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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럴 수는 없느니라 / 롬 6:1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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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 6 : 1 - 11 
제목 : 그럴 수는 없느니라


  우리 주변에서 복권을 사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대박이 터질 것을 기대하고 삽니다. 그러나 다 당첨이 되어 몇 억을 받게 되던가요? 복권을 사는 사람마다 대박이 터진다면 누가 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몇 백만 분지 1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하고 사 보지만 헛일입니다.

자동자를 소유하신 분들 보험 드셨지요? 왜 보험에 듭니까? 사고 나면 처리해 달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보험에 들었다고 자동차 사고 나면 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로마5:20을 보아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더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 봅니다. 모태 신앙이었고 거기에다가 제 성품은 내성적입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 일은 있어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하고 순수하게 자랐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많은 상이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예수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부흥강사가 되어 집회 인도하는 중에 팔 하나는 쭉 뽑아 걸어놓고 “나는 전에 주먹세계에서 놀았고 군에서 몸을 상한 상이용사인데 지금은 부흥강사가 되었다”고 하면서 지난날을 간증하는데 스릴도 있고 대단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혼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도 한번쯤 세상에서 마음껏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목회하여 볼까? 그러면 나도 저런 인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범죄하지 않고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여 목회자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할렐루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1.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1절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더라도 죄에 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기에 은행을 털어서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면 잘 한 겁니까?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잘 되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한다’는 말은 죄와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전혀 투쟁하지 아니하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인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세상과는 이미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할 수는 없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면 성결하게 살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평소에 건강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하여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벌써 병원에 초만원을 이루고 있답니다. 왜? 감기 예방접종 하느라고 그런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려면 항상 죄에 대하여 알아야 조심하여야 합니다. 모르면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답니다.

첫째가, 공부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경험도 중요하지만 먼저는 공부입니다. 바둑을 두는데 바둑3단을 두는 친구가 바둑 잘 못 두는 친구를 구박합니다. 바둑도 잘 두지 못하는 게 나하고 무슨 친구를 하겠느냐는 식입니다. 그 말을 듣던 친구가 아주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였답니다. 친구는 바둑 둔 지가 10년도 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격적으로 공부합니다. 책을 보고 연구하고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답니다. 1년 만에 바둑 잘 두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공부한 이를 당해내지 못하더랍니다. 배워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성결되게 살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실천해야 합니다.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이론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어느 집에서 고부간에 같이 사는데 며느리는 빨래를 하여도 시어머니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가 한 빨래는 눈이 부시도록 깨끗합니다. 며느리가 그렇게 문질러도 그만큼 깨끗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가 빨래하는 모습을 보아도 자기와 차이가 없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어머니 빨래는 내가 한 것 보다 더 깨끗하냐고 물었더니 다음에 가르쳐 준다고 미룹니다. 어느날 시어머니가 몸이 쇠약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며느리가 물었습니다. 다급하게 “어머니, 빨래”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마지막 하는 말, “꼬옥 짜거라.” 
며느리의 빨래보다 깨끗했던 이유는 바로 꼭 짜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끝까지 견디는 인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감정대로 살 수도 없고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기다리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사는데 편리하고 좋게 해 주겠다면서 유혹합니다. 그때 “그럴 수는 없다”라는 단호한 거절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야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얼음덩어리 위에 양 한 마리가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때 하늘을 나르던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발톱을 양털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합니다. 독수리는 폭포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순간 폭포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그때에 신속하게 날아오르려고 날개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털 깊이 박힌 발톱이 이미 얼음에 얼어붙은 것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사체와 함께 폭포 속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풍성한 물질적인 혜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죄 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죄와 투쟁하여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살지 아니하는 것은 소극적인 성결 운동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 인들은 오직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멸하면서 죄와 더불어 싸우는데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음을 지적합니다(히12:1-4). 운동 경기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라는 말입니다. 소극적으로 죄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방법은 죄를 멀리하는 겁니다. 내가 비록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가까이 있으면 자연히 닮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화를 입게 됩니다. 잠언5:7-9을 보면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두렵건데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면 네 수 한이 잔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죄 짓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설득하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정당하게 살아가라 나는 그리스도 인이다’라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확인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불란서 파리를 여행하던 미국 사람이 파리시내의 장신구점에서 중고품 호박목걸이를 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공항에서 너무 많은 세금을 부과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은 그것을 들고 보석 상에 가서 감정의뢰를 하였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그것을 2만5천불에 사겠답니다. 다른 보석상에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3만5천불을 주겠다고 합니다. 깜작 놀란 주인이 “아니, 이게 고물인데 왜 이렇게 값이 나갑니까?” 권위 있는 보석감정사는 현미경 앞으로 인도하고 “자, 이것을 보세요.” 그 현미경을 들여다 보자 그 사람의 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프롬 나폴레옹 바나파트 투 조세핀” 

나폴레옹 황제가 그 애인 조세핀에게 준 선물의 목걸이였습니다. “그 이름 때문에 가치가 나가는 겁니다”라고 말해 주더랍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아무렇게나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값 있게 살아야 합니다. 내게 육신적으로 아무리 큰 유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의 가치관과 같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느니라’입니다.


