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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이 비취도다 / 사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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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비취도다 (사 9:2)

또 다시 광복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광복을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이라고 설명 합니다. 광복절(光復節)은 우리나라의 광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한 국경일로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날이다 고 설명합니다.

해방이라고도 하는 바 해방은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이라 설명합니다. 

본문은 메시아의 탄생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승리와 해방을 맞이할 것을 예언한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이사야선지는 “전에...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1,2)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5,1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직전에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앞에 언급된 갈릴리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가리키며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와 평행을 이룹니다.

혹암은 고통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 흑암은 슬픔 혹은 재난으로 바꿔 말할 수 있으며 더 넓게는 죄와 그로 말미암는 총체적인 불행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시 107:10,11).

이러한 곳에 빛이 비취므로 어두움을 밝혀 주며 성결케 되며 생명을 소생시키는 역사가 임합니다. 이러한 은혜로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한 다고 합니다. 주의 백성이 주의 날에 즐거워하는 것은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국경일 가운데 중요한 광복절입니다. 광복절을 맞으며 빛이 비취도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먼저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1)고 합니다. 이는 모든 일이 어둡고 우울하게 보였던 사8장의 끝부분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고 봅니다.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사 8:22)고 했습니다. 매우 암담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를 포함한 해안 변경의 갈릴리 지방은 그 개방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서 유달리 외세의 침입과 압제에 시달렸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늘 이방의 군대들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사야 당시에는 앗수르의 압제와 횡포 아래서 괴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압제의 그늘 아래는 늘 절망과 공포, 그리고 궁핍과 무기력만이 있을 뿐입니다.

갈릴리 인들은 외세의 압제뿐만 아니라 본토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이라고 종교적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유인즉 주민들 대부분이 이방 혼혈인으로서, 우상 숭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변경 지대인 갈릴리는 빈번한 외세의 침입으로 인해 고난과 더불어 넓은 이방 세계의 정신과 문명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 빛이 비취이게 됩니다. 빛은 점점 어두움을 쫓아냅니다. 따라서 그 어두움은 전에 때때로 드러냈던 것처럼 어두움을 드리우지는 않게 됩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며" (시 112:4), "어두워 갈 때 빛이 있게 되고" (슥 14:7), 전에는 고통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질적으로나 정도에 있어서) 그러한 흑암이 없으리로다" 라고 합니다(1절). 최악의 사태에도 고통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고 진정시킬 수 있는 위로를 허락 받게 되었습니다.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바 되지는 아니하며(고후 4: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합니다(고후 6:10). 상황이 가장 흑암 중에 있을 때에도, "빛을 지으시고 어두움도 창조하신" (45:7) 자가 그들의 한계를 정하시어, 서로 대조되게 하심(창 1:4)은 위로가 됩니다.

빛은 흑암을 점차로 몰아낼 것이며, 그 빛은 이전에 때때로 있었던 빛과는 다르리라고 했습니다.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그런 고통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이전과 같이 어두운 때는 없을 것입니다. 지형적으로 옛적에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외딴 곳에 있었으므로, 이웃의 대적들의 침입을 가장 많이 당했고 멸시를 당하였으나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다 고 합니다(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찢으시고 그 사방을 치신 (왕하 10:32) 그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는 흑암 시대가 있었고 이방인들의 갈릴리에는 고통의 흑암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일본의 지배아래 고통을 당하며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나아가 영적으로 그들이 무지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들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생과 외면적인 일에 대한 그들의 절망적인 마음가짐에서 볼 때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사신 우상을 섬겨 왔습니다.

