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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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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10:46-52).   

요즘 컴퓨터 바이러스가 유행입니다. 하루에 몇 십 통의 인터넷 편지가 날아오는데 그것을 열면 바이러스가 걸린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병균과 같습니다. 어떤 바이러스는 컴퓨터 사용을 중지시키고, 중요한 자료들이 다 지워버립니다.

저의 컴퓨터도 어쩌다 바이러스에 걸렀습니다. 인터넷을 연결만 하면 경고와 함께 바이러스가 뜹니다. 그래서 한참 작업을 하다보면 스스로 작동이 중지됩니다. 저의 재주로는 바이러스를 치료하지 못합니다. 청년들에게 말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저처럼 재주가 없는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컴퓨터로 주보도 만들고 가정 예배도 만들고, 여러 자료들을 만들고, 거의 모든 것을 컴퓨터로 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바이러스를 치료하지 않으면 당장 주보를 만들지 못합니다.

이렇게 내 재주로 해결하지 못할 때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다행히 어제 교회 홈페이지를 만든 컴퓨터 전문가가 와서 고쳐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요즈음은 전문가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팔방미인이 인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문가를 찾는 시대입니다. 우리의 욕구를 채워줄 전문가가 뜨는 시대입니다. 가정에서의 한계, 자녀 교육에서의 한계, 카드 빚 같은 경제적 한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문제, 그리고 질병의 한계를 부딪힐 때 전문가가 찾아야만 합니다.

옛날에는 먹고사는 것만 해결되면 행복이 올 줄을 알았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복잡 다양한 인생의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전문가가 되십니다. 그 전문가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깨어진 가정과 깨어진 인생이 치유되어 새롭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마가 복음 10장에서는 다양한 인생의 문제들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 2절부터 가정의 문제를 가지고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이혼이라는 아주 민감한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무에 걸리게 하여 매장하려고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2) 13절부터 자녀의 축복을 바라는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자녀가 복 받도록 축복 안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녀를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3) 17절부터 영생 곧 내세의 확답을 얻고 싶은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영생을 살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4) 35절부터 권세를 누리고 싶은 야고보와 요한 등 제자들의 아귀다툼이 나옵니다. 서로 성공하여 주님의 좌, 우가 되어 권력을 잡고 싶은 다툼이지요.
5) 46절부터 치유함을 바라며 따르는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등장합니다. 질병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은 것이지요.

이 다섯 부류의 사람들이 구한 것이 어쩌면 우리 인생의 문제가 아닐까요? 가정, 자녀, 영생과 내세, 재물,  권력과 성공, 질병이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들 은 아닐까요?

이런 인생의 문제들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답을 가지고 계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도 예수님을 찾았고, 소외 받은 여인들도 예수님 앞에 나왔으며, 재물이 많은 부자도 주님 발 앞에 무릎을 꿇었고, 권력을 구하는 젊은이들도 주님께 간청하며, 치유함을 바라는 병자들도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의 복잡한 문제가 있을 때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길이 보입니다.
자녀들이 형통한 삶,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갑자기 두렵게 느껴진다면 예수님을 찾을 때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성공적 삶을 희망하는 분들도 예수님 앞에 나오라는 신호입니다.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질병으로 좌절되고 우울할 때도 예수님을 찾으라고 경고 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치유하시는 전문가이십니다. 전문가에게 우리의 곪아 있는 부분을 맡겨야 합니다.

마가 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을 찾은 5부류의 사람들 중에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가장 비참한 사람은 소경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지도자요, 부자는 돈이 많고 제자들은 예수님 측근입니다. 바디매오는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거지이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는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는데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를 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벌떼처럼 일어나 "조용히 해, 시끄러워" 핀잔을 주며 꾸짖습니다(48절).

아마 부자였다면 이렇게 무시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좀 배웠다면 이렇게까지 비인격적 대우는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알았기에 사람들이 핀잔을 준 것입니다. 사실 소경이니까 별을 볼 일은 없는 사람입니다만...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힘도 없는 거지였기에 만인이 귀잖아 하면비난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좋으신 예수님은 거지 소경 바디매오를 부르시고(49절), 소원이 무엇인지 물으시고(51절), 그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52절). 할렐루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은 아무리 비참한 인생이라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기만 하면 받아 주십니다. 치유하여 주십니다. 회복시키시고 고쳐서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손가락질 받는 삭개오를 변화시킨 예수님의 은총이 주님을 찾는 자에게 임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인 여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용서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심령에 임합니다.
십자가에서 우편 강도를 위로하신 주님의 위로가 좌절 속에 낙망하며 주님을 찾는 심령에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눈에는 비천하게 보이고, 무시당하고 질시를 받는 천덕꾸러기라도 주님의 무한한 사랑은 능히 감쌀 수 있습니다.
그 주님 앞에 감사하도록 합시다. 할렐루야 아멘

예수님을 찾은 거지 소경 바디매오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가 무엇을 하여 줄꼬"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주님 건강주세요. 로또 복권 맞추게 해 주세요. 성적 올라가게 해 주세요. 아니면...

