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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시 23:1~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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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23:1~6(1) 
제목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나른해지기 쉬운 여름에 그 옛날 신앙의 사람이 쓴 시를 통해서 영적 기운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잘 아는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쓴 지 벌써 삼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다윗이 사용하던 칼과 창은 다 녹슬어서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이 한편의 시는 남아서 성도들의 가슴속에 큰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그 생애에 파란곡절을 다 겪은 성도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위안을 얻습니다. 23편 첫 부분에 보니까 ‘다윗의 시’라고 표제가 붙어 있는데 반해서 언제 그 시를 썼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아마 다윗이 흔들리지 않는 왕권을 획득하고 있을 때에 지었던 감사의 고백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급하면 자신이 아뢰고 싶은 것을 기도로 나타내는데 여기는 감사로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보니 그것은 편안한 시기에 썼으리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전혀 반대로 환란 가운데서 아들 압살롬이 자기 왕위를 노리고 공격해 오는 그 와중에서 쓴 시가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자기 평생 동안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승리를 생각할 때에 다시 나아갈 신앙의 고백이 거기에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다윗이 노년에 한 평생을 회고하면서 쓴 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쩌면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이야기 일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언제 시를 썼는지는 알아낼 수 없는데 그것을 알려고 하다 보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쓴 시기를 확정하기 어려운 시인만큼 우리 생활에 어떤 순간에도 위로를 줄 수 있는 시가 바로 이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처지에 우리가 처해있을 때라도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 시 가운데서 1편과 더불어서 가장 많이 애송되고 있는 시가 시편 23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 절은 어쩌면 이 여섯 절의 시를 통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뭉뚱거려서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히브리 시인들은 논리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이렇게 풀어나가기 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앞에 그냥 쏟아놓고먼저 그것부터 하고 그러고 그음에 왜 그렇게 자기가 고백하는 지를 밝히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을 하고나서 도대체 여호와께서 어떤 목자이신데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하시는 분인지 설명을 4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재를 바꾸어서 환대받는 손님과 영접하는 주인의 비유에서 다시 한 번 1절에서 고백한 그 고백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고백이 핵심에 있습니다. 신자는 여호와를 자기 목자로 고백하는 자 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할 때 성경은 여기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이름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들도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면 그것은 일반명사고 ‘여호와’하면 그건 하나님의 이름, 고유명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한동안, 아주 오랫동안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이름을 무슨 자 무슨 자 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말이죠. 유대인들은 우리보다 한술 더 떠서 하나님의 그 존귀하신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해서 아예 그 자리가 나오면 나의 주님 이렇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나의 주님”이라고 바꾸어가지고 읽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그 존함을 함부로 우리가 부르느냐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잊어버렸어요. 왜냐하면 유대인 글자는 자음으로만 되어있거든요. 모음은 그냥 없습니다. 자음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자음은 한참 발음하지 않으면 그게 어떻게 발음 하는 건지를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모음이 없어서 학자들이 한참 연구를 한 다음에 밝혀 낸 것이 여호와라는 이름 보다는 야훼라고 불렀던 것이 더 원래적일 것이다 그런 의견들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할 때와 여호와라고 할 때는 각기 강조하는 바가 조금은 다릅니다.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그런 쪽에 의미가 강하다고 하면 여호와 하면 그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분임을 회상시킬 때에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 그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만물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백성과 약속을 맺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라”고 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의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목자로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 목동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어린 날의 체험을 통해서 목자가 양떼를 얼마나 잘 보살피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할 때 우리가 그 시를 읽고 느끼는 것과는 받는 감동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은 친히 소년기를, 청년기를 목자로서 지냈던 경험이 있습니다. 자기가 목자 노릇을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목자일 것 같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감정이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모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는 어릴 때 시골에서 소를 먹여본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소를 먹이러 가면, 들에서 먹일 때는 고삐를 잡고 따라 다녀야 됩니다. 왜냐하면 남의 곡식이나 벼나 콩잎이나 이렇게 뜯어먹으면 안 되니까 붙잡고 다니면서 지켜봐야지요. 그러나 학교 갔다 와서 동네 아이들이 소 한 마리씩 몰고 산에 올라가서 소를 먹이면 고삐가 덤불에 걸리지 않도록 뿔에다 칭칭 감아만 놓고 내버려 두면 자기들 끼리 잘 뜯어먹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한 마리만 몰고 내려오기 시작하면 다 따라서 줄줄이 내려옵니다.

