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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 되자 (빌 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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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 되자 
빌2:25-30 


`하늘나라 시민답게 사는 길에는 좋은 일군이 되야 한다.`
지난 시간에는 디모데를 통해 은혜 받았고 이번 시간에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같이 알아보려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바울이 생각할 때에 빌립보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추천을 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꼭 필요한 사람이다.`, `효용가치가 있다.` 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효용가치가 있는 일군,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25절 말씀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한다. 이 사람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었는데, 너희도 도와 줄 것이다. 이를 보내 줄테니 그를 기쁘게 하고 존귀히 여기라.
에바브로디도가 사도바울을 열심히 돕다가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병이 고침받았습니다. 고침받은 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그를 기쁘게 맞으라는 말씀이 26-29절까지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 거기서 끝나지 않고 존귀히 여기라는 것은 하나님처럼 임금님처럼 높이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의 쓸 것을 도왔는데 이런 사람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이런 사람들을 존귀하게 하나님처럼, 임금님처럼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필요한 일군이 되면 하나님도 인정하실 뿐 아니라 교회는 마땅히 그런 사람들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이런 분들을 존귀히 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면 이런 사람은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는 것입니다. `돕는 자`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도왔습니까?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목숨 바쳐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남의 부족함을 채웠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갖고 비판하고 정죄한 것이 아니고 부족함을 채워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필요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을 존귀히 여기고 이런 사람을 기쁨으로 환영하라는 말씀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
과연 이 사회는 이런 분들을 귀하게 여기느냐?

반대로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 비판하고 정죄하고 헐뜯어 내고 이런 사람이 오히려 인기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이 사회에도 정치적으로 비판기사가 더 인기가 있습니다. 정죄기사가 더 인기있습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이야기도 이런 비판과 정죄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인데, 부족함을 채우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에바브로디도를 평가할 때에 `너희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어떻게 도왔는가 할 때에 부족함을 도왔다는 한마디로 그치지 아니하고, 25절에 네가지로 이 분의 일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① 나의 형제
② 함께 수고한 자
③ 함께 군사된 자
④ 너희 사자

`적어도 교회의 일군은 네가지 기준을 갖고 판단해야 된다. 이런 자세로 나를 도울 때에 이런 사람이 필요한 일군이다.`
우리는 일한 것을 평가할 때에 일한 양을 갖고 이야기하지만,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라고 했을 때 주님은 `나는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 일은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인정받는 일은 이 네가지 기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네가지 기준 가운데 첫째가 나의 형제라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형제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바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지간에 나의 형제처럼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면 그 가정은 잘 될 수 있습니다.
내 형제처럼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면 그 가정의 부부는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어떻게 합니까? `그는 나의 형제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같은 피를 나눈 혈육의 형제 자매지만, 우리는 그 보다 더 귀한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사이는 어떤 사이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공직자 윤리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 박만호 변호사가 대 법관을 퇴임할 때 여태까지의 관례나 전례에 없이 자기 형님 내외분을 그 자리에 앉혀놓고 그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여태껏 관례가 없던 일을 어떻게 했냐 하면, 대법원장에게 이유를 이야기하니까, 쾌히 승낙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나직하게 퇴임사를 읊는데, `제가 법조인으로 성장하고 대법관의 자리까지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형님 덕분입니다.`
그 내용인즉, 형 선호씨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의 가장역할을 대신했는데, 교직생활을 하면서 농사일까지 겸한 형이 자신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다며 형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단상 아래에 앉아 있던 형은 그만 눈시울을 붉혔고, 그들은 잠시 추억에 잠겼습니다.

그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교진학을 포기하려 할 때, 형은 "만호야,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하며 동생의 손을 꼭 잡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형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불행히도 결핵 진단을 받아 요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형 자신은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는 형편에 매일 계란과 쌀밥을 구해서 동생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퇴임식을 앞두고 그는 대법원장에게 그런 사연과 함께 형이 꼭 퇴임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 주면 고맙겠다는 글을 올리자 대법관들은 형님 가족을 초청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퇴임사를 마치고 단상을 내려 온 박 대법관이 형을 끌어안고 뜨거운 포옹을 하자 이를 지켜보던 관계자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형제의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저도 동생이 있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부부지간에 아내를 섭섭하게 있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제가 꼭 무엇을 사면 `내 동생 거다.` 이랬다는 것입니다. 아내 생각은 안 하고 동생만 챙기니까, 아내 생각에 `나는 안 챙겨 주고`, 세월이 지난 후 이야기를 하니, 얼마나 낯이 뜨겁던지, 형제 사랑이란 것이 그런게 아닙니까? 동생생각만 하면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은 것이 형 마음입니다. 동생도 어디 가서 좋은 것이 있으면 형 생각하고 갖고 오는 것. 형제 사이가 이런 사이입니다.

