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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의의 강물 / 암 5: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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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의의 강물
본문 아모스서 5:21~27


여러 주일 전, 주일낮예배에서 대표 기도를 맡은 장로님이 기도 가운데 “우리 나라가 어렵지 않은 때가 없었지만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는 없었던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성도들이 공감의 표시로 ‘아멘’한 것을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나라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염려와 위기감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라는 말이 들리기도 합니다.
북한의 핵 문제는 오늘날 한국이 가지고 있는 큰 문제인데 이상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 안에서는 둔감하고 밖에서 더 민감한 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흘 전인 지난 17일, 제헌절 낮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 열여섯 개 도시에서는 공의와 사랑실천구국기도회가 일제히 열렸습니다. 이 기도회는 한국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가 주최했는데 도덕적 위기에 직면한 민족의 대각성을 촉구하면서 이 나라가 복음의 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집회였습니다.
서울 집회는 남산공원 백범광장에서 열렸는데 주제기도를 맡은 분은 크리스천 과학자로 잘 알려진 정근모 장로님이었습니다. 정근모 장로님은 “일제 치하와 6․25를 겪으면서 세계 역사상 가장 어려운 20세기를 산 우리 민족이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자기의 조국에 대해 이와 비슷한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을 또 하나 찾을 수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BC 793-754) 예언자인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고, 제사를 형식적으로 드리고, 무엇보다도 공의를 버렸기 때문에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외형적으로는 매우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부패하고 타락할 대로 타락했습니다.
의인들이 학대 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신 한 켤레에 팔려갔고 힘 없는 자는 짓밟혔습니다. 사회정의가 무너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출입하였고 성전에서도 음행을 행했습니다. 성윤리가 말할 수 없이 타락하였습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지어놓고 즐겼는데 상아 궁도 있었습니다. 사치가 심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던졌습니다(암5:7).

아모스는 이와 같은 죄악들을 날카롭게 꾸짖으면서 기근과 전염병과 패망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아모스서 5장 1절에서 3절까지에서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라고 경고와 애가를 겸한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살길을 제시합니다.
오늘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할 말씀들입니다.

아모스는 먼저 여호와를 찾아야 산다고 외칩니다.
아모스서 5장 4절에서는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였고
6절에서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아모스는 또 악을 버리고 선을 사랑하며 정의를 세우라고 말합니다(암5:14).

그리고 잘 알려진 유명한 말을 선포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14)

팔레스타인에서는 비가 오면 산간 계곡에 폭포 같은 하수가 이루어져 그 앞의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뒤덮으며 흘러내립니다. 이와 같이 정의와 공의가 어디에서나 흘러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물이 수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듯 공법과 정의도 자연스럽게 시행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대부분의 강이 우기 때에만 물이 흐르고 그 밖의 계절에는 말라 있습니다. 몇 개의 강은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데 공의가 그런 강 같이 늘 시행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마르지 않는 강, 「개역성경」에는 “하수”라고 되어 있는 말은 ‘에단 나할’을 번역한 것인데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강, 세찬 시냇물, 건너갈 수 없는 물을 말합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 말은 이와 같이 공간적으로나 상태로나 시간적으로 완전한 공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모스의 이 말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의 많은 문제들이 정의의 부재, 정의의 상실 때문에 빚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많이 쓰이는 말 가운데 하나가 ‘부정’입니다. 부정이라는 말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정의가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정의의 모범을 보여야합니다.

아모스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절기와 성회들과 제물과 찬양을 기뻐하지 않고 물리치신다고 말하고 이어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오직”이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것은 원하지 않으시고 다만 정의와 공의만 원하신다’ 심지어는 ‘하나님은 예배도 원하지 않으시고 정의와 공의만 원하신다’ 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 이와 같은 ‘정의지상론’(正義至上論)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맞는 해석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서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 “오직”이라는 말은 ‘그러나’ ‘그리고’를 강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정의가 빠진 예배는 무익하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입니다. 아모스는 정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 않으시고, 돌아보지 않으시고, 듣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헛 예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서 21장 3절에도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일을 향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시103:6) 우리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는 분이기 때문에(습 3:5) 우리들이 공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들은 힘있는 존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힘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우리 나라가 힘있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힘은 정의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여로보암 2세 때 나라의 힘은 강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국토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늘 넓어졌다고 좁아졌다고 했습니다. 주변 이방국가들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입니다.아모스가 예언활동을 하던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의 국토는 매우 넓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정의가 뒷받침하지 않는 힘은 진정한 힘이 아니고 오래가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27절의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아모스서 여러 곳에서 패배와 포로와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정의의 강물이 흐르지 않는 나라가 된다면 우리 나라가 누리고 있는 번영도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성군으로 꼽히는 왕은 두말할 것 없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정의와 공의를 행한 왕이었습니다.
사무엘하 8장 14절과 15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수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후반부에 이르러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을 때 그래도 반짝하고 빛났던 왕이 요시야입니다.
요시야 왕의 아들은 여호야김인데 여호야김은 폭군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아들인 여호야김 왕의 폭정과 불의를 꾸짖으면서 향해서 ‘당신의 아버지는 정의와 공의를 행했기 때문에 형통했었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22장 13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진정한 힘은 정의에서 옵니다.
정의 편에 선 사람이 강합니다.
정의를 실천하기 힘쓰는 교회가 힘있는 교회, 영향력 있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든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가 정의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정의로운 나라가 강한 나라입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 때 북군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 형편이었습니다. 병력도, 지지자도 적었고 유능한 지휘관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링컨은 ‘정의는 힘이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독일에 19세기에 빌헬름 마르크스(Wihelm Marx)라는 정치가가 있었는데 이 분의 기본이 되는 신조는 '힘이 정의가 아니고 정의가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였습니다.

