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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생명 새 교회 / 엡 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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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 새 교회 (에베소서 2:11-22)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고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은혜도 과거, 현재, 미래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베푼 은혜, 현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셨고, 미래에 성령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해 나갈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았고, 미래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11절), "그 때에 너희는"(12절)
여기에서 말하는 그때는 과거를 말합니다. "이제"(13절)는 현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19절)는 미래를 말합니다. 그때는 너희가 어떤 존재였고,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에 너희는 어떤 존재로 살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구약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신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성령이 오신 이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예의주시해보면 어쩌면 그렇게 오묘하게도 한 마디 한 마디가 꼭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씌여져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7절까지는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고, 8-10절까지는 구원의 근거, 구원의 방법, 구원의 목적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과거에 어떤 존재였느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없는 자들은 불쌍합니다. 돈 없고, 집 없고, 빽 없고, 학벌 없고, 아버지 없고, 남편 없고, 없다는 말은 불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없는 것도 불행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자, 예수가 없는 자는 더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11절)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구별인데 유대인은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당이요,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못한 무할례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삼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징표로 남자의 양피를 잘라 흔적을 남기도록 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절)

과거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을 했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또 다윗에게 언약을 했습니다. "네 후손 가운데 영원히 왕권을 지키는 자가 나올 것이다."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은총을 입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하셨는데 이방인들은 이 언약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전에는 이방인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서 구원해 주시므로 그리스도가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받는 축복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성경을 가까이 합니다. 제단을 가까이 합니다. 주의 종을 가까이 합니다. 성경에서 병 고침 받고 은혜받은 사람들은 예수를 가까이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어떻게 가까워집니까? 그리스도의 피가 내 속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육신의 피를 나눈 한 형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집니다. 그런데 육신의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들은 한 형제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4-15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담으로 막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는 저주받은 백성들이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축복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냉정히 생각하면 유대인들도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들입니다. 율법을 줄 때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을 범하므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영혼이 떠났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쫙 찢어졌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은 것이 휘장입니다. 이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 처소입니다. 이곳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씩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죄인이 그곳에 들어가면 죄 때문에 바로 즉사합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죄사함 의식은 속죄의 모형일 뿐이지 참 속죄는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피를 흘리시므로 휘장이 찢어지면서 누구든지 예수의 피가 있는 자는 하나님 면전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5절)
율법을 폐했다는 말은 율법을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나오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므로 율법을 다 완성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모든 법이 다 끝났습니다. 세상의 법도 죄인이 살아있을 때 법이 적용되는 것이지 죄인이 죽어버리면 법이 끝나버립니다.

여기 '의문'이라는 말은 '조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모든 조문을 말합니다. 이 의문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었는데 구별되는 새 사람이 아니라 이전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새 사람이 되니까 저절로 화평하게 됩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17절)

먼데 있는 이방인이나 가까운데 있는 이방인이나 모두 다 죄로부터 오는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죄책으로부터, 저주로부터 평안을 주었습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절)
우리는 아버지가 있는 자요, 예수가 있는 자요, 천국이 있는 자요, 구원이 있는 자요, 죄사함이 있는 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불행한 자에서 이제는 있는 자로 바꾸어졌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없는 것을 보기 때문에 불평하고 불만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자기 자녀에게서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은 "공부도 못하는 멍청한 자식, 꼭 생긴 것도 돼지같이 생겼네" 하면서 부정적인 것만 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은 "너는 건강이 있구나, 웃음이 있구나, 노는 재주가 있구나" 하면서 긍정적인 것만 봅니다.

오늘 분당에서 오전 예배를 드리고 당회실에 앉아 있는데 에스더 선교회 자매 여섯 명이 기도해 달라고 저를 찾아왔어요. "목사님을 멀리에서만 뵈었는데 오늘은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뵈려고 결심하고 왔습니다." 나를 가까이서 보려고 왔다니 반가워서 1시간 가까이 이런 저런 대화를 했습니다. 제가 한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나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별로 안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저에 대해서 안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나요?"  "목사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일로 자매님을 섭섭하게 했나요?"  "제가 목사님에게 인사를 했는데 인사도 안받고 본체만체 하고 그냥 지나가서 섭섭했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이 자매님과 같이 저를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나를 무시했다, 가난하니까 안쳐다봤다, 우리 목사님은 나를 싫어한다." 그러면서 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단언하건대 저는 절대로 여러분들을 싫어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교인들을 많아서 일일이 다 상대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혹시 저에 대한 오해로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마음을 푸시기 바랍니다. 

이 자매님이 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있었는데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서 섭섭한 마음이 풀리고 섭섭한 마음이 풀리면서 제가 귀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섭섭한 마음이 귀한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목사님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구나! 진실한 분이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목사님에 대해 귀한 마음을 갖게 되면서부터 제 삶이 바뀌었습니다."

이분의 말을 빌리자면 시어머니가 얼마나 사나운 분인지 며느리에게 욕을 한다고 그래요. 옛날에는 시어머니 욕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빠서 소화도 잘 안되었는데 저에게 은혜를 받고 제가 귀하게 느껴지면서부터는 시어머니가 욕을 하면서 구박해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시어머니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별세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할 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면서 그 아버지가 내 속에 들어옵니다. 눈에 보이는 목자를 사랑할 때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면 약속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내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절)

외인이 아니라는 말은 이방인이 아니라는 말이요, 손이 아니라는 말은 나그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과 동일한 천국 시민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20절)

모퉁이 돌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머릿돌' 의미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 한 가운데 연결시키는 돌이 머릿돌입니다. 머릿돌이신 그리스도를 주축으로 해서 양쪽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1절)

건물마다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돌이 하나만 빠져나와도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내립니다. 성도들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아프면 전체가 다 아픕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목사나, 장로나, 교인 하나가 잘못되면 한국교회 전체가 잘못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성도 전체가 함께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대 잘됨이 나의 잘됨이요, 그대 실패가 나의 실패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의 실수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싸고, 격려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함께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때는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께서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과거는 떠나고, 현재는 예수 생명을 가지고, 미래는 역사를 살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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