사도바울이 생각 할 때에 에바브로디도는 `자기를 사랑했는데, 어떻게 사랑했느냐?`, 형제처럼 자기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엔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디모데서에도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엇이냐며 떠나가지 않습니까? 욥이 사랑하는 많은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고 사랑하는 아내까지 그를 떠나가는데, 이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법으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가족처럼 찾아와서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고 그를 도와주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은 형제의 마음을 갖고 교인들을 대하고 그런 사랑의 관계를 갖고 일하는 일군이 진정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초대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은혜받고 나니,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의식을 가지고 교인들을 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교인을 서로 맞이하고 관계를 가질 때에 형제의 마음을 갖고 법이나 비판이나 정죄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 형제 자매`라는 마음을 가질 때 그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그 교회는 정말 하나님이 필요한 일군들로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하거나 또 가끔 TV를 볼 때에 그렇게 부둥켜 안고 웁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형제사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은 내가 필요한 것을 돕되, 교인 간에 형제의식을 갖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요, 천국시민답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 앞에서 함께 수고하는 사람.
수고한다는 말은 일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고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왜 세우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제일 목적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찾으시는 사람은 요4:23에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많은 일들을 합니다. 새신자들이 오게 되면 바나바가 일을 하고 남선교회, 여전도회가 그를 맞이하고 구역에서 예배와 친교를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합니다. 지난주간처럼 예배학교에서 열심히 배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 여러모양으로 은사를 갖고 일을 합니다. 찬양대원으로 일하고 교회학교 교사로 일하고 예배위원으로 일하고 구역장, 권찰로 일하고 주방에서 봉사하고 안내하며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는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23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일을 하는데, 일을 하다 보면 섭섭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목하고 하나님께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수고하는데, 그 속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였는데, 그 속에는 이해하고 도와주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한자성어에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중과 포숙은 친구 사이입니다. 이 친구들이 같이 동업을 하였을 때 관중은 포숙과 장사하여 자기가 이득을 더 취했습니다. 그러나 포숙은 관중이 탐욕한 게 아니라 가난한 탓이라고 묵인했습니다.
관중이 세 번 취직했다가 세 번 다 쫓겨났을 때나, 일에 실패했을 때에도 포숙은 그가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때를 못 만났으므로 실패한 것이라고 위로하고 두둔해 주었습니다.
또한 관중이 세 번 싸워 세 번 다 패하고 도망쳐 왔을 때도 포숙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늙은 어머니를 모신 때문이라고 양해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섬기던 규가 패하여 죽었을 때 같이 죽지 못하고 잡히어 욕을 보았을 때도, 포숙은 그를 염치없는 놈이라고 욕하지 않고 도리어 관중이 소절을 넘어서 천하에 대공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잘 변명해 주었습니다.
관중은 이런 포숙을 보고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님이시다. 그러나 나를 알아 준 사람은 포숙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관포지교라고 합니다.

이런 친구들은 절대로 헤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을 하는데, 그 목표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앉았다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배를 위해서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가운데 성도들 가운데 섭섭한 일이 있으면 화해해야 합니다. 화해보다 이해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수고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격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사도바울을 교회에 인정해 주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같이 떠나고, 2차 전도여행도 같이 떠났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자, 사도바울이 결사반대하는 것입니다. 마가가 1차 전도여행때 힘들다고 돌아갔는데, 나는 이런 배신자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바나바와 사도바울이 막역한 사이였음에도 따로 헤어져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에바브로디도에게 사도바울이 못마땅할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사도바울의 성격이 대단한데, 그래도 함께 이해하며 일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함께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보수세력들이 결집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구나.` 생각합니다. 여태껏 진보세력은 나름대로 이론을 갖고 토론에 나와서 얼마나 열변을 토하는지 모릅니다.
보수세력들은 그렇지 못했는데, 요즘엔 얼마나 이론이 생겼는지, 팽팽한 대화와 토론을 나누는 것을 보며 `저렇게 나라가 돌아가는 구나` 생각을 해 봅니다.