우리는 가끔 비가 많이 와서 홍수를 만나는데 이스라엘은 홍수보다는 가뭄피해가 더 빈번한 곳입니다. 비가 적게 내리는 나라에서는 비 오는 날은 아주 신나는 날입니다. 오늘 오실 때에 비가 추적추적 와서 기분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비를 1년에 1500미리나 많이 내려 주시니까 감사할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까지 안가도 사우스아프리카만 해도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나라의 삼분의 일밖에 안되니까 비만 내린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기분이 좋아집니다. 웬만한 불화는 비 한번 내리면 다 사라져 갑니다. 이웃끼리의 조금 껄끄러운게 있다가도 비만 오면 “야 멋있는 비 내린다”하면서 모두 다 기뻐하는데 그런 기분 가지고 비 내릴 때도 감사해야 되겠지요?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까 하나님이 비를 많이 줘서 감사한줄 몰라서 그렇지 비만 오면 얼마나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러다 보면 자연환경이 틀리면 같은 말로 표현을 해도 이해가 서로 같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쪽 형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를 쓴 사람의 감정에 젖어들려면 먼저 그 시를 쓴 사람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시는 작가의 모든 인생경험이 녹아있는 아름다운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양과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소를 몰고 나와서 소 풀 좀 뜯기다가 또 오후에 가서 잠깐 소를 먹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양은 데리고 나가면 며칠씩, 몇 주씩 산에 가서 그냥 사는 것 입니다.

이렇게 몇 달씩 지내다보면 이것은 짐승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한 생명체와 다른 생명체와의 만남이 됩니다. 서로 정이 듭니다. 양 한 마리, 한 마리마다 이름을 붙여서 부릅니다. 이런 목자의 체험을 가진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나타나면 그 곰과 더불어서 싸웠고 하나 새끼양이라도 물고가면 끝까지 그 입에서부터 빼앗아 내었던 책임감이 투철한 목자였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어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그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지내는 동안에도 다른 측면에서서 목자의 직무를 실감했을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고백하는 다윗의 느낌하고 양이라고는 한번도 먹여 본적이 없고 온 백성을 끌고 목양해본 경험이 없는 우리가 받는 것 하고는 아무래도 차이가 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신 그 분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의 양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자신은 사실 평생을 목자로 지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정말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빠질 때마다 자기야말로 어리석은 양과 같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목자가 이끌지 아니하면 그 다음 어디로 가야 될지를 알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양은 정말 어리석은 짐승 중의 하나입니다. 짐승들도 IQ가 차이가 나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개나 고양이는 상당히 똑똑합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도 자기의 집을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자기 왔던 길도 모르고 자기가 가야 될 길도 모릅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버려진 자리에서 울고 있는 일밖에는 할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네요. 왜냐하면 ‘내 여기 혼자 있소’하고 모든 들판에 있는 야생짐승들에게 알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여기 시인은 하나님을 양 같은 자신의 목자로서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보호자시고 하나님은 나의 인도자 되시고 나의 공급자 되신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양은 목자 없이 광야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른 짐승들은 그래도 스스로 자기 보호를 시도 할 수 있습니다. 야생 소들은 일단 해치려고 하는 짐승들이 다가오면 약한 새끼들을 안쪽에 모으고 자기들은 뿔을 바깥쪽으로 해서 둘러섭니다. 그런 것 여러분 텔레비젼을 통해서 보신 적이 있죠? 시도 해 보려고 합니다. 몰론 배고픈 사자에게 한 마리는 내줘야 되겠지만 어쨌거나 한번 폼이라도 잡아 보잖아요. 얼룩말 같은 것은 거꾸로 둘러서지요. 약한 것은 안으로 넣고 자기들 머리를 맞대고 둘러섭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뒷발에 힘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양들은 전혀 속수무책입니다. 날카로운 뿔도 없고 힘 있는 뒷발도 없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그것이 양의 운명입니다. 정말 목자 없이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살아 갈 수 없는 짐승이 바로 양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은 자신은 하나의 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야말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목자로 인식하며 살 때에 비로소 마음에 평안이 깃들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 결코 평안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가인이 소리쳤던, 또 그 후손 라멕이 소리쳤던 그런 삶의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면 늘 불안한 것입니다.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면 자기가 자기 보호를 다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가인과 그 후손들은 만든 게 뭡니까? 각양 날카로운 기계들, 무기를 만들어 내었다고 창세기 앞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을 쌓았습니다. 왜 큰 소리 치면서 살았던 사람들,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간다고 소리쳤던 사람들은 날카로운 무기들을 만들고 성들을 쌓았을까요? 그것은 그 심중에 있는 불안함을 표출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했던 게 또 하나 뭡니까? 피리를 만들어 불고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달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생각 속에 배제된 인생은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것을 알 때에, 나는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필요이상 부담을 안고 살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지요. 내가 져야할 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지면되지 자기가 안 져도 되는 짐까지 5년 후, 10년 후 염려까지 혼자서 다 하려고 그러면 불안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지요.