몇 일 전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지금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주님께 간절히 요청할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돈인가? 건강인가? 자녀인가? 가정인가? ...

갑자기 머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주님, 저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건강하길 원합니다. 갈기갈기 찢어져 상처투성이인 주님의 교회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의 교회가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이 무엇을 원하느냐(느2:4) 물을 때 "왕이여, 고국에 돌아가 훼손된 성을 다시 중건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총도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예루살렘 성곽을 중건합니다.

갈렙의 딸은 결혼을 할 때 '아비가 무엇을 원하느냐'(수15:18) 할 때 당시에 귀중한 재산이었던 우물을 구합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헤롯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할 때(막6:22)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 하니 '하나님 백성을 잘 재판할 지혜를 주세요'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구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실까요?

1. 간절히 주님을 찾고 찾는 자에게 소원을 물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바디매오가 간절히 주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는 거지였고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습니다. 도심지에서 구걸하였기에 세상 돌아가는 소문을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도 들었습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들을 수 있는 귀는 있었기에 당시 빅뉴스였던 예수님 소문을 들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벳세다에서 시각 장애인을 침을 발라 고친 소문을 들었을 때 귀가 번쩍 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소문을 들었을 때는 마음에 흥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군대 귀신를 쫓아내신 소문도 들었을 때는 마음이 이미 움직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듣다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여리고에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입으로 외치기 시작합니다.

47절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듣기는 나사렛 예수라고 들었습니다. 촌놈 예수라는 무시하는 말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멸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각 장애인은 나사렛 예수는 다윗왕의 자손이요 메시야 구원자임을 알았습니다.

사29장과 42장에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오시면 소경이 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분명 다윗의 자손이고 나의 눈을 뜨게 해 줄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친 것입니다.

믿음이 생길 때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예수님을 찾습니다. 만나려고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더욱 기도하고 더욱 매달리고 싶은 욕망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무엇을 해줄꼬' 질문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을 때 즉시 만난 것은 아닙니다.

방해를 받습니다. 48절에 사람들이 꾸짖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 방해를 받습니다. 그것은 공식입니다. 기도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기도가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좀 기도하려고 하면 방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줍니다. 조용히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기도한다고 될 것 같으냐? 누구도 기도했는데 안되더라? 못하게 방해합니다. 왜 좋은 분위기 망치느냐고 합니다.

방해는 공식입니다. 특별 기도하려고 하는데 방해가 없다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습니다. 사명 감당하려고 하는데 핍박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핍박과 방해는 공식입니다. 누가 방해했습니까?
예수님을 먼저 알고 먼저 믿던 사람들이 방해를 합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꾸중을 했는지 모릅니다. 겉모습만 보고 핀잔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 중보적 기도를 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 가는 길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뜬 사람들이 방해를 합니다.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이 방해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훼방을 하고 예수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다른 사람이 만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귀와 눈을 막으려고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려고 하면 같이 기도로 도와야 할 사람들이 방해 할 수 있습니다.
간만에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면 유형, 무형의 방해에 부딪힙니다. 전도를 하려고 하면 방해를 받습니다.

방해를 받을 때 포기해야 할까요?  위축되어 있어야 할까요? 바디매오가 위축되거나 포기했다면 영영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열심을 내어 주님을 찾습니다. 48절에 심히 소리질러 더욱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장벽이 있을 때 포기하지 않고 더욱 간절히 주님을 찾는다면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49절에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듣고 저를 부르라 하십니다. 더디어 응답에 한 단계 가까이 간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은 완수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눅18:1말씀처럼 낙망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환경의 방해를 받아도, 사람의 방해를 받아도, 육적인 방해를 받아도, 영적인 방해를 받아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주님을 찾으면 응답 받습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기도 응답이 늦어 질 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자가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큰 우물이 나오는 곳은 그만큼 깊게 파야 합니다. 조금 파다가 나오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파고 파면 주님께서 은총의 우물이 터지게 하여 주십니다.

날마다 바디매오처럼 간절히 주님을 찾아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복된 종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2. 살아 있는 믿음이 있을 때 소원대로 됩니다. 
주님께 구한다고 다 소원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길로 가기를 원했지만 탐심을 버리고 할 때 재물 때문은 그 길을 가지 못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최고의 권력을 원했지만 섬기는 자가  데라는 권면을 들었지, 소원대로 최고 권력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바디매오는 구하고 원한대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할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응답을 받고 곧 보게 되어 주님을 따라갑니다(52절).

바디매오의 간청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마가 복음 10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도, 부자 청년도, 제자에게도 없는 믿음이 거지 소경 바디매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은 흔한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의 돌처럼 흔한 것이 아닙니다.

마가 복음을 통틀어 믿음이라는 단어가 7번나옵니다. 3번은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할 때 나옵니다.
마4:40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탄식합니다.
막16:14 믿은 없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니...