그러나 경고된 그 흑암(8:22)이 그 정도로까지 크게 미치지는 않을 것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사9:2절). 이 예언의 말씀은 우리 주 예수께서 선지자로 나타나시어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서 그리고 갈릴리에서 복음의 빛으로 역사하심으로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우리도 복음의 빛을 접하므로 해방의 기쁨이 주어지고 구원의 은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꺼지지 않는 빛을 항상 간직하고 비추며 함께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모든 집과 공공건물에 방공시설 설치 명령이 떨어졌다. 문이나 창문에 빨강색 안감을 댄 검정색 커튼을 달아 공습경보가 울리면 불빛이 새나오지 않도록 해야 했다. 달빛 밝은 어느 날 밤이었다. 경보가 울리자 함흥 제혜병원은 불을 껐다. 그런데 경찰이 쫓아와서 제혜병원이 명령을 어기고 불을 켰다고 호령하였다. 그 때 경찰을 맞이한 간호원은 누구한테든지 늘 당당한 여장부였다. "병원의 불은 다 껐소." 그러나 경찰은 거짓말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유리창에 반사된 달빛을 본 거요. 달빛은 끌 수 없어요.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함께 가서 직접 확인해 봅시다." 경찰이 본 불빛은 달빛이었다. 그들도 달빛만큼은 끌 수 없었다.(인터넷정보클럽-끌 수 없는 빛)

세상 빛은 가릴 수 있고 꺼칠 수 있지만 참 빛은 가리거나 꺼칠 수 없습니다. 참 빛 되신 주님을 모시고 그 빛으로 어두움을 물리치는 모두가 됩시다.


  다음 창성과 즐거움을 더하게 합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사 9:3)

  잇따라 내린 고통스런 심판으로 쇠잔해 왔으나 이제는 주께서 다시 나라를 창성케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창성케 함은 백성의 수를 많게 함입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다시 번성케 하시리라는 것은 영광의 시대를 그린 그림의 주도적인 특징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사 26:15)

창성과 함께 즐거움을 더하게 해주십니다. 주께서 즐거움 곧 육체적인 즐거움과 환락을 더하셨다고 이어지지 않고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한다 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영적 기쁨, 곧 하나님 앞에서 갖는 즐거움이 많습니다. 주께서 그 빛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즐거움을 창성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합니(3절). 거룩한 의식들 가운데서 크게 기뻐하며 주께 나옵니다. 그 즐거움은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가졌던 기쁨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그의 은혜의 표시들을 보는 가운데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즐거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주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영으로 기뻐하며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합니다. 그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그것은 땅의 값진 소산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들이 즐거움으로 거두어들일 때의 추수하는 즐거움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고 땅의 귀한 열매를 오래 참음으로써 기다려 온 자들이 기쁨으로 추수하는 즐거움 같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전쟁에서 위험한 전투를 마친 후에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과 같습니다. 복음의 빛은 풍성함과 승리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그 기쁨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추수의 즐거움을 얻기 전의 농부처럼, 힘든 일을 각오해야 하며,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을 얻기 전의 군인처럼 전투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왔을 때는, 즐거움이 수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어 줄 것입니다.

몇 년 전 여름 인도의 델리에서 귀국하든 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그만 비행기의 날개에 불이 붙었습니다. 창가에 앉아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귓전으로 불이야! 하는 외침이 마치 꿈결처럼 들렸습니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승무원들도 영문을 모르는 듯 당황한 얼굴이었습니다. 곧 불은 꺼졌지만 승객들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거렸습니다. 기내방송이 나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자, 지금 창 밖을 내다보세요. 델리의 야경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승객 여러분께 잠시 델리의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승객들은 마치 말을 잘 듣는 유치원생처럼 창을 통해 지상으로 시선을 던져 넣었습니다. 그곳, 저 멀리 아래에는 영롱한 빛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공항과 그 주변의 도시를 가득히 덮은 무수한 작은 불빛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뿌려 놓은 보석의 가루처럼 아름답게 반짝거렸습니다. 인구 천만의 도시를 덮은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등 크고 작은 갖가지 불빛은 마치 어깨를 맞대고 다정하게 소곤거리는 듯이 보였습니다. 부의 여신 락시미가 불이 환하게 켜진 집만 찾아와서 복을 준다고 믿는 인도인들은 여신이 찾아오도록 밤마다 집 앞에 등불을 하나씩 밝혀 놓는데 바로 그 작은 등불이 모여서 거대한 빛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따뜻한 지상의 불빛에 눅이는 사이에 공항의 하늘을 선회하면서 관제탑과 연락을 취하고 모든 준비를 끝낸 비행기는 야경이 아름다운 델리 공항에 안전하게 다시 착륙했습니다.