다음 주일(7월 27일)은 휴전 50주년 기념일입니다. 6․25 전쟁은 3년 동안 계속되다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총성이 멎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불완전한 평화, 엄밀하게는 임시적인 평화입니다. 며칠 전에도 휴전선에서 총격사건이 있었지요.
휴전 50년, 교회에서는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부르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휴전 50주년을 맞이하면서 현재의 불완전한 평화가 완전한 평화, 임시적인 평화가 영구적인 평화로 바꾸어지기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을 여러 가지로 비교합니다. 군사력으로도 비교하고 경제력으로도 비교합니다.
작년 말에 북한의 국민소득은 남한의 1/26이라는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1/6이었는데 그 동안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남한과 북한의 비교에서 아주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진리에 입각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가 더 공의로운 국가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해야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정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모스는 후기 예언자들 가운데 제일 먼저 예언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후기 예언자들을 문서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최초의 후기 예언자인 아모스가 정의를 부르짖고 나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후기 예언자들이 부르짖은 중요한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호세아는 사랑을 부르짖었습니다.
이사야는 믿음을 부르짖었습니다.
미가는 정의와 사랑과 믿음을 종합하였습니다.
에스겔은 재상과 신생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요엘은 성령을 강조했습니다.
요나서는 사해동포주의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훔은 심판을 강조합니다.
하박국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을 말합니다.
학개는 성전재건을 외칩니다.

그 제일 앞에 선포된 것이 아모스의 정의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정의가 굽이쳐 흘러내리는 물같이, 의로움이 사철 마르지 않는 시냇물 같이 끊임없이 흐르게 하라는 말씀은 구약 예언자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기본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성도들은 매일의 삶을 공의롭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정의로운 삶의 실천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 진실하게,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의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작은 정의들이 모여서 커다란 모순도 부정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가슴이 섬뜩섬뜩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아모스서를 읽을 때 그런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아모스서에는 정의를 부르짖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끊임없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있는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음성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거스르는 민족은 심판으로 다스려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이 시대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아모스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스위스 출생의 브룬너(Emil Brunner 1889~1965)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로 잘 알려진 분인데 이 분은 「정의와 사회질서」라는 유명한 책에서 “금세기야말로 사회 정의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 분이 말하는 ‘금세기’는 20세기입니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은 사회정의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정의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

성도 여러분,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더해지는 것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도 골로새서 3장의 끝절인 25절과 4장 1절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라고 의와 공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정의를 강조한 것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면서 각 방송사에서 납량특집을 많이 방송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납량특집이라고 하면 귀신 이야기 같은 것을 많이 방송했는데 지금은 시원한 계곡이나 냇물, 강물 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잠깐 나오는 화면에도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저 냇물 어디에 있는 것인지 참 시원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끝부분에 장소 이름이 자막으로 ‘무주구천동 무슨 냇물’ ‘화양계곡’ 이렇게 유명한 곳의 이름이 떠오르면 더 시원하게 느껴지지요.
제일 시원한 느낌을 주는 강은 여러분, 정의의 강입니다. 정의의 강이 말라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답답하고 위기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청계천이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서울시에서는 복원 공사가 끝나면 서울 시내 한복판에 맑은 냇물이 흐르는 것을 기대하면서 불편을 참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대가 됩니다.

그것보다 더 바라는 것은 정의의 강물이 우리 나라 한복판을 흐르는 것입니다.

성도들 각자가 공의를 흘러보내는 작은 샘들이 되고 교회가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흐르는 공의의 수원지 역할을 할 때 그것은 가능해질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하나님을 찾는 나라, 선을 행하고 정의를 세우는 나라, 그리고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나라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심판 대신에 더욱 복을 받아 번영을 누리도록 하는 일에 앞장 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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