마가복음에 믿음을 가져 칭찬 받고 복 받은 사람은 4명에 불과합니다.
막2:5 지붕을 뚫고 침상 채 중풍 병자를 내리는 사람들에게 저희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하시고 고치십니다.
막5:34 예수님 뒤에 와서 옷자락을 만지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9:24 간질병 아들을 둔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할 때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본문의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간청할 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고 눈을 뜨게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 3-4명밖에 안됩니다. 믿음대로 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응답 받고 치유 받고 변화 받는 믿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너의 믿음입니다.
기도 받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병든 사람의 믿음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환경이 어려운 사람의 믿음입니다. 사방에 우겨 쌈을 당한 사람의 믿음입니다. 너의 믿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왜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습니까? 물이 깊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사람들이 문제에 빠져 죽습니까?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이고 기도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 앞에 겸손히 기도하면 아무리 비참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만나주시고, 아무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가던 발길을 멈추시고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시고 꼭 필요한 것이라면 응답하십니다. 아멘

문제는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문자적 믿음이 아니라 역동하는 숨쉬는 믿음입니다.

바디매오는 세상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영적 부자였습니다.
사실 성도의 재산은 믿음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은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영적 거지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아무것이 없어도 영적 부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발길을 멈추게 한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가지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메시야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능히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비참하고 버림받은 가능성이 없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주님이 부르실 때 겉옷을 버리고 뛰어 일어나 가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미그적 거리지 않습니다. 액션이 없는 믿음은 역사 하는 힘이 없습니다. 믿음은 행동을 동반합니다.

겉옷을 버리고 뛰고 일어나고 달려갑니다. 그것이 행동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중에 성령 충만을 받고 40년 된 앉은뱅이를 볼 때 기도하면 나을 믿음이 있었기에 기도하고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손을 잡고 잡아 일으키는 행동이 수반됩니다.

믿음은 행동이 따라 갑니다.
복음을 외치고 전하면 구원받을 것을 믿는 사람이 전도하면 외치는 것입니다. 작정기도 하면 응답 받을 믿음이 있는 사람은 문제 속에 함몰되지 않고 만사를 제치고 간절히 작정 기도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있을 때 포기하는 헌신도 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버리고 뛰어 일어나 달려갑니다. 겉옷은 거지 바디매오의 전 재산입니다. 그의 인생의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입니다. 겉옷은 그에게 희망이고 삶의 근거입니다. 인생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밤에는 덮고 자고 낮에는 구걸할 때 사용하는 자기 재산 목록 1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것을 버립니다. 주님이 전부가 되었고 주님이 공급해 주고 책임져 줄 것을 믿었기에 버린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희생을 각오합니다. 부자 청년은 따라 오라는 말씀을 받았지만 재물을 버리지 못해 예수님을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제자들은 높은 자리가 탐이나 섬기는 축복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자기의 모든 것인 겉옷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각오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믿음은 버림에서 시작됩니다. 통에 물을 받으려면 먼저 썩은 구정물을 버려야 생수를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구할 때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미움을 버려야 합니다. 새 옷을 구하여 새 옷을 줄 때 입고 있는 헌옷을 벗어야 합니다.

버리지 않고 움켜잡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새 것을 줄 것을 확신한다면 먼저 헌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적 죄 된 삶을 버릴 때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찾은 바디매오에게 주님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합니다.

그때 바디매오의 대답은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대화를 여기에 기록한 것은 아주 의미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아야 할 제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난 받으실 메시야로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나 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거지 소경은 도전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것을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신령한 것, 영원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을 보기 위해 간구하는 믿음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을 위해 육신적이고 죄된 것을 과감히 버릴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야고보와 요한에게 권력을 구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영적인 힘이고 영적인 부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사랑하시면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축복이고 영적인 재산이고 영적인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부자는 영적인 것을 보지 못했기에 재물로 인해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제자들도 아직 영적인 것을 보지 못했기에 자리 때문에 분내고 싸우고 다툽니다.

개똥벌레와 같습니다. 개똥벌레는 수입 오렌지를 주면 먹지 못합니다. 쇠똥을 주면 좋아합니다.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부자 청년은 쇠똥 같은 재물로 인해 영생을 포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아직 보지 못하는 제자들은 높은 자리 때문에 섬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가정, 자녀, 재물, 성공, 질병에 관한 하나님 관점, 영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것을 보는 자들엘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제자들이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 영적인 것이 보일 때 모든 것을 버립니다. 성령이 통치가 임할 때 돈보다. 자녀보다, 권력보다 더 좋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 모든 것들을 버립니다. 가정도 성공도 재물도 인생도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합니다. 이전에 절대 버리지 못한 것들을 성령의 통치가 임할 때 성령의 통치가 너무 좋기에 버리고 주님만 따르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통치를 받을 때 고난을 받겠느냐 할 때 아멘하고 고난의 자리로 나아깁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섬기는 자리에 서겠느냐 할 때 눈물을 흘리며 아멘 합니다. 행2장은 재산을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겠느냐 할 때 아멘합니다. 성령의 통치 속에 들어 갈 때 영생이 보입니다. 영적인 것에 눈이 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을 위해 땅의 것을 버림에 익숙합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것이 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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