미국에는 민주당, 공화당이 서로 토론을 하고 생각을 펼쳐 나가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도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만 가면 평행선을 유지할 것 아닙니까?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만날 수 있는 길은 이해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바울파, 네 파가 나뉘어 있는데, 서로 잘났다고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같이 일을 하는 데에 그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나에게 반대하는 의견도 있어도 `감사합니다` 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사회나 교회가 살 길은 `누가 옳으냐` 보다 얼마만큼 사랑하느냐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노조나 경영자 노사를 보았을 때 어느 편을 듭니까? 어느 편을 드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로 형제 의식을 가진 노동자와 경영자, 서로 일을 하며 함께 수고 할 때에 필요한 일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옳은 일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몇주전 설교때 말씀드린 `옳은 것은 언제나 옳은가?` 하는 책이 있습니다. 오늘은 옳아도 10년 후엔 이것이 잘못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론은 그런 것입니다. 오늘의 주장이 옳다고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함께 수고한다고 하는 마음 속에는 이해한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부부간에 만나고, 부모 자식간에 만나고, 사장님과 직원들이 만나고, 교인들이 만날 때에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입니다.

일만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우리가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수고하는 그런 일군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입니다.

세 번째, 세상 앞에서 함께 군사된 사람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입니다.
군사는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은 언제나 세상이고, 마귀입니다. 남편이 밖에 나가서 열심히 싸워서 돈을 벌어다 주어야지, 이 싸움을 집에 와서 그 힘 약한 아내와 하면 그것은 경찰에 붙잡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싸움은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나가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함께 군사되었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싸우라는 것이 아니고, 나가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왜 나가서 싸우지 않고, 교회 안에서만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싸움은 나가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싸우는 것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신문은 그래도 교회신문은 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교회신문도 어디 하나 문제가 생겼다 하면 그것을 갖고 논쟁을 합니다.
오늘 새벽에 뉴스앤조이라고 기독교 인터넷 신문이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 가 보았더니, 그 인터넷 신문의 한쪽 귀퉁이에 통일교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자기의 이야기를 써놓은 사람은 다섯명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했다 하면 그 곳에 보지도 못한 욕을 써놓는 것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무슨 경사나 난 것처럼, 사정은 이해하지 않고, 형제의식도 없이, 적인 것처럼 써놓은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피스컵이 한창 진행중입니다. 원래 명칭은 월드피스킹컵입니다. 우리 교계가 이 일에 대해 반대를 했습니다. 제가 앞장 서서 사설도 썼습니다. 세계평화의 왕 문선명 컵이 피스컵입니다. 그런데, 교계에서 난리를 치자, 협회에서 `세계`는 못쓴다고 해서 뺐습니다. 통일교에서 아무리 이론을 달아도 안 된다고 해서 결국 피스컵만 남았습니다. 처음에 올려고 했던 세계 축구팀들이 거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정되었던 팀들이 많이 바뀌어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축구대회를 한번 하는데,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축구대회 가운데 페데로이슨 컵이 있는데, 그것보다 상금이 많습니다.
이것을 위해 200억 이상을 투자합니다. 문선명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보혈과 재림을 거부하고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하는 사이비 이단 교주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지, 통일교에서 IMF때 1조7천억원 이라고 하는 공적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그 빚을 갚을 생각 안 합니다.
650억짜리 경비행기를 타고 다닙니다. 경기도 가평에 보호구역내에 자기들이 마음대로 성전을 짓고, 그곳에 신앙촌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00억짜리 축구대회를 지금 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마디도 함께 군사된 자로 마귀사탄의 역사를 향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교회 안의 문제만 있다 하면 경사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함께 군사된 자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IMBC사장이 52세 된 분이 사표를 냈습니다. 승승장구 하며 출세하던 분이 왜 사표를 냅니까? 예수님 믿고 난 후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자기가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회에 필요하지만,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군사된 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가 사표를 내고 미국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적은 마귀사탄입니다. 세상의 향락과 사치에 대항해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사데교회가 나옵니다. 이 사데교회를 향해서 네 이름은 살았으나 네가 실상은 죽은 자로다 네 행위를 아노니 - 그 행위가 어떤 행위입니까? 많은 것을 받았지만 그 받은 것을 가지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사데성이 무너지듯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사치와 향락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언제나 세상에 있습니다. 더 겸손하고 거룩해야 할 우리들이 함께 군사된 자로 이 세상을 향해 싸우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필요한 일군은 나 자신 앞에서 사자로 보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볼 때 내가 누구인가? 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이 사명을 가지고 보냄 받은 사람이 바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입니다.
"나 자신 앞에서 사도로 보냄받은 사람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군입니다."