다윗은 어려서는 아버지의 양떼를 치는 목자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이스라엘 천 천만을 이끄는 임금이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의 추격 받고 있는 밤에도 편안히 자고 쉬기도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내 영혼의 선장이라 생각하면서 항해를 해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비록 조종간은 내가 붙들고 있지만 내 배후에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어떤 때는 정말 이유도 알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빠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여기 “만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면”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목자기를 바란다고 고백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형으로 고백이 되어야 됩니다. ‘나의 목자였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목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미래에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지금 ‘여호와께서 내 목자시다’ 그렇게 고백해야 그게 신앙입니다. 여호와는 우리 공동체 전부의 목자일 뿐만 아니라 나의 목자라고 고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부를 수 있는 분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결코 부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물을 가지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천지만물을 자기 손에 가진 자 보다 더 부요한 자입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올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지위는 우리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쓸 것을 공급 받습니다. 때로는 물질적으로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 때도 신자들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부모들은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없지만 하늘에 대한 신앙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요? 아이들이 태어날 때 마다 “다 지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난다” 하늘에 대해 신뢰를 했는데 요새 우리들은 너무 똑똑해져서 그렇죠? 우리가 다 계산하고 앉아있으니까 그 좋은 직장 가지고도 하나 밖에 못 낳고 기껏해야 둘, 이래가지고 무슨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겠습니까?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만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입에서부터 받고 싶어 하는 고백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맺는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 좋은 것을 주고 우리를 높이 세웠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 여보 당신이 좋은 집 사주고, 다이아반지 사주고 그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고백하는 것 보다는 “당신이 날 사랑해 주는 남편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고백이 되어야 제대로 된 부부관계 아니겠습니까?

여호와를 자기 목자로 삼는 이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에 배부름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많이 주셔도 그것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고 없어도 없는 것 가지고 비굴해 지거나 안달하지 않습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배고픔과 배부름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 식으로 고백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는 자기 분수 밖의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만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흥사 무디는 말하기를 “네 풍부함이 소유의 많은데 있지 아니하고 소원이 적은데 있다”고 했습니다. 소원이 적다고 하는 것은 소원을 단순화 시키는데 있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울산에 내려왔는데 그동안 살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했던 모양입니다. 가끔 하나님께서 내가 옆에서 보니까요 우리 집사람이 뭐 갖고 싶은게 있다든지 이러면 당장 들어주시더라고요.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2부 예배 보러 집에서 나오는데 손이 좀 시렸던 모양이죠? 그러니까 ‘털장갑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성탄 예배 마치면 남편 데리고 나가서 선물하나 받자 그렇게 마음먹었던 모양 이예요. 그런데 교회 도착하니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압니까? 김형삼 집사님 떠나간다고 그랬는지 가죽장갑 두 켤레를 갖다 준 것입니다. 이건 단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그랬더니 둘째 아들 듣더니 하는 말이 엄마는 꼭 필요한 것만 마음먹는 모양이지요. 마음먹는 것 마다 준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만 마음먹으니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니까 필요한 것만 꼭 구하면 특별한 사람만 주시겠습니까? 저는 누구라도 다 들어주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면 다른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큰 즐거움과 만족을 누립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기까지는 여러분 영혼에 만족이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처럼 혼자서 빈손으로 갈 것입니다. 자녀나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때 거기서 다시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 하실 수 있어야 거기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 그 세상에서 우리가 깨어나게 될 때에 우리 주님 얼굴 하나로서 만족할 수 있어야 거기가 천국이지 가서도 이런 걱정 저런 염려가 뒤따르게 되면 천국이 꼭 세상 같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천국이 그럴리 없다고 생각을 하지요. 천국에 갔는데도 무엇이 좀더 필요하다고 하면 거기야 말로 여기나 같은 곳 아니겠습니까?

