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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마의 사고 의심을 뛰어 넘어라 / 요 20: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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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사고 의심을 뛰어 넘어라
요한복음 20:24-31

  현대인들의 특징을 저는 네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이성중심주의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내 이성입니다. 이성은 합리성을 추구합니다. 이성으로 판단해서 합리적이면 맞다고 하고 불합리하면 틀리다고 결론짓습니다. 둘째는 과학중심주의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과학입니다. 과학은 증명을 요구합니다. 어떤 사실이 증명이 되면 그것은 옳은 것이고, 증명이 되지 않으면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개인중심주의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입니다. 내가 보아서 옳은 것은 맞다고 하고, 내가 봐서 틀리면 그르다고 결정 내립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할 때 이런 이성중심으로 과학중심으로 개인중심으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요즘은 신관중에 나신주의가 이데요, 뭐냐고 그랬더니 내가 신이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믿으려면 자기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성이 신입니다. 자기 지식이 신입니다. 자기 판단이 최고입니다. 자기 지식이 절대적입니다. 자기 결정이 맞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신이라고 한답니다. 자기가 신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병원에 있다고 해요. 정신병원에서 한 환자가 그러더래요. “내가 하나님이다.” 그러니, 위층에서 “누가 내 이름 부르냐?” 그러더래요. 자기가 최고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인물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마라는 사람입니다. 현대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도마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인물이 이 도마입니다. 이 도마는 어떤 사고를 하고 있기에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도마가 가지고 있는 사고를 뛰어 넘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인으로써 도마의 사고를 뛰어 넘어야 신앙을 가질 수 있고, 더 깊은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도마의 사고는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도마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도마가 사고, 믿음의 장애물 무엇이며, 이 도마의 장벽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도 신앙을 가질 수 있고 더 깊은 신앙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마가 가진 믿음의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음에서 뛰어 넘어야할 도마의 사고는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가 뛰어 넘어야할 도마의 사고 즉 믿음의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도마의 사고, 도마가 가지는 믿음의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의심입니다. 믿음의 삶에 있어서 믿음이 장애물은 무엇인가? 의심입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도마는 “내가 그 손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면서 의심합니다.

  믿음의 장애물은 의심입니다. 의심은 믿음을 가지는 데 있어서 가장 높은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뛰어 넘어야할 것 과제입니다. 의심은 믿음을 가지는 과정에서 꼭 건너야할 다리입니다.

  의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오래 했든 적게 했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신앙의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이 의심하는 것은 필수적인 경향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의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 아니면 천사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심이 생기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의심은 죄가 아닙니다. 의심이 생기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의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의심을 통해서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죄입니다.

  무엇을 의심하는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심합니다. 가장 흔한 의심입니다. 이 의심을 뛰어 넘지 못하면 신앙을 가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를 의심합니다. 이 의심을 뛰어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단계의 의심이 있는데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실까? 하나님은 세세한 나의 일까지 도와 주실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까? 이 부분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이 의심을 뛰어 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고민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 불평이 많습니다. 의심 이것은 성도들의 겪어야하는 신앙 성장 과정의 필수과목입니다. 이런 의심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이런 의심도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깁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겪는 과정입니다.

  목사님이 장로님과 함께 병원에 입원한 이 집사에게 문병안을 갔습니다.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이 집사 부인을 위로하며, 하나님께서 고쳐 주실 터이니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열심히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신실한 종 이 집사님이의 병을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병원문을 나오면서 장로님이 그럽니다. "목사님, 아무래도 이 집사 얼마 못 가겠지요?" 이렇게 말로는 믿는데 마음으로는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 의심, 신앙생활에 늘 함께 따라다니는 복병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의심이 있을 때 이것은 내가 믿음이 없어서 그러나? 하면서 고민하지 마십시오. 의심이 있을 때는 "아 믿음의 성장의 기회로구나!"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마음을 드려야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의심이 생길 때 이 때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이 의심은 주님을 만나는 날까지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의심이 생길 때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의심을 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의심을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둘째, 왜? 도마의 사고, 의심이라는 믿음의 장애물이 생기는 것입니까?