`너희 사자로 너희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자라는 말은 사도입니다. 보냄 받은 자입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는 교회를 대표해서 교회를 돕는 사자라 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는 세상적 권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적으로는 많이 가졌다가 힘이 많이 떨어지게 되면 그 사람의 가치도 다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사도로 사명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그 사람은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떤 생명입니까?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막중한 심부름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사명(使命)의 使는 심부름 사입니다. 나는 민족의 심부름을 받고 받고 태어난 생명이라고 느끼는 것이 사명감이고 그러한 인간이 사명적 인간이요, 그러한 인생이 사명적 인생관이 되는 것입니다.

회사의 조그만 심부름꾼은 소사이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천사이고, 몰래 가는 심부름꾼은 밀사이고, 특별히 심부름하는 일군은 특사요, 급하게 심부름하는 일군은 급사요, 임금님의 심부름꾼은 칙사요, 공적 심부름꾼은 공사요, 심부름 받는 신하가 사신이요, 심부름받은 제자가 사도요, 심부름받은 사람이 사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여름성경학교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해서 이번에는 여름성경학교에 대해 무엇을 쓸까 하다가 여름성경학교의 역사를 훑어 보았습니다. 기록이 많지 않아서 여름성경학교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을 드릴수는 없지만, 그래도 글을 하나 썼습니다.

여름성경학교는 1860년대에 미국에서 간헐적으로 해마다 열리다가 1911년에 `보빌레` 라고 하는 목사님이 미국 뉴욕에서 학생들을 모아서 시작한 것이 오늘의 여름성경학교의 시작입니다. 이 여름성경학교에서는 한달동안 성경학교를 했는데, 한달동안 성경도 가르치고 유희도 가르쳤습니다.

