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원히 거하는 사람 (요일 2:12-17)

  • 잡초 잡초
  • 1093
  • 0

첨부 1


제목  영원히 거하는 사람
본문  요한1서 2:12~17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것들을 참 좋아합니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젊음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결혼 서약을 할 때는 그 서약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들은 영원히 살기를 바라서,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천국에서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들의 이름이 영원히 전해지기를 바라서 동상을 세우고 기념물을 만듭니다.

요한1서는 영원한 것들을 유난히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1장 2절에서 사도 요한은 영원한 생명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여 우리에게 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2장 25절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장에는 ‘영생’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줄인 말입니다.

요한1서 5장 12절에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의 친구들이 저를 놀릴 때 이 말을 곧잘 인용해서 ‘당신은 생명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는데 저는 아들이 없거든요.
여기의 생명이라는 말도 영생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영생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놀리는 사람이나 놀림을 받는 사람도 농담인줄 알고 부담 없이 주고  받습니다.

최근에 영생이라는 이름을 빌린 사교집단이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영생교는 매우 거칠고 위협적인 성격을 가진 집단이어서 십여 년 전부터 자주 문제가 되고 법의 제재를 받았는데 아직도 왕성한 모습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여기에서는 교주를 믿으면 영생한다고 가르칩니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틀린 말입니다.
영생, 구원, 장막, 증인, 또 통일, 이런 좋은 말들을 이단 집단들이 가져다가 더 열심히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잘 가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요한1서는 이와 같이 영원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는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사람이 되는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거한다는 것은 영원히 남는 것, 또는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본문의 뒷부분을 중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비결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15절의 앞부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읽으면서 ‘이거, 큰 모순이 아닌가?’ 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17절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여 하심이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면서 우리를 보고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더구나 요한복음을 쓴 사람과 요한1서를 쓴 사람은 같은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복음, 요한1서, 2서, 3서, 요한계시록, 이 다섯 권의 성경은 모두 요한이 기록했기 때문에 ‘요한 문서’ 또는 ‘요한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구이언,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것(약3:11)과 같은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웃도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서로 어긋난 것처럼 여겨집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모순된 것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하는 말씀에서 ‘세상’은 ‘세속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요한은 성경을 기록할 때 ‘세상’이라는 말을 유난히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이 신약에 187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반이 넘는 106번이 요한문서에 나옵니다.
요한일서는 다섯 장으로 된 길지 않은 성경인데 ‘세상’이라는 말을 23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이라는 말을 두 가지 다른 뜻으로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또는 그 안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의 삶을 말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요한복음 3장 16절과 17절에 나오는 세상이나, 요한1서 3장 17절의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라는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이런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대적되는 것들,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인간사회를 말합니다.
요한1서 5장 4절은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작년에 저희 교회가 이 말씀을 표어로 삼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5장 19절의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할 때의 세상도 그런 세상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오늘 본문 가운데 15절에서 17절 앞부분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에는 세상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여기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말은 모두 하나님과 대적되는 의미의 세상을 뜻합니다.