  왜 의심이 생깁니까? 모든 판단의 기준이 우리의 이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성적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심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이성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귀에 들리는 것만 믿고, 머리에 이해되는 것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성의 한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로써 인간은 항상 의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귀에 들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심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문을 볼까요? 25절에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니라”

  보십시오. 도마가 뭐라고 합니까?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못자국에 넣으며,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보며, 넣으며, 이런 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기에, 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내 손에 만져지지 않기에,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기에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습니까? 보지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 소련에서 군인들을 모집하여 제일 먼저 교육하는 것이 정신교육입니다. 정신교육 중에서도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신론교육입니다. 신이 없다는 것을 구지 강조하면서 이 무실론 교육을 실시합니다. 공산국가이기 때문이죠. 장교가 나와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무신론교육을 합니다. “사병 여러분, 저기 하늘을 보라. 신이 보이나 안보이나?” “안 보입니다.” “그렇다. 신은 없다.” 이 때 신을 믿고 있는 한 사병이 벌떡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무신론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장교의 머리를 가리키며 “여러분, 우리 장교님의 머리 속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장교님은 골빈장교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왜 의심합니까? 모든 판단의 기준이 나이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내가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강조되어 있나. 내가가 한 구절에 3번이나 나옵니다.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니라” 내가, 내가, 내가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내 이성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내 지식입니다. 지식은 부족합니다. 내 판단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의심이 있지요? 그렇다면 "나는 살아 있구나!"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의심의 본질을 보십시오. 약간 교만한 자기가 있지 않습니까? 의심, 그것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의심하는 내가 복병입니다. 나의 교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조금 겸손하다면 의심이 생길 때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겠습니까? 의심이 생길 때 나의 교만을 생각하십시오.

  이 의심, 도마 같은 사고, 믿음의 장애물은 뛰어 넘어야 할 과제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셋째, 도마의 사고, 믿음의 장애물인 의심을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의심의 사고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장애물인 의심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의심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신앙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거쳐야 하는 필수코스입니다. 의심을 뛰어 넘어야 신앙을 가질 수 있고, 더 깊은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의심과 믿음은 반대의 개념입니다. 의심을 거두는 순간 믿음이 있고, 믿음을 거부하는 순간 의심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심의 장애물이 올 때 극복하는 길은 믿겠다고 작정하는 것입니다. 이때 순간 의심은 사라지고 믿음은 살아납니다. 의심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 됩니다. 의심이 올 때 믿겠다고 작정한 순간 곧 바로 믿음에 들어서게 됩니다.

  어떻게 의심의 사고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그 방안을 제시합니다. 믿음이 있기를 간구 해야 합니다. 27절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누구를 위해 나타났습니까? 10명의 제자의 말을 증명해주려고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도마의 의심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나타나서 그럽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러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럽니다. 이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의심하게 됩니다. 믿음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의심의 사고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이젠 믿기로 결심하십시오. 27절을 다시 볼까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러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랬습니다. “믿는 자가 되라” 무슨 말입니다. 믿다고 결심하면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내가 믿겠다고 결심하면 믿을 수 있지만, 믿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결국 내 의지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의심의 사고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의심을 긍정적으로 하십시오. 도마의 의심을 보세요. 도마는 긍정적인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의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고 싶은 의심이었습니다. 열 제자들이 “우리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러자 도마는 “나는 손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마는 제자들이 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철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의심을 많이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우 똑똑한 사람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싶은 마음에서 의심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싶어서 제자들의 말을 의심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도마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위해서 의심했더라면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의심이었기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28절에 직접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의심의 결과로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의심은 믿음을 향한 발돋움입니다. 의심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때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의심을 믿음의 발판으로 삼게 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의심은 생길 때가 있지요. 자신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성장에서 거쳐야하는 단계입니다. 의심이 축복의 기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할 의심은 없습니다. 의심을 해결하지 못할 믿음은 없습니다. 의심의 해결은 믿음입니다. 당신의 의심의 해결은 당신의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오직 의심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어떤 사람은 의심하다가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마귀의 작전입니다. 의심이 생길 때 마귀의 음성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을 거부하라. 믿음은 소용없다. 믿음을 포기하라. 거룩은 고리타분한 것이다. 죄를 선택하라.” 그러나 의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29절처럼 말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제 의심이 축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의심을 믿음으로 향한 축복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보지 못했지만 의심이 생길 때 믿으면 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심의 과정을 통해서도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의심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실 때 의심을 해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실 때 모든 의심은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서 멀리계시지 않았습니다. 도마의 한 말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고민을 알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도 의심하는 도마를 혼내지 않았습니다.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도마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직접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주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믿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의심을 축복으로 만드십시오. 주님이 어루만져주심 속에서 의심을 믿음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십시오. 의심이 오면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의심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을 더 깊게 알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의심이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의심이 생깁니까? 이 의심으로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십시오. 의심이 생길 때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의심의 해결은 오직 믿음입니다. 당신이 믿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의심은 사라집니다. 오직 믿음으로.

<찬양과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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