한국의 여름성경학교는 1922년도에 정동감리교회에서 20명의 교사들이 100명을 가르친 것이 처음 했다는 기록입니다. 그 후로부터 2년 후인 1924년도에 조선주일학교 연합회 안에 여름성경학교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이 위원회는 미국에 있는 보빌레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그 분은 전국을 돌아 다니며 순회 강습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한국에는 여름성경학교가 불일 듯 일어나서 전국적으로 이 일이 일어났는데, 22년부터 32년까지 10년동안 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그 학생들 가운데 30%가 불신자고, 30% 가운데 50%가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학생들이 결국은 한국교회의 밑거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제시대 때 있었던 여름성경학교는 4주까지 한달 내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여름성경학교에는 각 교회의 지도자들, 기독교 학교, 기독교 학교의 모든 시설과 기독교계의 모든 분들이 앞장 서서 그 일을 했고, 주로 대학생들은 당연히 그 일에 참여를 하면서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그 일을 앞장 서서 했던 것입니다.
해방이후에 오늘처럼 계절 성경학교처럼 한 주간만 하고, 오늘날에는 기껏해야 3-4일 하는 여름성경학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에는 여름성경학교를 짧게 해도 잘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외 가야 하고, 학원가야 하고, 외국에 어학연수가야 하고, 집안에서 놀러 가니 가야 하고, 교회가 열심히 물 좋은 곳으로 가고, 야외 수련장을 찾아 가도 잘 오려 하지 않습니다.
교인 들 가운데도 멀어서 못 보내는 분도 있고, 그 때에 휴가를 가는 분도 있어서 교사들 입장으로서는 난감한 것입니다.
"하나님, 여름성경학교가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옛날에 그 처음 여름성경학교로 돌아가야 겠습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가 한달동안 좋은 장소를 빌려놓고 학생들을 어학연수 시켜주겠다면 안 오겠습니까? 한달동안 이 아이들을 데리고 세계일주 시켜 주겠다면 안 오겠습니까? 이제는 교회의 일군을 키우는데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의 시대엔 세 가지가 잘 되야 장사도 전도도 잘 된답니다.
CAS(카스)라고 해서 C는 culture(문화)입니다. A는 art(예술)입니다. S는 sports(스포츠)입니다. 그 것을 잘 하는 곳이 통일교의 문선명이 제일 잘 합니다.
선화예술학교에서 예술 가르키고 문화 가르키고 가정내 순결 찾기 운동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싸인을 받았습니까? 내년에 총선을 앞두고 통일평화가정당이라 붙여서 내년 총선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섭되어 있습니다. 세계적 아티스트가 와서 리틀엔젤스와 공연하고 그들이 세계를 돌아 다니고 그 곳 출신들이 얼마나 퍼져나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 피스컵이 스포츠 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컵이라고 있었습니다. 지금 CAS (카스)를 제일 앞장 서서 하는 것이 문선명입니다. 이단들이 제일 많이 합니다. 구원파의 박옥수나 무료성경신학원의 이만이나 JMS의 정명석 이런 사람들이 다 이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여름 성경학교가 이런 CAS(카스)의 중심을 이루어야 하는 여름성경학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지 않으면 교회는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발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습니까?
정말 아브라함에게 세계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땅끝까지 가서 복음증거하라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과감하게 투자하고 헌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귀한 사명 잘 감당하는 주님의 좋은 일군들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내년이면 40년입니다. 40년을 돌아보면서 40년사를 다시 살펴보는데 오늘 우리교회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펜실베니아 랭카스터 어느 교회에 관한 기사를 봤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부임해서 얼마 안 있다가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을 그 교회가 13년동안 계속 모시다가 세상을 떠나시고, 이러한 사실을 기자가 알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라고 잡지에 실었습니다. 그런 기사의 내용을 인터넷에서 보면서 우리교회는
그래도 부목사님 모시고 다쳤지만 우리가 13년 이상 모시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참 세계적인 교회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저 교육관을 사서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한쪽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겠다 생각해서 만들어 진 것이 엘림미션센타, 외국인근로자를 위한 것이 벌써 5주년입니다. 총회에서 정책적으로 국가별로 만들어 주자 해서 처음 한 것이 필리핀사람들에게 교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계적 관심의 센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생활보호대상 25가정과 자매결연 맺어 이들을 도우니까, 이것을 보고 용산구청도 "이 일을 해야겠다" 해서 온 용산구가 앞장서서 어려운 가정 돕는 일에 나서서, 우리가 이 일에 불씨가 되지 않았습니까?

매주 목요일마다 어려운 가정을 찾아 가서 반찬을 나누는 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 땀 뻘뻘 흘리며, 추운 날에도 올라 가서 반찬을 나누어 주는 일, 전도하는 분들이 목요일마다 모여서 열심히 나가 전도합니다.
효도관광을 통해 지역사회의 노인을 공경하고 가정을 바로 세우자는 일들이 많은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지역사회봉사자 위로회를 하면서 이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는 분들이 사기를 얻고 열심히 일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장학위원회는 많은 학생들을 복음 안에서 키우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세계 단독 선교사 파송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아프리카, 캐냐, 브론디, 콩고, 인도네시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일, 러시아에 군선교하는 일, 미국 한인 여성들의 쉼터인 샤론의 집을 지원하는 일, 국내교회를 지원하는 일, 22곳의 미자립교회와 학교들을 지원하는 일, 얼마나 귀한 일들인지 모릅니다.

지난 번 우리 교회학교가 서울서노회 60여 교회가 모인 자리에서 1등은 못했어도 4등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중고등부는 체육대회 나가서 역시 4등을 했습니다.
그래도 60여 교회의 많은 교회에서 이만큼 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입니까?

교육관 땅 486평을 마련해 준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언젠가는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겨울, 추운데도 교육관 개보수 하느라, 우리의 관리부장님이 돈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새벽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이 아파도 교육관을 아름답게 수리해 놓은 것을 볼 때에 참 우리 교회 장로님들 귀한 분이고, 우리 교인들이 합쳐서 이 일을 한 것을 볼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정말 기쁨으로 환영받을 일은 우리 성도들이란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서 헌신하는 아름다운 교회 된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교회가 더 필요하는 좋은 일군되어서 형제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이해하고, 수고하고, 군사되어서 마귀사탄과 싸워 이기고 하나님의 사명자로 이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를 돕는 좋은 일군들이 되서 참으로 인정받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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