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 (골 3:22 - 25)

  • 잡초 잡초
  • 1093
  • 0

첨부 1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
골로새서 3 : 22 - 25

제가 고향에 계신 어머님을 뵈러 갈 때면 충북음성 꽃동네를 지나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 꽃동네 설립과 함께해 온 모 신부가 후원금 횡령 및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불구속 기소되었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그가 34억 6천만 원이라는 돈을 횡령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군이나 사회를 막론하고 아직도 뇌물이 없으면 진급은 물론 현상도 유지할 수 없다는 일부 보도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누가 보지 아니해도 양심에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 앞에 진부한 이 시대의 타락한 성도의 양심이 언제까지 속죄의 은총으로 포장되어 갈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성도들이 정직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를 기대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 도덕적 차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필요한 때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주의를 버리고 남을 배려하는 사랑과 희생의 의무가 그리운 때입니다.
경주의 최부자 집은 400년 동안 내려오는 가훈(家訓)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
둘째는, 만석이상 재물은 소유하지 말 것
셋째는, 만석이 넘는 것은 사회에 환원할 것
넷째는, 100리 안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없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가훈은 그 가정의 정체성인 동시에 함축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직장생활의 원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원칙을 요약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주인과 하인 혹은 노예로 사회신분이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구조는 철저히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양분되어 있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절대 다수는 피지배자 부류인 하인 혹은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당시의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 중에는 이러한 하급 계층에 속한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은 자기가 다니는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파업도 하고 해당관청에 진정도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구조에서는 그런 일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교인들 중에 하급계층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배자인 상급계층의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직장에서는 상관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 했을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직장에서 해야 될 원칙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Ⅰ. 그리스도인의 직장은 각자의 신전 인격이 나타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 다.

본문 3장 22-23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육신의 상전}이라는 말은 하늘의 상전(골 4:1)과 대조되는 말로 '이 땅에서의 상전'을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 {순종}이라는 단어는 소극적인 자세의 순종이 아니라 어린 자녀에 대한 부모의 요구와 같은 강제성이 부여된 순종입니다.

또한 {눈가림}이란 말은 주인을 속이는 사기성 있는 태도를 말합니다. 반대로 {성실한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는 마음입니다. 육신의 상전에 대한 이러한 순종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결과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가림으로 일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가림으로 하는 일은 옛날부터 우리 주위에서 흔히 듣는 익숙한 단어입니다. '눈가림으로 일하지 말라'(메 엔 옵달모둘리아, )란 말은 말로 표리부동한 거짓된 행위를 말합니다.
좀 바꾸어 말하면 무슨 일을 되게 하지 않고 되는대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직장에서 월급을 받아 챙기는 일은 결사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좀 근무여건이 좋은 곳이 생기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다니던 일터를 헌신짝처럼 내 버리고 직장을 옮기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처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직장은 결국 자신과 오너(사장)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눈가림으로 해서는 안 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남의 밑에서 일하는 직장인과 개인사업을 하는 사람들과는 교회생활에서도 차이가 확연합니다.
세간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는 말 중에 '남의 밥을 오래 먹다보면 눈치만 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이해하는 데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다니는 세상 직장에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직장생활은 직장의 오너(사장)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직장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상급을 내리신다는 것을 감안 할 때 우리가 직장 생활을 눈가림으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듯이 직장의 상사를 위해 일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충성을 다했는데도 자기가 기대한 만큼 보상이 절대적으로 적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보다도 더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직장을 향해 분풀이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은 이 땅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저 천국에 가서 온전한 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그러한 불이익에 대하여 자신이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차 받을 상은 더 크고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군종으로 근무하다가 제대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군목으로 계시던 목사님께서 저에게 "자네가 제대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거든 회사의 담배꽁초를 일년만 줍게 그러면 자네는 분명 승진이 될 것일세 거기에서 끝나지 말고 일년만 더 주우면 자네는 그 회사에서 아주 귀한 자리에 앉게 될 것일세."라고 한 말이 제대한지 30년이 된 지금도 어제 한 말처럼 기억이 납니다.

Ⅱ. 그리스도인의 직장은 주께로부터 받을 상급이 확정되는 곳입니다.

본문 3장 24-25절에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직장에서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는 종들에 대한 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보상은 주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성실한 종이 받아야 할 보상은 바로 유업이라고 했습니다. 이 유업을 약속하신 이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1장 5절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2절에 또 기록하기를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을 분명히 받되 다 받지 못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애매히 고난당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때로는 당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직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상급이 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Ⅲ. 그리스도인의 직장은 예수 그리스 도의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실 현되는 것을
증거하는 곳입니다.

골로새서 4장 1절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이데올로기(Ideology)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 행동의 기본이 되는 근본적인 사고'(思考) 혹은 '관념형태'(觀念形態)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직장에 상전이 된 경우입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의 상전은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푸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상전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도구 같은 종들에게 의와 공평을 말한다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여기 {의}는 평등의 정신을 함의(含意)한 것으로 {공평}이란 말에 의해서 그 의미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 상사(오너)는 부하 직원들에게 늘 공평해야 되고 고상한 도덕성을 견지(堅持)해야만 합니다.
여기 하늘의 상전은 앞서 언급한 육신의 상전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경영하는 이 세상 직장의 진정한 의미에서 상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직장에서 상전이든지 종이든지 진정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통치가 적용되는 곳이 바로 이 세상 직장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필연적으로 직장에서 상사든지 부하 직원이든지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당연히 이렇게 되면 직장생활과 교회 생활에 상치되는 부분이 없지 아니할 것입니다. 당장에 교회 출석하는 시간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직장의 구조적 형편을 볼 때 주일날 승진시험이나 자격시험을 보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학생들 경우에는 주일날 수능 예비 시험을 본다든지 학교의 소집일 등을 감안할 때 다른 것은 고사하고 라도 제일 먼저 교회 출석하는 시간과 부딪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마 8:24, 눅 16:13). 사람이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고 사람이 사람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살고 직장에서 벌어오는 월급으로 내 육신이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이 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육이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그 말씀이 땅에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 비가 있었고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 양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직장의 육신의 주인이 진짜 나의 주인이 되고 진짜 나의 주인인 예수그리스도를 잊어버리게 하는 시험이 노골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우리의 직장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생활과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연구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본능적인 방법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엿 새 동안은 직장에만 충성하고 주일 하루는 교회 일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되면 사람의 인격이 이원화되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를 둘 다 무시하는 무모한 행위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이 세상의 일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은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상대적 충실, 절대적 충실이란 말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성도가 다니는 이 세상의 궁극적 주인도, 하나님의 교회의 궁극적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일만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궁극적 주인 되신 예수님은 주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육신의 상전들에게도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상전들이 하늘의 상전을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 바로 상대적이란 말이 적용됩니다. 상대적이란 말은 절대적이란 말과는 달리 비판가능하고 그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면 개인의 자유나 가족의 유대가 위축되거나 파괴되는 것은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신구약 66권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하도록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성경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아니하면 성경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직장은 상전이나 종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세상일에 빠지면 성도로서의 생명은 끝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충실한 직장생활 때문에 교회생활이 장애가 되지 아니하고 교회생활로 인하여 직장생활이 어렵게 되지 아니합니다.
누가 이 세상의 직장생활을 대충대충 눈가림으로만 하고 교회 일만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까?
누가 이 세상 직장에 충성한 나머지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라고 했습니까?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다만 이 세상직장은 상대적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교회 일은 절대적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 세상의 직장은 포기될 수 있으나 교회생활은 포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