천국은 세상에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가서 지낼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말씀 듣는 시간이 참 즐겁고 귀한 시간으로 느껴지는 사람들만이 천국에 갔을 때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시간이 일주일 168시간 가운데서 이시간이 제일 힘들고 주리를 트는 시간 같으면요 그런 사람 천국에 데려다 놓으면 거기가 바로 지옥입니다. 예배는 끝나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도 오지만 천국은 끝이 없다니까요. 끝없이 거기 앉아 있으라고 그러면 그 얼마나 지옥같은 고통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아시고 그런 사람들은 천국으로 보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는 여기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칭송하는 그런 장소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천국 모습을 닮아가려고 우리가 주일에 한차례씩 모여서 천국 적응훈련을 조금씩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시간 적응이 힘들어가지고 거기에서 영원 세월동안 어떻게 버틸렵니까? 그러니까 지금부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 역사적으로 종교가 그래가지고 늘 자기가 하는데에다가 신앙의 무게를 두려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같이 비오는 날에 우산 받치고 교회를 오면 “나 참 착하지, 나 참 괜찮은 신자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만족을 할려고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안한 말씀이지만요 오신다고 수고들 다 하셨고 잘 오신 것은 틀림이 없지만 와서 앉아 있다고 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그 고백이 나와야 신자지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 것 맞는 것 같은데.... 하나님 그래도 나는 이것 좀 필요하고, 저것도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 조금 문제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와서 앉아 있는것만 가지고 너무 안심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지 한번 자신을 살펴보세요. 제가 어떻게 한사람 한사람 알겠습니까? 제가 오늘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지요? 천국갔는데 죽어서 눈을 떴는데 “야 넌 아니다, 너는 꽝이다” 그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그때 나한테 시비걸면 안되요. 나는 분명이 이야기 했어요. 꽝일수 있다고요. 여러분이 그 순간에 나를 향해서 원망하지 않도록 와서 앉아있는 것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 소원이 생겨야 됩니다. 하나님이 좋아져야 됩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전부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신자된 겁니다. 아직 그 자리까지 안 이르렀으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 됩니다. 교회가 요새 천국을 닮지를 못해서 그냥 누구나 와서 앉아 있어도 편한 장소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천국을 닮는 모습 같으면 좀 뭔가 불편해져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예수님 보고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말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까? 찬송, 신앙이 있는 사람들만 부를 수 있는 노래지 아무나 곡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처음 나오는 사람 불편하게 조금 느낄 수 있는곳이 교회여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믿는 티를 내서 억지로 불편하게 만들자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주고 쉽게 올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일단 신앙이 있어야만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이게 내 집같고 아버지 품 같고 그렇게 느껴져야 되는거예요. 그런 신앙고백도 없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그게 편안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다는 자체가, 우리 사랑하는 고백이 터져나오는 자체가 그 고백을 하기 전에는 어색한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 남자나 붙들고 여보하고 부릅니까? 잘생겼다고 부릅니까? 돈 있다고 부릅니까?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봐서 자기 남편보고 여보라고 그러잖아요.

신앙도 마찬가지 거든요. 아무 신이나 보고 아버지 그러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때 “아버지”하는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일약 목동에서, 양 치던 소년에서 왕이 된 다윗이지만 왕위에서, 왕위가 주는 영광에서 그는 만족한다고,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질 않습니다. 정말 무명의 목동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그 나라의 유명한 선지자가 와서 아들들 다 만나자고 할 때에 다윗은 열외로 제껴져 있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왕, 요즘 대통령만 되도 물갈이 하고 큰소리 치면서 사는 것 보면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왕은 더 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과같은 왕은 드문 왕이었습니다. 싸우는 곳마다 승리했으니까요. 그 왕권이 얼마나 대단했을 것이라고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 왕위가 주는 영화로 만족한다고 고백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부자가 되니까 이제 부족함이 없어요”, “내가 출세를 했으니 이제는 아쉬운 것이 없어요”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서 만족하는 것이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정말 진실한 인생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를 자기의 목자로 삼는 것 외에 인생에게는 달리 만족이 없습니다. 여인의 운명은 누구를 남편으로 만나느냐에 달려있듯이 인생의 운명은 누구를 나의 하나님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결코 그 영혼에 만족이 없습니다.

‘내가 왕이 되어보니까 이제는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다면 제가 여러분을 향해서 모두들 열심히 노력해서 한 자리씩 하라고 권하겠습니다. 명예를, 권력을, 지위를 추구하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여름 여러분 모두에게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는” 평생의 소원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는 그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아는것, 그것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행입니다. 가장 만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그 순간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많은 분들이 인생을 상당히 사신분들입니다. 인생을 사셨으니까 각자 나름대로 인생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나는 정말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 고백 여부가 여러분의 인생을 어떻게 살았왔는지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조용히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복된 신앙인이 되도록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아직도 이 고백이 나오지를 아니하면 하나님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이제 살겠습니다라고 여러분 고백하는 신앙의 자리로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지금 고백할 수 있는 분들은 이 복된 고백을 하도록 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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