우리는 먼젓번 의미의 세상,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그리고 그 안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는 애정과 관심과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세상에 참여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세상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야’ ‘멸망할 곳이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세상을 무조건 죄악된 것으로 여기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은 비록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 안에서 창조적인 문화활동을 통해 그분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기독교 문화화’라는 말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와 교회, 교파와 교파가 힘을 합해 일을 하는 것을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연합운동이라고 번역하는데 일본의 교회들은 이 말을 ‘전교운동’(全敎運動)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헬라말로 ‘오이코노메’라고 하는데 에큐메니칼이라는 말은 오이코노메에서 왔습니다.
‘세상의 교회들이 힘을 합해서 일하며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상은 세속적인 세상,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런 것들과 짝하여 사는 것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타락한 본능을 자극하고 쾌락주의에 빠져들게 하고 헛된 자만심을 유발시킵니다. 헛된 자만심을 오늘의 본문은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죄악에 빠진 삶을 살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정욕(에피투미아)이라는 말은 ‘잘못된 에로틱한 감정’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욕망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세속적인 의미의 세상과 욕망들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특징이면서 동시에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먼저 들어야 하는 특징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의 근원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이며, 또 동생이 하나님께 칭찬 받는 것을 보고 시기해서 동생을 죽인 가인입니다.
요한1서 3장 12절은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시」라는 책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대해여 죄를 지은 후 두 개의 도시가 이루어 졌는데 하나는 가인에게서 시작된 지상의 도시이고 하나는 아벨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도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을 얻을 아들과 딸들로 조직될 것인데  신의 도시는 교회에서 실현되는 도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교회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나라인 동시에 하늘 나라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우리는 하늘 나라의 모형이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온전히 모범이 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들 수 있는 특징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세상에 있는 것들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의 본능적인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나 명예나 이성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좀 적은 사람, 관심이 없는 척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관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
이런 욕망들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욕망들을 통제하고 절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서 의연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더 많이 채우려고 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 더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구약성경의 전도서입니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솔로몬은 ‘내가 그와 같은 것들을 끝없이 추구했고 많은 것을 누렸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허무함을 느꼈다’라고 말합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말이 거듭해서 나옵니다. 한 에로 5장 10절을 보면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소유를 통해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절제를 통해서 자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이 말씀을 읽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것들의 특징이 또 있습니다. 15절 뒷부분,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비오는 날 새벽기도회에 나오는데 어두운 가운데서 주차장에 빗물이 고여 있는 것을 모르고  발을 내딛다가  ‘첨벙!’ 하고 발을 적신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주차장에 왜 빗물이 고이나, 공사가 잘못되었나 하다가 잘 살펴보니까 그 원인이 의외로 간단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진 것들이 하수도 입구 쇠창살 덮개를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뭇잎들을 치워주면 빗물은 콸콸 하수도로 잘 흘러 들어갑니다. 이제는 비오는 날 새벽기도회에 나올 때는 하수도 입구 나뭇잎부터 치워주는 것이 일이 되었습니다.
세속적인 욕망들은 이 나뭇잎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을 막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욕망에 집착하는 것은 범죄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이 세상을 사랑하고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편안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혹시 하나님과 대적하는 뜻의세상을 사랑하고 있고 또 거기에 뿌리를 둔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꼭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17절 앞부분을 보세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아주 중요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 요란합니다.
세상에서 유행하는 것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지나갑니다. 지금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17절)할 때  “자나가되”(파라게타이)라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지금도 지나고 있는 중이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신문에 이름이 많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누구지요?’ 할 것입니다.
저는 시청 앞을 지나갈 때 같이 가는 사람에게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가리키며 ‘저 문이 본래부터 저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옮겼다고 생각해요?’ 라고 물어보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 있게 대답하는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제자리에 있지 않기에 그렇게 묻는 것 같은데 옮겼다고 하면 그 다음에 무엇을 물어볼지 몰라 우물쭈물합니다.
옮긴 것입니다. 원래는 그 훨씬 앞에 있었는데 30여 년 전에 도로를 확장하면서 뒤로 물린 것입니다.
대한문을 옮길 예정이라고 발표했을 때 정말 요란했습니다. 유서 깊은 유적을 함부로 손댈 수 있느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여서 통곡을 하고, 고종황제가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이 그 자리에 많이 모인 것이 삼일만세운동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을 옮기면 어떻게 하느냐, 정말 요란했습니다.
그 때 어느 민간방송에 전화로 자기 의견을 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비분강개한 어조의 전화로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방송사에서는 언론의 속성상 그런 전화를 우선적으로 택해 전파에 싣습니다. 제가 그때 그 방송사에서 프로그램 제작에 관련된 심부름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요란하던 것이 생각나서 일부러 물어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요란했는데 지금은 그것을 기억하는 분, 아는 분, 별로 없습니다.
세상의 일들은 그런 것입니다. 지나갑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지나간다’ 이것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공통된 가르침입니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40장 6절과 7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29절 이하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가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일들을 절제하며 경건생활에 힘써야 하는 긴박한 때라는 가르침입니다.
감정도 절제하고, 기쁨도 절제하고, 이익에 매달리는 것도 절제하고, 지나친 소비도 절제할 것을 말하면서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외형적인 것들을 중요하게 여길 때가 아니라 본질적인 것, 영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할 때라는 가르침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1장 10절에서 부자는 풀이 꽃과 같이 지나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지나갑니다. 지나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권력도 지나갑니다. 물질도 지나가고, 명예도 지나가고, 사람들의 관심도 지나갑니다.
세상과 그 모든 영화는 일시적입니다.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과 세속적인 욕망들은 사랑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일이 아닐 뿐 아니라 헛된 일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다. 7절 뒷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는 요즘 많이 쓰는 말을 빌어서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총론은 기본적이고 공통된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공의롭게 살기 위해 힘쓰는 것,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평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경건하게 사는 것,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도하는 것,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데 이르기를 원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남에게 덕을 끼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각론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또 매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생각하는 것도 각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광복절에 감리교 청장년선교회 전국대회 및 통일기도회 설교를 맡았는데 ‘목사님 70분 설교를 준비해 주십시오’ 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애써 준비해서 두툼한 설교원고를 들고 나갔는데 진행이 늦어지면서 차질이 생겼습니다. 제가 설교를 맡은 예배는 한 시에 끝나고 한 시부터 두 시까지는 점심, 두 시부터는 또 다른 순서가 진행되도록 짜여 있는데 12시 45분에야 설교 순서가 되었습니다. 남은 시간이 15분인데 설교 다음에 장기 기증 서약순서가 있고 바깥에서는 헌혈이 진행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광고도 해야합니다.
사회자에게 ‘이거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니까 ‘그야 목사님이 알아서 하셔야지요!’ 합니다. 제일 무서운 대답입니다.
참석자들에게 ‘여러분 어떻게 할까요? 지금 북한에서는 하루에 두 끼 먹기가 공식화되었는데 우리도 점심 먹지 말고  통일에 대한 설교를 들을까요?’ 했더니 누가  ‘그러면 헌혈하지 못해요!’합니다.
‘하나님.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가르쳐주세요’ 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의 각론입니다.
이렇게 말했지요. ‘저는 이 자리에서는 15분만 설교하고 설교 원고는 목양교회 홈페이지에 올려놓을 테니 그거 읽으세요!’
나중에 식사하는 자리에서 진행하는 분들이 말하기를 ‘목사님, 15분만 말씀하셨지만 하실 말씀은 다 하셨습니다’, 미안해서 한 말이지만 할 말은 다 했다니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의 것들은 물질적이고 양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영적이고 질적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일시적인 만족을 주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리스도인, 죄를 버리고 세속성을 버리고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성도들은 영원을 상속받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는 주님의 기도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지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된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그 음성을 들으시고  그 다음에 세상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에는 향락이나 물질이 귀해 보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세상의 빛이고 심령을 채우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이 세상을 밝게 비춰줄 수가 있고 또 우리의 희망이며 우리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 앞에 보세요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  여러 계층, 여러 사람의 이름을 골고루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거하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부러워하는 것이 달라지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영원히 남을 참된 가치를 지닌 것을 부러워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내가 가진 이것, 믿음을 그들이 부러워하도록 성도로서의 삶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부러워해야 할 사람은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힘써 영원한 삶을 누리는, 영원히 거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