2. 그럴 수는 없느니라. 죄의 종 노릇은 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에 종입니다.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종 노릇할 수 있습니까? 종은 무엇합니까? 일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합니다. 우리가 왜 자꾸 범죄하게 됩니까? ‘내가 이러한 죄를 져야 하겠다’라고 다짐하면서 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 번씩이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면서 다시 범죄하게 되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종이 되면 벗어나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술의 종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사람이 퍽 좋습니다. 자상하고 정다운데 술에 취하기만 하면 그렇게 못될 수가 없습니다. 술이 깬 다음에 무어라고 말합니까? ‘그까짓 술 다시는 하지 않는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다시 술에 취하여 큰 실수를 범합니다. 이보다 더 심한 게 마약이라고 합니다. 마약 중독자들은 이것 없이는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 안하면 미칩니다.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게 있는데 놀음이라고 합니다. 놀음 좋아하는 사람을 보세요. 기차 안에서도 합니다. 적은 자동차 안에서도 합니다. 심지어 비행기 안에서도 합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 네 가지 즉 여자, 술, 마약, 그리고 놀음 중에서 제일은 도박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아내의 머리를 잘라 팔아서도 도박을 했답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 왜 그것을 못 끊어?”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끊을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게 쉽게 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날에 죄의 종 노릇을 하였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종이라도 죽으면 종이 아닙니다. 종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해결됩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빚은 갚지 않을 수 없는데 채무자가 죽었습니다. 빚을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활동 중지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불화가 생겼습니다. 답답한 사람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지” 이 말이 맞는 말입니다. 죽으면 됩니다. 기분이 좋지 않다, 화가 난다,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해결됩니다. 죽기가 어렵지요. 내 성질이 죽으면 화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인데 원망하고 비난합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면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진찰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자 그녀가 말합니다. “자꾸 시도 때도 없이 가스가 나옵니다. 그런데 소리도 없고 전혀 냄새가 안 나거든요.” 잠시동안 진찰을 한 후 의사는 ‘하루에 한 알씩 이 약을 복용하라’고 처방하여 주면서 몇일 후에 다시 오도록 하였습니다. 몇일 후 그 여성이 다시 의사에게로 왔습니다. 그 때 의사가 상태가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처방하여 주었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내게서 나오는 가스는 너무 냄새가 지독하거든요.” 그때 의사는 말하기를 “그 약은 당신의 코를 치료하는 약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근본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김익두’라는 깡패가 예수 믿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마침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게 되었는데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기차는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었습니다. 앞의 노인이 담뱃대를 김익두 앞에 대고 피웁니다. 피하면 따라가서 피웁니다. 연기를 코에 대고 훅하고 내 품습니다. 화가 난 김익두 부흥강사가 담뱃대를 낚아 체고 분질러 버렸습니다. 그 노인이 껄껄 웃으면서 “그러면 그렇지 김익두가 죽었나 했더니 역시 살아 있구먼” 그럽니다. 가슴이 아찔하게 느꼈던 김익두는 다음 역에서 내려 산으로 갔습니다. “하나님 아직도 김익두가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를 죽여주시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역사해 주십시오” 하며 눈물로 기도하는데 누가 등을 두드립니다. 아까 그 노인입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저는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는 교회 영수입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그 김익두가 그 때 죽었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성질하나 죽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죄의 종 노릇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언제 죽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롬6:3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세례란 연합으로 설명합니다. 극기가 아닙니다. 망각상태에 들어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와 함께 세례 받은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라고 한다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나오신지가 오랜 시간이 되신 분에게 “세례 받으셔야지요” 그러면 “아는 게 있어야 세례 받지요” 그럽니다. 세례는 알아서 받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 있다는 싸인입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 합니다. 사랑하려고 결혼하는 겁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겁니까? 결혼식을 하여야 부부입니까? 같이 살면 부부입니까? 두 사람이 사랑하고 같이 살기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는 게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같이 살고 있으면 부부입니다. 세례는 “이미 나는 주님과 일치되어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라고 선포 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여자가 옛날 애인을 생각합니다. 그를 그리워 합니다. 남편 모르게 자꾸 만납니다. 이건 잘못된 결혼입니다. 결혼식과 함께 예전 것은 잊어야 합니다.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례란 ‘바로 예전 것은 지나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죄의 종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3. 사망의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9절

우리가 예수와 연합하여 죽었다고 한다면 사망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세례에 대하여 말해 봅니다. 세례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요단 강에 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십니다. 세례를 주는 요한도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3:13-15)” 예수께서 세례받는 게,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시려고 하면 인간들과 같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과 같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즉, 물속으로 들어갈 때에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물속에 잠길 때에 나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물에서 올라올 때에 다시 살았습니다. 죽음과 부활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로마6:8을 보세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죽음이 있어야 부활도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다시 산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세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 할 줄을 앎이로라’ 죽었다는 말은 영적으로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죽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두움의 삶은 죽은 겁니다. 빛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숯 장수 집 곁으로 세탁소가 이사 왔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외롭게 살던 숯 장수는 이웃에 세탁소가 온 것에 대하여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같이 친구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때 세탁소 주인은 무어라 하였는가 하면, “자네의 호의는 알겠지만 생각해 보게. 나는 검은 것을 희게 하는 일을 하는데 자네는 흰 것도 검게 하는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나?”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사람입니다. 어두움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 되는 것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 가계 죽었어” 그럽니다. 이 말은 그 사업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살아야 합니다. 사업이 살아야 합니다. 건강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셨습니다. 죽음 가운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생명 있는 삶이란 빛 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말입니다. 직장에서 혼자만이 예수 믿는데 외로움을 느끼던 자매의 간증입니다. 그녀는 믿음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마음이 좁다는 비난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의욕을 상실하여 그 직장을 그만 두려고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사람들은 등불을 어디에 두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두운 곳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자매의 직장은 빛이 필요한 어두운 곳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매는 직장에 계속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얼마되지 않아 사원 중에 13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만들었답니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 같이 있어 어두운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가 풍성하다고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사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의 종 노릇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죄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관계없이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죽었으나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성도입니다. 이제는 생명 있는 삶을 사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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