너지지 않기에 이 사람의 삶도 안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밀물 밀려오듯이 밀려오는 신앙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우리의 실세를 믿고 따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18절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성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중산층이라 불리우는 부르지와 라는 말은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안에 산다는 것은 내 재산을 지키는 위치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밖에 살면 도둑 떼들이 들이 닥쳐서 힘써 모은 재산들을 다 약탈 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습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젊은이들의 여행 모습을 관찰 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낭하나 메고 여행을 하는데 길거리 아무데서나 노숙하면서 세상을 경험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들어오는 것 중에 하나는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위험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간혹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반드시 옆에 개가 따라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공항 로비에서 쓰러져 잠을 잘 때에도 개는 주인 옆에서 주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개 때문에 안전 한 여행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피할 길은 구약시대에 도피성을 말합니다. 마치 군부 시대에 운동권 학생들이 명동 성당으로 들어가 신변을 보호 받았던 것 같은 그런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억울하게 고난당하거나 오해 받아 죽게 된 사람들이 도피성으로 도망하면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바벨론을 동원하여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예루 살렘 성은 군대의 힘으로 지켜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 주셨는데 그만 이 성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죄 때문에 하늘의 도성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회복 될 예루살렘 성은 죄를 이길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도피성은 한계가 있습니다. 응급처치 수준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곳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또 그 성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는 늘 불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숨겨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19-20절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표현이 영혼의 닻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표현은 그 당시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독자들은 19절의 말씀을 읽고 보면서 자기 눈을 의삼하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배를 정박 시킬 때에는 여러 개의 닻이 필요하다. 하나의 닻으로 배를 묶지 말라. 이와 같이 하나의 소망에 인생을 걸지 마라”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닻들이 아니라 영혼의 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닻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 개의 자격증이 나를 안전하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많은 자격증을 따려고 노력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은행에 통장도 수십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산 시켜 놓습니다. 학벌이 자기를 안전하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해서 많은 학교들을 다니고 학위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는 다 좋은 것이니까 이 종교 저 종교를 다 인정하고 그 많은 닻들이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들이 정말 여러분을 지탱해 주고 있습니까? 어느 지체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가 고시 1차를 합격하고 나니 그 기쁨도 잠깐이고 순간 자신은 2차 시험을 치루는 여전히 수험생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체가 여전히 수험생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소망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잡아 주는 능력입니다. 돈이 없어도 소망 때문에 우리는 인내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우리의 삶이 밤이라 할지라도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침을 기대하는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해는 떴는데 여전히 나의 일과는 침울하고 어두움이라 할지라도 아침에 일어 날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시는 소망의 그리스도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한 순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기도 속에서 찬양 가운데 밤은 지나갑니다. 폭풍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새 아침이 밝아 올 것입니다. 앞으로의 시간은 밝음일 것입니다. 아침일 것입니다. 그 소망으로 찬양하십시요. 긍휼하신 하나님! 나를 위하여 피난처를 예비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영원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다 성실하신 주님 이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에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낙심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 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입니다 라고 고백하던 예레미야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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