인위적인 불도 위험에 처한 심령에 위안이 된다면 참 된 빛은 더욱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모두가 됩시다.


  그리고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 9:4)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8)

더 이상은 노예 상태 가운데 있지 않게 됩니다.

미디안의 멍에가 기드온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목에서 떨어져 나갔듯이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습관적으로 죄악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결과, 조금만 살기 편해지면 여지없이 범죄와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져 갔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사랑의 매를 드셨습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범죄 하자 하나님은 또 다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기 위해 미디안 족속을 일으키셨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곡물과 각종 과실을 침탈해 갔을 뿐 아니라 양과 소와 나귀 등 모든 소유물들을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미디안 족속에 의해 자신들의 산업을 모조리 잃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자기 처소에서 살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하여 굴을 파거나 산성을 쌓아 생명을 보존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실로 진정한 피난처요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등진 이스라엘은 결국 삶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처참한 지경에서 울며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과 평안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자행자지하는 인생은 결국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 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족속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며 구원을 호소하는 이스라엘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또 다시 일꾼을 선택하시고 불러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그가 바로 기드온 입니다. 당시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중이었습니다. 사실 밀은 넓은 타작마당 에서 타작하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 족속의 침탈을 당하고 있던 때라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몰래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드온은 비록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지만 어떻든 자기에게 맡겨진 가족을 먹이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또 어떤 하찮은 일일지언정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힘쓰는 자를 들어 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족속을 물리칠 수 있는 모든 환경과 여건을 마련해 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기드온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용기와 확신과 능력을 부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을 위시한 우상 숭배자들의 연합 군대를 무찌르는 위대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허락 하셨습니다.  이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소련의 코사크 기병대가 유대인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그 중에는 엠마 나자루스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마을에서 탈출해 미국행 선박에 몸을 실었습니다. 엠마는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해 시인이며 신문기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886년 미국의 뉴욕항구에는 프랑스가 기증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자유주의 국가들이 엠마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었습니다. 엠마는 몸이 병들어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 대신 자유의 여신상에 바치는 시를 보냈습니다. 그 시는 지금도 자유의 여신상에 새겨져 있습니다.

“피곤한 자 가난한 자/모두 내게로 오시오/그렇게 갈망하던 자유를 호흡하시오/누더기를 걸친 난민/집없는 외로운 사람/폭풍에 시달린 힘없는 사람/이 생동의 해변으로 오시오/황금의 문에서/희망의 횃불을 높이 들리니…”

자유는 소중한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잃어본 사람만이 진가를 압니다. 우리는 국가적인 자유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습니다. 또한 영적인 자유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습니다. 소중히 여기며 누리는 모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빛 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고 합니다.

  빛은 깨어나게 합니다. 아침이 오면 만물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생명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악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인생들을 향하여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 5:14)고 하십니다.

  빛은 알게 합니다. 아침이 밝으면 밤에는 볼 수 없었던 주위의 형편을 환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나는 인격과 그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고후 4:6) 알게 됩니다.

  빛은 먼 곳을 보게 합니다. 밤중의 등불은 겨우내 주위만을 비추어 줍니다. 그러나 아침이 밝으면 먼 곳의 산과 들판, 그리고 바다 저편 길까지 볼 수 있게 되어 순례자는 올바르고 확실한 행로를 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빛, 율법의 빛, 양심의 빛으로는 죄악의 밤길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주 예수 안에서 삶의 참된 길을 걸으며 천국을 바라 보며 함께 하여야 합니다.

한 가난한 여인이 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구원의 기쁨을 체험한 뒤에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생활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너무나 추악한 악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사를 해야겠다고 목사에게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그녀를 잠시 쳐다본 후에 말하였다. "만일 시의회에서 더럽고 추한 거리에 있는 가로등불을 모두 없애고 부유하고 잘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만 가로등을 세운다면 당신은 시의회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여인은 목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잠시 후에 목사가 다시 그 여인에게 와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그 여인은 얼굴에 미소를 띄고서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이 거리에서 내가 할 일을 알았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창성과 즐거움을 주며 자유를 줍니다.
우리도 이 빛이 되어 세상의 빛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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